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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원문보기 글쓴이: 스데반 황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세 가지의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세 가지 관계는 첫째는 자신과의 관계이며,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이고,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세가지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4절은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조건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5절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6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대신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본문을 가만히 보면 4-7절의 중심은 5절 후반입니다. 즉,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가 본문의 중심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결과는 7절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라”.
따라서 본문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을 바라고 고대하는 것이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관계의 중심인 것을 말하는 것 있습니다.
즉, 세 가지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힘과 동기와 중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대하고 믿고 의지하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다시 표현하면 "주께서 가까우시므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관계를 하나 하나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환경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로마의 깊은 감옥에 있습니다. 그 어두운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매였다’ 또는 ‘갇혔다’는 말을 4번이나 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3-17)
환경이 기쁨의 원천이라면 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바울이 권합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참 기쁨이란 외부 고난이나 어려움에 의하여 빼앗길 수 없음을 역설하며 주님만이 기쁨의 원천이요 근원인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는 “주님 안에 있으면” 항상 기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계집 종을 만나게 되는데 그 소녀의 주인은 그 계집 종 때문에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을 방해하는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문제는 이 계집 종의 주인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자신의 친구들과 친족들을 불러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에게 끌고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도시 전체로 하여금 로마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고 거짓 증거를 합니다. 결국 관원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매를 칩니다.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의 발에 착고를 든든히 채운 후에 깊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한 밤 중이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는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이때 주변의 죄수들이 그들의 찬미를 듣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간음자, 폭행자, 살인자, 마약범, 유괴범, 도둑놈 등, 온갖 더럽고 잔인한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한 바울과 실라의 찬미는 그들을 조용히 만듭니다.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모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착고가 벗겨집니다. 간수가 자다가 일어나니 옥문이 열려있었습니다. 간수는 모든 죄수들이 다 도망한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책임을 감당치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또한 그 다음날 죄수들 대신에 사형 당할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때 큰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 간수가 돌아보니 바울과 실라, 그리고 모든 죄수들이 도망가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때 간수가 바울 앞에 무릎 끊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사실 간수는 그 밤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으며 환경을 초월하는 바울과 실라의 기쁨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이제 바울과 실라를 채찍으로 때렸던 그 간수가 그 때렸던 자리를 씻기고 치료합니다. 그리고 그 밤에 온가족을 불러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풍성한 음식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크게 기뻐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도 늘 천사와 같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사실 분노와 미움의 군중들 앞에서 돌로 맞아 죽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기쁨이 한없이 충만합니다(행 7:55). 그러나 그 기뻐하는 스데반을 미움으로 가득찬 유대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며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는 그 순간에도 성령이 충만하였고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향해 한없는 사랑이 넘쳤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가졌던 기쁨은 선으로 악을 이긴 기쁨이요, 사랑으로 미움을 승리한 기쁨입니다.
성경은 이런 기쁨! 곧 세상 사람들이 귀를 막고 죽이고 싶은 기쁨! 무서운 기쁨, 능력의 기쁨, 어떤 미움의 사건 속에서도 용서할 수 있는 기쁨, 사랑의 기쁨을 ‘주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졸업한 Westminster 신학교에서 선교 대회가 있었습니다. 제 평생에 한번도 잊을 수 없는 간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인도네시아 선교사 한분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선교사님은 자신의 선교에 대하여 주욱 눈물로 간증하더니, 맨 나중에 이러한 고백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예수님을 알고 사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나는 그분를 위하여 타죽고 싶습니다."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이 제 진정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를 위해 제 몸을 태우고 싶습니다.”
“I want to burn myself for MY LORD.”
그 엄청난 기쁨! 주님을 위해 타고 싶어 하는 한 선교사! 그 분은 자신을 주께 번제로 드려 태우고 싶을 만큼 주님으로 인하여 한없는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슬람 사람들이 있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로마 시대를 보면 그 잔혹한 네로 황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변태 디오클에티안 황제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살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사자 밥이 되게 했으며 산채로 불에 태워 화형을 하였고 나아가 밤에 가로등처럼 쓰기 위하여 사람의 몸에 기름을 발라 대나무 창으로 사람의 몸을 관통 시켜 메달은 후 밤새 밤을 밝히는 불빛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어린아이를 꼭 안고 사자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외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순교 한단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니! 이제 조금 후에 우리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나자.”
한국의 일제신사 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로는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특히 안이숙 여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주남선, 한상동 목사, 박관준 장로님 등이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체험이 다 책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분들이 어떻게 일제의 고문과 핍박을 견뎌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이숙 여사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읽어 보면 매우 귀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 책을 보면, 1937년에 발생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안이숙 여사가 젊은 처녀였을때인데 일본 경찰을 피해 박관준 장로님과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후 1939년에 박관준 장로님과 함께 삐라를 제작한 후 옷 속에 숨기고 일본 국회 의사당에 들어가 삐라를 뿌리며 외칩니다.
" 여호와의 말씀이라"
삐라 내용에는 “신사참배를 폐지하라”, “일본은 국교를 신또에서 (천왕 숭배) 기독교로 바꾸라.”, “양심적인 신앙의 목사님과 학교 선생님들을 감옥에서 출옥시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당장 안이숙 여사와 박관준 장로님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경시청에 구금됩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후에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에서 감옥살이 6년을 더하게 됩니다. 평양 감옥에서 박관준 장로님은 죽고, 안이숙 여사는 사형 집행 몇 시간 전에 한국이 일본에서 해방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안이숙 여사는 평양에서 감옥 생활을 할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순교를 보았습니다. 포승줄에 매어 끌려가 죽어가는 목사님들!
