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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인문학이란 간단하게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으로만 정의하기엔 부족하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인간의 무늬가 퇴색하지 않도록 하는 ‘인간다움’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인문학’이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아테네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최초의 대학인 ‘아카데미아’를 설립하고 인간됨의 본질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문학의 시작이다.
인문학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교양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일반 교육을 의미했다. 그 후 인문학은 중세 시대에 침체를 겪다가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신’과 대비되는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학문의 방향이 바뀌며 재탄생하게 된다. 이 시대에 인문학은 신 또는 미신으로부터 독립된 인간을 가정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며,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르네상스에 시작된 이 ‘스투디아 후마니타스’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어령 교수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했다. 곧 인문학은 만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치열한 사유 작용이다.
저자는 신학과 인문학은 동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복 교수가 ‘시인이 시를 쓸 때, 저공비행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듯 저자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고,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에, 이 둘은 동행을 통해 온전해질 수 있다’고 한다.
온전한 신앙인이라면 신실한 예배와 기도, 그리고 깊은 성경 통독을 하는 기본 하에서, 그 충만한 은혜가 전도와 선교, 구제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은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탄식과 부조리, 환희 등을 이해하는데 좋은 도움을 준다.
믿음의 거장들은 오래전부터 인문학과 신학을 좋은 동반자로 여겼다. 초대 교부들, 저스틴, 이레네우스, 칼빈, 존 스토트, C.S.루이스 등...
예수님도 하늘의 음성을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땅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2. <공감, 인문학의 매력>
사람들은 왜 인문학에 빠져들까?
인문학은 우리가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보게 하는 따뜻한 공감을 만들어 준다.
인문학은 인간에게 따뜻하게 공감하는 시선을 던져 준다.
우리의 삶은 명료하고 수학 공식처럼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 삶은 리얼하다. 추상적이지 않고 치열하다.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인간의 ‘사랑’을 보자. 얼마나 모호한가? 인문학은 모호한 것을 모호하게 말한다. 이런 점이 인문학이 우리에게 따뜻하게 느껴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느끼게 한다.
또한 인문학은 창의적 사고와 통찰력을 준다. 일상적인 것들을 ‘다르게 보고’, ‘낯설게’ 한다. ‘일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면 퇴보와 몰락을 막고 생명력을 얻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돌파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오늘날 상상력은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중요한 생존 수단으로 필수 중의 필수이다. 상상력을 다른 말로 하면 ‘창조정신’, ‘창의력’이다. 창의성이란 기존의 것을 다르게 보는 능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 다시금 본질로 접근하는 것! 익숙함은 편리함과 동시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안정이 고이고 고이게 되면 정체로 이어진다. 인문학은 이런 사회적 붕괴와 무감동의 일상을 일깨워 다르게, 낯설게 보게 해 새로운 역동성을 준다.
특히 인문학 독서를 함으로 나를 넘어 ‘다름’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타자와의 만남을, 타자와의 그 치열한 생각의 전투를 통해 독자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이렇듯 인문학을 통해 배우는 상상력과 통찰력은 새 길을 개척하는 큰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린 마음은 사람들의 ‘본질’에 이해하고 참 진리를 전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3. <명답이 곧 정답은 아니다>
인문학은 분명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뚜렷하다.
인문학의 제일 좋은 점은 바로 ‘본질에 대한 고민’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에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으로는 채울 수 없는 욕구, 그리움이 있다. 루이스는 이것을 <순전한 기독교>에서 ‘젠주흐트’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갈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영원에 대한 그리움’,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그리움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인생 둘이 있다. 하나는 영원과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인생이고, 또 하나는 영원과 진리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옳지 않은 것에서 그 답을 찾으며 헤매는 인생이다.
인문학은 본질을 찾고 싶어 고민하지만 답을 찾지 못한 신음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
인문학의 열기는 인문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왜 그럴까?
인문학은 만물의 ‘본질’을 보려 한다.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 준다. 그리고 창의성과 통찰력을 준다. 그러나 인문학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하나님은 함께 비를 맞으시는, 공감하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비를 피할 우산까지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명답 정도라면, 성경은 정답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잘 활용하면 복음의 접촉점으로 좋다.
사회가 물질화, 기계화 되어 갈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본질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해답을 인문학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인문학은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참 본질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 무한한 힘을 가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속에서도 변함없는 진리는 ‘예수님’이다.
“인문학을 하나님께”, 규장, 한재욱
발표자: 이동기목사
2. 존재 행복의 출발점
부름, 관계의 시작
이름을 불러주면 ‘관계’가 시작된다. 누구든지 특별한 무엇이 되고 싶어한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너는 내 것이라’말씀하신다.
