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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굿과 양의 침묵
(사53:7~9)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오늘 이 유명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가지고 ‘초혼 굿과 양의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초혼 굿이라 하면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굿거리 종류 중에 하나입니다.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내는 굿을 말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혀서 죽은 사람 때문에 집안에 재앙이 임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당을 불러다가, 원망에 사로잡혀 세상을 뜬 그 사람의 혼을 불러내고 음식과 술과 음악으로 달래서 그 사람의 한을 풀어줌을 통하여 집안에 낀 재앙과 재액을 물리친다 하는 것이 초혼 굿의 목적이 됩니다.
사람의 혼을 불러내는 것이 초혼 굿이지만 이 굿이 성립하게 되는 무속의 사상 속에 모든 굿을 가능케 하는 3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청신의 단계입니다.
신을 청한다는 뜻입니다. 굿을 하며 신을 청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신의 단계입니다.
오락할 때 오를 써서 신과 더불어 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송신의 단계를 거쳐 끝이 납니다.
송신은 왔던 신을 다시 돌려보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3가지 단계의 굿을 통하여 굿이 진행이 됩니다.
그들을 신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해신, 지신, 하늘신, 천신, 그리고 부엌에도 신이 있고 온데 다 신이 있지요.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신학적 지식과 배워온 신앙의 내용적으로 볼 때 참 신은 하나님 한분 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무당이 불러낸다고 생각하는 천신과 지신과 별신과 달신 모든 것은 다 귀신의 변화요, 귀신의 변장입니다.
심지어는 죽은 시어머니에게 불효한 것 때문에 집이 망한다는 생각으로 죽은 시어머니의 혼을 불러낼 수 있다 생각하고 실지 무당이 그 혼의 힘을 입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을 막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혼이 다시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에요.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관할 하에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혼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귀신이 귀신같이 시어머니의 살아생전 하던 말들을 알아가지고 시어머니의 혼처럼 변장을 해서 무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닙니까? 그게 굿이에요.
온갖 잡귀를 생활의 공간 안으로 불러드립니다.
그리고 그 귀신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 무당의 사상 속에 근본적으로 들어있는 것은 신에 대해서 인간이 열등한 존재이고 신을 인간이 숭배한다고 하는 사상이 없습니다.
무당의 생각 속에는 신과 인간은 대등하고 역할과 능력이 다른데 평소에는 인간들끼리 그냥 그렇게 살다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면 비로소 신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 신과의 교통이 가능한 무당이 굿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을 초청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deal을 한 다음에 그 deal이 결말이 지어지면 다시 신을 보내버리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도 문제가 있을 때 와서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집안이 편안하면 교회 안 나오기 시작하지요?
바로 무당의 굿거리처럼 신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활이 편안할 때나, 생활이 힘들 때나 꾸준히 하나님을 찾지요.
자! 굿은 이렇게 청신 오신 송신으로 이루어져서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어요.
전혀 다릅니다마는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점이 있어요.
무슨 얘깁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의 순간순간 속으로 하나님의 신이 내려오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순간순간 내 삶의 일상 속에서 나와 만나고 나와 함께하며 나의 삶을 이끌어가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무당은 송신해버리고, 신을 보내버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신과 함께 영원의 세계까지, 사후의 세계까지 함께 동고동락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초혼 굿과 기독교의 하나님과의 동행을 함께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에요.
무당이 굿거리를 하며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거나 귀신을 불러낼 때에 진혼이라고 하는 주문을 외우게 됩니다.
눈에는 충혈이 되고 목에는 핏발이 서고 술을 마시고 뿜어내면서 무당 옷을 입고 꽹과리를 치며 작두 위를 걸어 다니며 노래하고 신을 불러댑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몰려다닐 정도로 큰 소리로 주문을 외며 노래하며 초혼가를 불러대고 신을 불러댑니다.
그럴 때 귀신이 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참 영을, 참되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의 삶에 순간순간 속으로 모셔 들일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길 침묵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무당의 초혼 굿거리와는 다르게 침묵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영을 오늘 하루하루 진행되는 삶의 일상성 안으로 모셔드릴 수 있다는 것이에요.
부엌으로, 안방으로, 직장으로, 학교로 하나님을 모셔드릴 수 있는 길은 침묵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천지를 지으신 그 능력을 갖고 우리의 삶속에서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시고 허무함을 결실로 바꾸시고 모든 결핍과 눈물과 걱정과 근심을 타개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에너지가 우리의 삶속에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여러분 미국의 주 중에 서편에 있는, 라스베가스를 가장 큰 도시로 포함하고 있는 네바다 주가 있습니다.