그런데 특이한 현상은 주님 때문에 죽어간 그 분들의 얼굴들! 죽음 직전의 그 분들의 얼굴은 다들 한결 같은 기쁨의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안이숙 여사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일제 치하의 감옥 생활 속에서도 주기철 목사님과 수화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안이숙 여사는 출옥 후 그 분들을 평생 잊지 못하며 그분들의 기쁨의 근원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남은 평생 증거하며 살아가시면서 일제 신사참배의 산 증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의 신비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가장 크게 체험 되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들에게는 가장 극한 고통의 순간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얼굴에는 한 없는 눈물이 흐르지만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겉잡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외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둘째, 주님을 가슴에 안고 있는 자들은 이웃을 향해 관용을 나타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관용이란 친절, 용서, 인내, 사랑을 포함한 단어입니다.
관용이란 꽃 향기처럼 자연스럽고 풍요롭고 조용합니다. 이러한 관용은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반사입니다. 나를 위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다시 오실 주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감격을 깨달을 때, 그 한없는 십자가의 용서를 알 때, 용서받은 창녀의 향유가 온 방안에 향기를 낸 것처럼, 우리 안의 주님으로 인한 기쁨은 이웃을 향하여 관용이라는 아름다운 향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복음을 체험하지 못하였기에 세상 사람들보더 더 째째하고 인색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화를 더 잘내고, 작은 일에도 심하게 따지면서 다투고, 쉽게 용서하지 않고, 화를 풀지 않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는 관용이 없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되겠습니까? 그 이유는 복음으로 인한 참된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은혜와 기쁨을 체험치 못하니 이웃에게 자비하며 관용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마음 속에 우상이 있어서 미움과 증오의 감옥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용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기쁨이 우리속에 충만하다면 무엇 때문에 시기하고 경쟁하고 불안해 하겠습니까? 자신의 삶 속에서 관용의 부족을 느끼는 자들마다 이 시간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관용이 부족한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의 기쁨의 실체를 체험하게 도와 주소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품고 이 세상 것으로 다투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우상에게 속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 합니다.”
라고 기도하며 주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에서 관용하기 바랍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며느리에게 시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자녀들에게 관용하기 바랍니다. 직장에서도 관용하길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관용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이는 여러분은 이 세상 것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고 가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서로 관용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관용하십니까?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염려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불안과 고민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어떤 사건도 우연이 없기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의 부족이 염려입니다. 그러나 만일 십자가의 진정한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또한 나의 삶의 모든 일들 속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한두살 짜리 아이들은 낯선 곳에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과 염려로 엉엉 울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새 나타난 엄마를 볼때 그 어린아이의 염려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런 능력 없는 엄마를 보고도 염려가 다 사라지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나를 향하신 사랑을 안다면 우리의 염려는 분명히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주님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의 증거가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십자가는 최고의 고통과 실패의 사건 속에서 최대의 승리를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어찌 염려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염려는 단지 우리 마음 속의 불신과 허상일 뿐입니다.
본문은 염려를 제거할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대치의 원리입니다. 즉, 염려 대신에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룁니까?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내 맡기는 헌신과 간절함! 이 간절한 간구는 우리의 염려를 몰아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라는 찬양을 아십니까?
사실, 염려는 믿음과 감사와 참된 기쁨의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염려와 믿음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염려가 있읍니까? 이미 받은 많은 축복을 세어 보기 바랍니다.
영생을 주시고 건강주시고 친구주시고 교회주시고 부모님 주시고 많은 위로의 만남과 사랑과 관심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을 세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감사는 죄악으로 인해 지옥 불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고 감사한다면 염려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인도네시아의 선교사처럼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그 은혜를 감사하고 싶은 자들이 된다면 어찌 염려가 설 곳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세가지의 바른 관계를 가질 때, 즉, 기뻐하며 관용하며 염려를 감사함으로 아뢰는 관계를 가질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킬 것입니다.
약속된 이 평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의 이해와 환경을 초월하는 평안입니다.
베드로가 무서운 풍랑 속에서 물위를 걷는 평강이요, 우리 주님이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한 평강입니다. 아파 쓰러질 수밖에 없고 낙담하여 좌절할 수밖에 없으며 슬픔에 짓눌려 신음하고 심지어 괴로와서 죽고 싶은 욕망의 그림자로 다가올 때,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의 평강으로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입니다. 모든 이해와 환경을 초월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함입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하는 평안함이요, 햇살처럼 창문 틈으로 비치는 고요하고 세미한 평강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나의 마음을 녹이고, 눈물 자욱 뒤에 기쁨을 남기는 평안입니다. 또한 새롭게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새 출발을 하게 하는 살아 있는 능력의 평안입니다. 이는 평안이란 믿는 자의 영혼 속에 투영된 하나님의 잔잔한 미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평안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주 예수님이 선장되시고 나는 휫바람을 불며 갑판에서 자연을 보며 누리는 평강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영원히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너희에게 주셔서 너희의 온 인격과 그리고 삶 전체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호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능력과 그리고 다시오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들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간간이 느끼는 평강과 기쁨과 만족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지고한 행복의 그림자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성도간의 위로와 격려! 주님 안에서 누리는 감사 및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통하여 지금은 비록 연약한 평강이지만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지금 내게 궁핍함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오해와 슬픔이 있어도, 또한 내 속의 죄성으로 인하여 신앙 양심의 고통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는 이 우주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이 새로운 세가지 바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미소로 늘 풍성하게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순간마다 하늘의 기쁨과 평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