행복한 짜장면은 짬뽕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제일 불행한 짜장면은 자기 맛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짬뽕을 부러워하는 짜장면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무엇이든 다 하고 무엇이든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자부심 있게 하며 불꽃같이 타오르는 사람이다.
고래여, 칭찬에 현혹되지 말라. 그 칭찬은 너의 몸을 병들게 하고 너의 자유를 빼앗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었다.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일이었다.
비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다 하고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자부심 있게 하며 타오르는 사람이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면 괴물이 된다. 사랑받지 못하고 거부당한다고 느끼면 몸까지 아프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자의 촉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우리는 상품이 아닌 걸작품
절대가치를 지닌 인간
제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는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했다. 말이 600만 명이지 사실 생사람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악마의 탈을 써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나치는 심리전술을 썼다. 수만 명이나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을 몇 개 짓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숙소에 배설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숙소는 짐승의 우리처럼 자신들의 배설물로 가득 찼다. 나치가 이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 자존감의 몰락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죽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라 돼지를 죽이고 있다.”
악한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노림수가 이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려 삶을 무너지게 한다.
이 가운데 기적적으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그는 반 컵의 물 때문에 살았다고 한다. 매일 새벽이면 커피 한잔이 배급되었는데, 이름만 커피일 뿐 미지근한 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남은 그는 그 물을 반 컵만 마시고 나머지로는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그러자 나치들이 그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 반 컵으로 세수를 하고는 눈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나는 돼지가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최고작품인 인간이야!”
수용소의 유대인처럼 마귀는 예수님을 상품화시키려고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돌을 떡으로 만들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해주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품화이다.
상품은 새 제품이 들어오면 쓸모가 없어진다. 그러나 작품은 다르다. 시간이 흘러 손때가 묻을수록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작품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한 작품으로 창조했어도 우리가 스스로를 싸구려 상품같이 여기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과 우리 스스로를 모독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너도 소중한 존재야!
닉 부이치치의 말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만해도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요. 저도 일어서는 데 여러분이 못 일어설 것이 없지 않습니까?”
가지 못한 길, 가지 않은 길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주님은 좁은 문과 넓은 문 사이에서의 선택, 생명의 길과 멸망으로 가는 길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조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쾌락과 행복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고, 물거품과 영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복 있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잘못된 선택을 한다. ‘선택’이라는 뜻의 영어 choice에는 ‘얼음’이라는 ice가 들어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후에 얼음처럼 냉철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중요한 선택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욕심으로 어두워진 눈을 내려놓고 신실한 예배와 깊은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앙망해야한다.
두 청년이 도박장으로 가다가 길가에 있는 예배당 정문 곁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설교제목을 보게 되었다. 한 친구는 강한 죄의식과 함께 교회로 가고 싶었다. 이에 교회에 가자고 했으나, 다른 친구는 뿌리치고 도박장으로 갔다.
30년이 지났다. 감옥에서 신문을 보던 한 친구가 울고 있었다. 신문 1면에 실린 기사는 그날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대통령 클리블랜드에 관한 것이었다. 30년 전, 도박장으로 가다가 교회로 간 그 친구였다.
유혹을 이기는 법
‘실패’를 뜻하는 ‘failure'에 ’유혹하다‘라는 'lure'가 들어 있다. 유혹을 관리하지 못하면 곧 실패한 인생이 된다. 유혹관리를 못하면 인생이 무너진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우리 내부의 죄악된 욕망과 외부의 빛나는 미끼가 하나로 결합할 때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미끼들은 우리의 죄 성을 만족시켜 준다. 그렇다. 죄성이 가득한 눈으로 보면 미끼가 너무나 눈부시게 보여 덥석 무는 것이다. 우리가 미끼를 물 때, 미끼를 문다고 생각하지 않고 마치 아름다운 천사와 포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 키스의 황홀함에 넘어가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은 품은 것일수록 아름답게 보인다.
천국의 도성으로 가는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남아 있는 죄성은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존재한다. 그 죄성과 싸우면서 성화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캠벨 몰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함은 아예 유혹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유혹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비법은 유혹보다 더 좋은 것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혹보다 더 좋은 내면! 그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사명이다.
허영 그 거짓 영광이여!
“여자는 허세를 부리는 남자를 경계하고, 남자는 허영심에 빠진 여자를 경계하라”
허영은 자신을 망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까지도 파괴할 수도 있다. ‘속이 비어있는 영광’이 바로 허영이다.