네바다 주는 스텝과 사막 기후로 이루어져서 높은 구릉들이 있고 사막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막은 모든 문명과 도심의 소요로부터 또 잡음으로부터 인간의 말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태고의 정적이 흐르는 곳입니다.
소리가 있다면 바람 때문에 날려가는 모래 소리요, 바람 소리뿐입니다. 태고의 소리지요.
이 침묵이 지배하는 네바다 주 사막위에 그 밑에 깊이깊이 내려가면 끊임없는 지구를 몇 번씩이라도 쪼개고 남을 핵실험장이 있어서 핵폭탄이 터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마음속에 그려보세요.
이곳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태고의 침묵이 감돌고 있는 사막의 밑바닥에 감당하기 어려운 핵에너지가 폭파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의 생활, 일상성 밑바닥에서부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에너지가 뿜어 올라오기 시작한다는 것이에요.
침묵이 없이는 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잡히시는 모습을 예언한 내용 아닙니까?
어린양이 도살장에 끌려갈 때처럼 잠잠하고 말이 없었다.
암양이 목자가 양털을 깎을 때처럼 온몸이 발가벗겨지고 있는 그사이에 아무 말 없는 것처럼 아무 말씀 없이 침묵하셨다.
십자가의 견딜 수 없는 고난 앞에서 고난을 관통해 가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아버지만 바라보시고 침묵하셨다 하는 얘기입니다.
온 세상이 죄악의 힘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있을 그때에, 한 인간,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가 견딜 수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며 할 말도 많고, 원망도 많고, 짜증도 부리면 부릴 수 있는 그 상황에서 침묵하심을 통해 온 지구를 덮고 있는 죄악의 힘이 하늘의 핵폭탄 같은 구원의 능력에 의해서 깨져, 깨져, 깨져나가고 그 죄에 깨진 창조적 구원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겁니다.
한사람이 침묵함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하나님의 신이 세상을 지금 구원해 가고 계십니다.
무당은 떠들어야 됩니다.
무당은 진혼을 주문을 외며 온 동네가 시끄럽도록 떠들어야 귀신이 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눈앞에 놓인 문제 앞에서, 눈앞에 놓인 아픔 앞에서, 눈앞에 다가온 괴로움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양처럼 침묵합니다.
이 침묵 밑바닥에서부터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우리의 삶을 창조하시던 그 힘으로 이끌어가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침묵이 없는 곳,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
영화를 보면 드라큐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 중에 드라큐라를 쫒아냅니다.
어떻게 쫒아냅니까? 드라큐라가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뭡니까? 십자가에요.
드라큐라가 이빨을 내고 옵니다. 얼른 십자가를 딱 내밀면 드라큐라가 도망갑니다.
그 다음 편을 보니까 그 십자가를 우습게 알기 시작해요.
그럼, 그 드라큐라는 뭐로 쫒아냅니까? 마늘.
한국사람은 드라큐라를 다 죽일 수 있어요. 김치 많이 먹고 “하아”하면 다 도망가요.
귀신은, 드라큐라는 십자가로 쫒아내고, 마늘로 쫒아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활, 구체적인 순간순간 속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문제와 난관과 곤고와 환란을 여러분이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판단하세요?
여러분이 해결책을 모색하세요?
여러분이 그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세요?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을 쫒아내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간단하게 여러분의 삶으로부터 쫒겨나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문제를 붙잡고 이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 스스로가 노력하고, 여러분 스스로가 판단하고,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고, 욕망이 끄는 대로 욕망을 따라 계속해서 말하는 동안에, 여러분이 자녀를 보고 여러분이 남편과 아내를 보면서 무엇이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하다, 여러분이 교회를 보면서 무엇이 부족하다, 부족하다 판단하고, 말하고 있는 그 동안에 하나님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여러분의 심령 바깥으로 쫓겨나십니다.
하나님이 임하셔서 이끄시면 지구 전체가 반대를 해도 하나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여러분 마음에 못 들어오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하세요. 여러분이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욕망을 따라 여러분의 뜻대로 계획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간단히 쫓겨나십니다. 간단히.
