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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탐라역사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탐라인
'표석하나 없는' 빌레못…어디로 갈꺼나 | ||||||||||||||||||||||||||||||||||||||||||||||||||||||||||||||||||||||||||||||||||||||||||||||||||||||||||||||||||||||||||||||||||||||||||||||||||||||||||||||||||||||||||||||||||||||||||||||||||||||||||||||||||||||||||||||||||||
30여 원혼 못떠난 '빌레못굴...7일 4.3 해원상생굿 "꽁꽁 얽히고 설킨 마음, 봄볕에 녹여 풀어내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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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대략 20여km를 가서 중산간 애월읍 어음2리에 들어선 후 꼴불꼬불 1km를 동쪽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빌레못굴. 세계 최장(1만1,749m)의 용암동굴로 알려진 이 곳은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된 곳. 굴 입구엔 대리석으로 제작된 '문화재 지정' 표석이 곱게 세워져 있다.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철창과 열쇠로 굳게 잠겨 있는 굴 입구 앞에는 마치 4.3의 원혼이 되살아 난듯 연두빛을 띤 희멀건 볼래낭꽃이 발그레 피어 올랐다. 누군가에 물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반세기전 4.3의 참극을 떠올리기 조차 쉽지 않은 곳 '빌레못'. 60여년 전에도 깜깜했던 이 빌레못굴에는 이날도 그 흔한 볕 한줌조차 들지 않았다.
지난 1949년 1월 16일. 빌레못굴에 숨어있던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 노인 등 23명은 애월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의해 굴 밖에서 불려나와 무참하게 총살을 당했다. 그리고 공포에 떨며 나오지 않은 몇몇이 굴 속에 남겨져 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4~5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당시 생존자의 증언으로 짐작할 뿐이다. 희생자는 주로 어음, 납읍, 장전 사람들로 빌레못굴 학살 현장에는 아직도 7개월된 아이를 바위에 메쳐 죽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역사의 현장은 1970년대 초반 유해 4구가 동굴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면서 세상에 4.3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7일 오전부터 4.3 제59주년을 맞아 여섯번째 학살 현장을 찾아 열린 빌레못굴 4.3해원상생굿.
먼저 빌레못 동굴 입구에서 채 풀지못한 4.3 원혼들을 위한 놀이패 한라산의 '몸굿'이 펼쳐지고, 가수 최상돈씨의 이들의 넋을 달랬다. 이날 해원상생굿은 죽음으로 내몰린 인간의 영혼과 그 상처를 가슴으로만 묻어간 기억의 치유를 풀고, 버려진 원혼의 찢긴 상처의 연유를 굿의 형식을 빌어 다양하게 풀어냈다. 이날 강덕환 시인은 '산불근 해불근'이란 제목의 '시(詩) 보시'를 통해 가신님들의 넋을 달랬고, 강미리 부산대학교 교수의 춤굿으로 꽁꽁 묶인 마음을 풀었다. 마지막으로 희생자 29명의 위패와 함께 인체 모형을 본 뜬 상징조형물과 소지를 방사탑(거욱대) 앞에서 태우며 억울한 영혼들이 원한을 풀고 편안한 저승길로 들어서는 의례로 이날 행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날 천연기념물을 알리는 '대리석 표석'은 있었지만, 4.3의 피맺힌 학살의 현장임을 알리는 '4.3 유적 표석'은 고사하고 '팻말' 조차 없어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와관련 제주민예총은 "최근 유적지 보존 정비 사업을 진행 중에 있지만 여전히 4.3의 현장을 알리는 표석 설치 조차 인색하다"며 "이번 해원상생굿을 계기로 표석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4.3 해원 상생굿은?
다시말해 비극적 죽임을 당한 '학살의 터’를 찾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장소 즉 땅인 자연까지도 함께 치유하자는 상생의 굿판이다. 아울러 현재의 문화예술과 전통적인 굿을 빌려 죽은 자와 죽은 땅에 보시하고 맺힌 죽음과 맺힌 땅을 풀어주는 '풀어줌의 미학'이다. 특이 해원상생굿은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치유되어야 할 대상임을 일깨우는 일이며, 죽음의 터전이 되어 기억하기 싫은 몸서리치는 죽은 땅을 살리는 제의이다. 이날 현장에는 열두문 저승질, 위령만장, 배향 신위, 열두 돌 까마귀 솟대 등 설치 미술을 통해 죽은 넋을 달래는 갖가지 조형물을 세운다. 해원상생굿은 극이 아니다"는 (사)제주민예총 4.3문화예술사업단은 "잘 만들어진 공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한 느낌을 만나는 역사적인 공간과 조우하는 자리일 뿐"이라며 "따라서 연출되지 않는' 날(生) 것'의 미학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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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곳은 제 고향인데 당시 이 빌레못굴안에서의 유일한 생존자이신 분과 군경토벌대에 의해 강제차출되어 길잡이를 해 이 굴을 안내했었던 분이 현재 생존해 계시는데 저희집의 제삿날에 같이 오셨다가 그때 예기를 실감나게 하는 걸 들은적이 있습니다.심문한다고 송씨어느 청년에겐 굴옆 벌판에서 목에 밧줄을 메고 말고 끌고 다니는 고문을 하다가 버리기도 하고 그납읍리 경찰은 친척여동생마저 머리에 총을 쏴버릴 정도였고 시체들을 찾으러 갔었던 친척들마저 전부 총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다음날에 납읍리는 인근부락에서 온 무장대의 습격을 받으면서 아래마을로 소개되어졌고 이후로 저희 부락과 납읍리는 원수가 되어
한동안 결혼도 반대하고 햇다고 합니다. 납읍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찰이 많은데 아직도 동네 위세가 쎈편입니다. 또 6,70년도초에는 저희 동네에서 친지마저 없어져버린 토지들을 아랫마을 자경단들의 명의로 많이 넘어 갔고 이후 중산간개발붐이 일면서 외지인들에게 팔리면서 이제는 골프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지요. 지금 제주에 골프장들이 많은데 아마 거의가 내력이 있는 땅일겁니다.제 마을이어서 괜히 길어졌습니다.
문창선님께서 등업이 안 된 상태네요. 선생님께서 등업을 해주셔야 할텐데... 실수로 하지 않으신 듯 한데요....
해원굿이 계속되어 모든 맺힘을 풀어낼 수 있기를.......
가슴이 아픈 고통의 역사...
빌레못 생존자, 길잡이 이런 분들이라면 아마도 증언 채록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가능하면 문창선씨 나름으로 한번 정리하시면 어떨까요?
해원상생굿은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치유되어야 할 대상임을 일깨우는 일이며, 죽음의 터전이 되어 기억하기 싫은 몸서리치는 죽은 땅을 살리는 제의이다.----->안타까운 영혼과 희생자 가족, 그리고 아름다워서 더 아픈땅 제주~ 치유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