교만의 또 다른 얼굴, 허영
자기의 본 모습을 넘어서 자기를 크게 포장해 과시하고 싶은 욕구, 이것이 허영이다. 허영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것으로, 남들 앞에 크게 높아지려는 인간의 죄성이다. 교만이 자리와 권력과 관련이 있다면 허영은 주목과 인정에 연연하는 죄악이다.
교만한 사람은 우월성을 추구하고, 허영된 사람은 우월하게 ‘보이기를’ 갈망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경우가 더 많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는 허영심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진짜 행복을 놓치는 수가 많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에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을 한다. 천사의 호위 속에 땅에 사뿐히 내려 앉아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허영의 유혹에 눈 하나 깜박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십자가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하나님께. 한재욱. p 120 ~ p 177
조성훈목사
허영, 그 거짓 영광이여 모파상/ 목걸이
모파상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목걸이’에는 한 여인을 불행으로 이끈 허영과, 안개같은 짙은 후회가 나온다. - 친구에게 빌린 가짜 목걸이를 잃어버린 여주인공(마틸드)이 진짜 목걸이인 줄 알고 갚기 위해 10년동안 극도로 고생한 후 가짜 목걸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고 정신이 혼미해 지는 내용.
우리 주위에도 마틸드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허영심에 취한 사람들! 여자는 허세를 부리는 남자를 경계하고, 남자는 허영심에 빠진 여자를 경계하라!
사도 바울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자기의 본 모습을 넘어서 자기를 크게 포장해 과시하고 싶은 욕구, 이것이 허영이다. 교만은 허영을 낳고 허영은 또 교만을 유도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허영과 외식을 혹독하게 꾸짖으신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십자가를 마음 깊이 새기시라!
3 괜찮아! 내가 함께 한다.
괜찮아, 주님이 계시니까.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겪어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고, 계속 전이되는 암과 투병했던 장영희 교수는, 기적이 아닌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장영희 교수의 자전적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평생 병환을 안고 살았던 장영히 교수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 “괜찮아”였다고 회상한다.
누구나 넘어 질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알아, 나도 알아! 나에게 오면 괜찮아!”
인생의 경기장 앞에 서 있는 우리. 우리가 잘 달리면 “자알~ 했어!” 우리가 넘어지면 “괜찮아, 괜찮아.” 들을수록 감동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목소리!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나도 꿈이 있다구! 고골/외투
러시아 관청의 말단 서기인 주인공(아키키 예비치)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사람, 고생고생하여 새 외투를 샀지만 이틀 만에 불량배들에게 빼앗겨 신고하지만 아무도 관심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시름시름 잃다가 죽고 도시의 유령이 되어, 사람들의 외투를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빼앗아 간다. 도시는 발칵 뒤집히며 존재감 없던 사람이 최고로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서서히 있으나 마나한 투명 인간이 되어 간다. 여기저기 광장(페이스북, 카카오 스토리 등)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한다. 그렇게 한다고 존재감이 드러날까? 아니,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늘같은 존재감을 갖기 원하신다. “너는 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해서 얻어진 존재야!”
사도 바울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은 그의 존재를 불러 주신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삭개오의 집에 가시고 가슴 벅찬 축복까지 해 주신다. “그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주님을 만나면 생명의 존재감으로 넘치게 된다. 겨우 ‘외투’한 벌이 꿈이 아니라 세상을 품은 비전의 사람이 된다.
이웃이 들어오는 비밀의 문, 부족함 영화/슈렉
슈렉은 못생기고 몸집이 큰 녹색 괴물 같다. 도저히 주인공을 꿈꿀 수 없는 존재. 나중에 마법에 걸린 공주 피오나를 구해 주게 되는데, 피오나는 절세의 미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못 생기고 뚱뚱한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난다. 피오나가 말한다. “이해가 안 되네요, 아름다워져야 하는데” 슈렉이 대답한다. “당신이 이미 아름다워요” 결국 슈렉과 피오나는 결혼한다.
영화 ‘슈렉’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통쾌한 희망을 준다.
한 음료회사의 ‘2% 부족할 때’라는 음료수를 출시했다. 주스라고 하기에는 2퍼센트 부족하고, 물이라고 하기에는 2퍼센트 부족한 맛, 그런데 그 부족함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다. 부족함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사람들과 소통하게 만드는 신비가 있다. 완벽한 성자는 친구가 없다.
넘치는 것보다 조금 모자란 것이 좋다, 모자라야 서로의 필요성을 알고 겸손하며, 서로를 이해한다. 햇빛만 쏟아지면 사막이 된다.