여러분, 시편 46편 10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나님은 옆에 와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몰라요. 말만 들었어요.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 몰라요.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몰라요.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마음에.
왜 그런지 아십니까?
침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침묵해본 적이 없어요.
눈에 보이는 문제와, 눈에 보이는 환경과 귀에 들리는 생각들 속에서 침묵해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 때 한 것처럼 침묵하며 그 길을 가본 적이 없어요.
모두가 다 하나님을 쫒아냅니다.
아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교회가 산산조각이 납니다. 왜?
교회에서 침묵을 몰라, 침묵을.
어떻게 하나님이 찾아오시겠습니까?
하나님 됨을 알려 하면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에요.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가만히. 가만히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 됨을 알지 못합니다.
모세가 홍해바다 앞으로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왔습니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시나이반도를 통해 가면 2주일이면 도착할 가나안 땅을 아래로 아래로 홍해바다 앞으로 끌어왔어요.
홍해바다는 수심 340M의 검푸른 물이 덮여있는 바다입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야, 돌아가자. 모세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바로의 군대가 칼과 창을 차고 마병을 동원해서 쫒아옵니다. 다 죽이려고.
이때 모두가 동시에 모세를 봅니다. 그리고 모두가 사막에서 돌을 집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사막으로 끌어내서 여기서 공동묘지를 만들려고 그러느냐? 너 죽어볼래?
250만 명이 모세를 향해서 들끓을 때,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에게,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제발 가만히 있을 지어다. 소리소리 지릅니다.
가만히 있을 지어다. 가만히 있어라.
역사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가만히 있어라. 입 다물고 있어라.
이쪽에서 얘기합니다.
가만히 있을 처지가 되느냐? 원망하고 불평하고 너를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이때 하나님의 역사가, 온 이스라엘 좌중이 갑자기 소리가 뚝 끊어집니다.
홍해는 여전히 시퍼렇게 있고 말발굽 소리는 가까이 옵니다.
모세가 손을 들자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봅니다.
사막에 정적이 흐릅니다.
드디어 하늘에서 바람이 붑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마른 땅처럼 홍해를 걷습니다.
가만히 있기 전까지는 홍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옆에서 내 머리로, 내 경험으로, 내 지식으로 왈가왈부 비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임해요?
임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침묵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는 침묵만이 하나님의 능력과 에너지를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침묵이 없는 곳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침묵이 없는 곳에는 그냥 예수님 믿는 사람이 침묵을 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고 뭐 누가 한마디 하면 거기에 대해 비판을 하고 마음에 안 맞으면 그저 욕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면 그걸로 끝나는 거겠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는 모든 곳은 귀신이 임합니다.
중립은 없어요.
자그마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 문제를 쳐다봅니다. 그 문제를 내가 판단합니다. 그 문제로부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부심합니다. 걱정이 커집니다. 잤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걱정이 두 배로 커집니다. 세 배로 커집니다. 네 배로 커집니다. 그리고 자살합니다.
농담 같지요? 여러분.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한국에서 쌍까풀 성형수술을 한 여자 분이 세 번 반복했는데 제 모양이 나오지 않게 되자 자살했어요.
그 얘기를 전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다 웃더라고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자살할 수 있습니다. 왜?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봅니다.
너무너무 눈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이런 눈 갖고 어떻게 다니지? 그 다음날 또 거울을 보며 눈을 봅니다. 아 정말 미치겠는데.
그 다음날 또 눈을 봅니다. 아 이거 안 되겠어. 그 다음날 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그 다음날 죽으러 갑니다.
고문 중에 제일 무서운 고문이 뭐라고 그랬죠?
물고문입니다. 눕혀놓고 물 한 방울씩 떨어뜨립니다.
고문 받은 입장에서는 한량이에요. 신선 노름이지요. 더워죽겠는데. 붙잡혀서 열 받는데. 이마에 물 떨어진다니까 시원하고 좋지요. 4시간 반복됩니다.
똑, 똑. 하루 지나 이틀 지납니다.
이틀 지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이 사람이 친구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그 물방울만 쳐다보고 그 물방울만 느낍니다.
이틀, 삼일 지나가면서 물방울 하나 떨어질 때마다 바위가 됩니다.
삼일 지나면서 집채 같은 바위가 됩니다.
5일 지나면서 지구가 내 머리를 으깨기 위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방울 하나 떨어질 때마다 그 사람은 죽는 겁니다.