사도 바울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 9
그까짓 것 뺨 한 대 맞으면 돼! 정주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경영인 최고 어록 1위 –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이봐, 해보기나 했어?” 정회장은 불가능해 보이는 소양감 댐 완공 후 이런 말을 했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나가면 된다,”
거룩한 배짱을 가지라! 가난한 정탐꾼 부정의 견해 10명 정탐꾼과 여호수아 갈렙 두 정탐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에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 14:8,9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의 거룩한 배짱의 근거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믿음이 없던 정주영 회장도 배짱 있는 말을 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왜 그리 작게 사는지 모르겠다.
차선에게도 박수를 김훈/ 흑산
소설 흑산은 하나님은 믿는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정약용의 가문과 민초들의 굴욕, 그 소용돌이 속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를 떠난다. 소설 ‘흑산’의 주인공은 정약전이다. 이 소설은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순교자가 아닌 산 자, ‘저기’ 최선의 순교의 자리가 아닌, ‘여기’ 살아 있는 자의 ‘차선의 이야기’가 흑산이다.
자신이 꾸고 있던 꿈이 깨졌다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이제부터는 ‘차선’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여! 지금부터가 최상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스펙을 이기는 스토리가 있다. 김정태/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남들과 똑같은 스펙보다는 차별성이 있는 나만의 ‘스토리’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
나의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
성경에서 말하는 스토리가 있는 삶이란? 하나님과 깊이 동행한 경험
사도바울의 자기 몸의 ‘예수의 흔적’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삶, 하나님과 동행했던 열정의 이야기가 있는 삶, 이런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승리하려면 맷집을 길러라 기시미 이치로, 후미타게/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책,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에 의하면 인간의 고민은 거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임진희 발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데이비드 히넌, 워렌 베니스 ⎜ 위대한 이인자들
① 숲을 이루는 것은 나무들만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 곳이다.
② 세상이 삭막한 정글로 변한 이유는 서로 주인공만 되려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줄 때 세상은 아름다워진다.
③ “나를 딛고 일어서세요! 나를 배경으로 피어나세요!”
하늘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만남, 모든 기적의 시작⌟ 정현종 ⎜ 방문객
① 만남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얻는 최고의 축복이다.
②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방법은 대부분 만남을 통해서이다.
③ 만남은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기적의 시작이다.
④ 시인 정채봉은 그의 시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존그레이 ⎜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① 결혼 전 키스는 낭만이요, 결혼 후 키스는 노동이라는 말이 있다.
② 남자는 신뢰를 요구하고, 여자는 관심을 요구한다.
③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다름은 비교의 대상과 같지 않다는 뜻이고,
틀림은 정당한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④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스의 선언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깊이없는 높이는 허영이다⌟ 고골 ⎜ 코
① 침묵이란 무엇인가?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진실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진실없는 큰 소리는 소음이 분명하다.
② 위로, 밖으로 향하고 싶은 꿈이 강할수록, 안으로 깊어져야 한다. 낮춤이 높임이다. 깊이 의 내공이 옆으로 뻗을 수 있는 넓이를 결정하고,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 다.
③ 삶의 길이는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다.
그러나 삶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가 얼마나 성화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백이 있는 사람이 좋다⌟ 도종환 ⎜ 여백
① 열정에 불타는 사람, 의욕이 강한 사람이 역사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다 태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승리의 깃발을 꽂기 위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간다. 그런데 마침내 고지에 올라보니 전우들이 다 죽어있다
② 우리의 신앙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신앙의 여백은 내가 다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가리킨다
⌜일상은 신비요 기적이다⌟ 구상 ⎜ 꽃자리
①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이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된다. 인생은 큰 사건 몇 가지와 수없이 많은 일상으로 이루어진다. 큰 사건도 중요하지만 일상은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 삶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합이요, 그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몸을 구부려야 보이는 세계가 있다⌟ 헤르만헷세⎜ 동방순례
① 자신만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욕망이라고 하고, 이웃도 같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한다. 욕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고, 사랑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나의 섬김이 필요하다
② 불이 붙지 않은 초가 백년을 산다 해도 그건 산 것이 아니다.
초는 제 머리 위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혀주면서부터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③ 남을 이기면 일등이 되고, 남을 섬기면 일류가 된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나는 얻는다”⌟ 애덤 그랜트⎜ 기브 앤 테이크
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의 숫자는 내가 도와준 사람의 숫자와 같다.
② 관계란 주고 받음을 지속하는 것이다
③ 애덤 그랜트는 타인과 상호작용이라는 면을 중심으로 사람을 기버, 테이커, 매처(Macher)라는 세 부류로 구분한다. 기버는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다. 반면 테이커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매처는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④ 주는 사람이 되어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으면. 마법같이 끌어당기는 힘이 생겨서 그 혜택이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