죽었습니다. 똑 떨어지고 소리를 지르며 죽어갑니다.
이게 바로 마귀가 하는 일이에요.
문제를 보며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걱정하고, 내가 옆에 사람 불러다가 말합니다.
말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커져갑니다.
점점 더 커져갑니다. 말을 따라서…
결국은 마지막에 패망의 역사가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뒤에 사막에서 끊임없는 불평으로 일관해 가다가 20세 이상 60만 장정 모두가 다 사막에서 죽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하지 않는 모든 곳에 마음의 말, 생각이지요? 판단, 입의 말, 끝없이 말이 진행되고 있는 모든 곳에, 초혼 굿에서처럼 귀신이 임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비판하고, 내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사탄에 잡힌 것이요, 끝없이 생각하고 말하는 동안에 초혼 굿처럼, 무당의 굿이 혼을 불러낸 것처럼 귀신이 임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그렇게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되어 가는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침묵의 결과는 여러분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40장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합니다.
야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어떻게 포로로 잡힐 수가 있느냐? 이게 말이 되냐?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맞아, 맞아. 불평이 가득합니다.
이때 이사야가 얘기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하고 말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입 놀리는 것 끝! 그리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앙망하라.
너희가 놓여 져 있는 포로 된 지금의 현상과 환경과 상황을 보며 끝없이 말하고 있는 것을 중단하고 여호와를 마음으로 앙망하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라.
그러면 “새 힘을 얻으리니” 얘기합니다.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새 힘을 얻게 되리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우리는 “구름위의 산책”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함께 나눴어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마음을 예수님 구름위로 보내는 것입니다.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이의 문제, 남편, 아내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그리고 질병의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문제를 놓고 내가 살아? 말아? 내가 이 남자하고 살아야 돼? 말아야 돼? 내가 이런 자식을 놓고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지금 유학을 왔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한없이 커지고 불행해지고 걱정과 근심이 가득가득 눌러서 마지막에는 다 죽고 말아요. 다 죽고 말아.
왜? 귀신이 임하니까. 초혼 굿을 지금 하고 있는 거니까.
침묵하세요. 침묵하세요. 문제 앞에 침묵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며?
믿어지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지만 바라보는 겁니다.
바라보면 문제 앞에 있던 마음이 구름위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 문제 앞에는 누가 옵니까? 공석이에요. 공석.
이 공석을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채우시고 그 문제를 덥석 집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행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름위의 주님께로 간다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침묵.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하나님 됨을 일상 속에서 알고 싶으냐? 침묵하라. 침묵하라.
네가 뭘 안다고 입을 놀리냐? 침묵하라.
여러분, 이 침묵의 결과와 방법이 어떻습니까? 결과는 반복해서 말씀드렸어요.
어떻게 침묵하실래요? 구체적으로.
여호사밧 왕이 다스릴 때에 모압과 압몬과 마혼 자손 연합군이 모래알처럼 많은 군대를 이끌고 점령해 들어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바람만 한번 불면 꺼질, 등불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어요.
이때 여호사밧이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백성을 아이에서 어른까지 다 모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브라함 때에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고, 솔로몬 성전을 짓게 하시고, 성전에서 기도하면 듣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뭐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무슨 얘깁니까?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왕을 향하여 네가 나라를 도대체 이따위로 치리하였느냐? 네가 왕이냐? 돌을 던지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이젠 죽었네. 아이고, 아이고 땅을 치고 난리가 나야 할 상황입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기도합니다.
오직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힘도 없고 어떻게 할지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얘기할 때에 모든 백성이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여호사밧이 바라보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 온 예루살렘 성 안에 태고의 정적이 흐릅니다.
침묵합니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야하시엘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내일 아침에 나가 항오를 벌려놓고 내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을 두고 보라.” 두고 보라. 얘기하십니다.
항오를 벌리고 아침에 나아갈 때 모래알 같이 많은 압몬과 모압의 연합군들이 자중지멸이 일어나고 망하게 됩니다.
어떻게 침묵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앞에 놓여 진 문제로부터 마음을 떼어내고 침묵합니다.
어떻게 할 줄도 모르겠고 이 문제를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오직 나를 사랑하셔서 돌아가셨다는 주님을 바라보며 내가 침묵합니다.
여호와만 바라봅니다.
이때 하나님이 반드시 그 침묵 가운데 말씀해주십니다.
이 싸움은 네게 속한 것이 아니다. 이건 내 싸움이야.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실 것이에요.
여러분, 두 가지 오해를 제거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 보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너에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라는 얘기와 예수님을 십자가상을 걸어가면서 보여주신 침묵은 맞지 않는 얘기 같아요.
그러나 여기에 우리 교회들에 엄청난 오해가 있습니다.
부르짖으라!
문제를 갖고 와서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다니엘 약속기도를 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해결해 주실 때까지 하나님께 소리 높여, 목청 높여 부르짖으라는 얘기겠습니까?
아니에요.
이렇게 부르짖고 있는 동안에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계획은 내게 보여 지지 않습니다.
부르짖으라가 뭐에요?
마찬가지로 포로 시대의 사람들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포로로 잡혔다. 불평과 근심과 걱정과 미래에 대한 암울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때 부르짖으라는 얘기는 뭡니까?
내가 내 인생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걱정하고 판단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서로서로 삼삼오오 불평하는 모든 일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하나님~~~~외치는 소리로 부르짖으며 세상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라고 하는 얘기에요.
부르짖으라. 돌아서라는 얘깁니다.
끊어버리라는 얘깁니다.
마치 스님들이 새벽 예불을 하면서 목탁을 두드립니다.
왜 두드려요? 마음을 사로잡고 번잡케 하는 108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목탁을 두드리며, 목탁소리에 집중할 때 108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합니다.
마찬가지에요. 부르짖으라는 얘기가 무슨 얘깁니까?
너희가 사로잡혀 있는 세상에 대한 생각과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너희의 원망과 불평으로부터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는데 힘들지.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한번 소리를 외쳐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보라는 얘깁니다.
주여 3창을 하고 기도합니다. 3창하는 의도는 좋아요. 집중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내용이 다 뭡니까? 침묵이 아니에요.
이 문제를 놓고 해결하는 방법을 내가 알아놓고 그걸 해결해 달라는 것이에요.
모든 기도가 그래서 뭐가 됩니까? 초혼 굿이 돼버려요.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동안에 굿판이 벌어집니다. 굿판이.
이래서 교회가 편할 날이 없는 것이에요.
전부 내 생각으로 해결하는 것을 다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을 불러서 deal을 하고 해결되면 신을 보낼 생각으로 왜?
그거 문제 해결되면 기도 안 나오잖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보내놓고 끝나는 거예요.
굿판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청신, 오신, 송신의 단계를 반복하면서 기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문제 아닙니까?
부르짖으라. 어떤 내용입니까? 여러분.
크고 비밀한 너를 위해 준비한 사랑의 계획을 보여주리라.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뭐가 있어야 됩니까?
첫째, 어두움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 침묵이 있어야 됩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에 영화는 상영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임하는 것이 부르짖음이에요.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밝히 판단하고 생각하고 내 지혜를 불을 키고 발동시키는 모든 것을 끊어서 캄캄하게 만들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입을 다물라는 겁니다.
그러면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통해서 영화 화면이 비춰지듯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이 내 마음에 두~루루~룩 비춰지기 시작할 거라는 얘기지요.
이거 모르고 살아서 되겠습니까? 안돼요.
두 번째 오해.
굿판은 무당만 하는 건줄 알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판단과 생각이 작용하고 있는 모든 곳은 무당 굿거리 하는 곳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분쟁이 있는 교회에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게시판을 한번 보시지요.
인간의 소리들이 하늘을 찌릅니다. 인간의 소리들이.
인간의 판단과 인간의 원망과 인간의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그 모든 곳에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귀신이 임합니다.
여러분, 복되신 여러분.
모든 세상 사람이 부러워해야 할 여러분, 여러분의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영으로 찾아오시고 싶어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어떤 환란과 곤란과 역경 속에서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믿고 침묵하세요.
침묵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과 침묵하는 분이 계신 가정과 침묵하는 분들이 모이는 교회에 하나님의 영은 핵폭탄 같은 창조의 에너지를 갖고 내려오셔서 하루하루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초혼 굿의 굿거리를 우리의 삶인 줄 알고 살았던 모든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십자가의 아픔과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치욕 앞에서 하나님 되신 주께서 하실 이야기도 생각도 원망도 많았을 수 있으련만 침묵하심을 보며 배웁니다.
양의 침묵을 배우게 하시고 양의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을 우리의 일상 안으로 모셔드리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