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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강과 함께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오마이갓
[ 간질환 명의 박동한 옹. ] | | | 향토 명의 |
간질환 명의 박동한 옹. |
간질환 명의 박동한 옹
제목: 가전비방으로 간질환 환자 고치는 '황달박사'
요점: 치료비법은 '황달침'과 검은색 알약
치료 후 독소가 소변으로 쏟아져
국내외적으로 수천 명의 환자 살려 면허없다고 숱한 고생을 치루기도
박동한(朴東漢 66세) 옹은 '황달박사'로 통한다. 박 옹이 사는 군내(郡內)와 인근 면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박 옹의 집은 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간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해왔고, 오랜 세월동안 그 고장 사람들은 간염·간경화·간암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이 박 옹의 집을 찾아와 나아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인근만 해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알음알음으로 서울·부산·대구·광주·전라도·강원도·경상도·일본·홍콩·미국 등 외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간질환만큼은 박 옹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비방이 최고라고 말하고, 너나 할 것 없이 간질환에 걸렸다면 으레 박 옹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박 옹의 이야기를 들은 건 1993년 무렵이다.
당시 산간마을에 사는 한 향토명의를 취재하러 가기 위해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택시기사가 박 옹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 택시기사의 말은 자신의 동생이 B형 간염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박 옹의 치료를 몇 차례 받고 나았다는 것이다. 치료방법은 침을 맞은 후 검은 색 알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이 알아줄 만큼 효과가 분명하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그후 수 차례에 걸쳐 박 옹을 취재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취재를 사양하였다. 이유인 즉 의료면허가 없는 사람으로서 남에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1995년 무렵에 어떤 이의 무고한 협박으로 울화병이 생겨 심하게 고생하면서부터는 환자치료는 물론 일체의 외부 접촉을 피하였다. 나라 안에 수많은 사람이 간질환으로 고생하고, 또 많은 사람이 간질환으로 사망하는 처지에서 가치있는 의술이 면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장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러다 박 옹에게 취재를 허락받은 건 박 옹을 알게 된 지 근 10년이 지난 2002년 1월초였다. 비록 치료하는 것에는 손을 놓고 있지만, 물려받은 소중한 의술만큼은 기록으로나마 남겨 후세에 전하겠다는 소박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옹의 이런 뜻은 국가의 의료발전과 국민의 건강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박 옹은 모든 간질환을 황달이라고 표현하였다. 간염·간경화·간암은 서양의학에서 현상만 보고 분류한 것일뿐, 따지고 보면 한 통속이라고 한다. 즉 간에 나쁜 기운이 몰리면 간에 염증이 생기고, 간염이 심해지면 간이 경화되고, 간경화가 심해지면 간이 부패되어 암의 증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간질환은 선조들이 물려준 황달 치료법으로 치료하면 쉽게 나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간질환이 생기는 원인은 술·담배가 과한 경우, 화학약을 과용한 경우, 농약에 심하게 오염된 식품을 섭취하는 경우, 화학물질이나 독성물질에 접촉이 잦은 경우, 신경을 많이 쓰는 경우, 오랫동안 화나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경우, 심하게 놀란 경우 등이라고 한다. 이런 황달의 원인을 살펴 평소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한편 일단 황달이 시작되면 담즙이 간에 퍼져 간이 부어 오르면서 온몸과 얼굴과 눈과 오줌이 누렇게 된다고 한다. 또한 신장부를 압박하여 소변이 잦다고 한다. 그러나 이뇨력이 약화되어 소변량은 적다.
그리고 병이 진행 될수록 복부에 물이 차 대장에서 썩으면서 복막염이 생기기도 하고, 나중에는 옆구리까지 물이 차 올라 늑막염이 생기기도 한다. 또한 병이 깊어질대로 깊어지면 온몸에 물이 차 다리를 누르면 각기병 걸린 사람처럼 푹푹 들어가고, 피부에 노란 물집이 여드름처럼 흉하게 잡히고, 횡격막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면 간이 심하게 부어한 웅큼 잡힐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여기저기 양방병원을 다 돌아 다니다가 병세가 깊어진 후,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치료하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빌면 오랫동안 황달환자를 치료하다 보니 복수가 차 배가 남산만 하게 부어 오른 사람, 온몸이 퉁퉁 부어 걸음조차 못하여 업히거나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 간이 너무 부은 나머지 뉘어 놓으면 옆구리가 흘러내려 방바닥에 닿는 사람, 온몸에 노란 물집이 생겨 차마 눈 뜨고 보기 흉한 사람, 온몸에 마비와 통증이 심한 사람, 노란 물감을 들인 듯 온몸이 누렇게 뜬 채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쇠약한 사람 등 상상도 못할 정도의 환자가 수없이 온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중증의 환자라도 진단을 해보아 치료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자신있게 살려내지만, 인체의 기능이 이미 상실된 사람은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어 솔직히 말하고 돌려보낸다고 한다.
특히 간을 절제수술한 사람이나, 복수를 빼낸다고 옆구리를 뚫은 사람이나, 담도관을 자르고 대신 인공관을 단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체에 칼을 대 개복하는 순간 체내에 공기가 들어가 신경과 기혈순환체계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양의학의 수술은 인체의 생명원리에 대해서는 모른 채 병의 현상에만 집착한 임시방편의 치료법일 뿐, 결코 사람을 고치는 의술은 아니라고 말한다. 수 대에 걸쳐 내려온 박 옹 집안의 간질환 치료비방을 보면 침술부터가 약간 독특하였다. 먼저 신주(身柱)혈과 팔추하(八推下)혈에 3센티미터 깊이로 침을 찌른다.
그리고 신주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각각 3센티미터 간격씩 떼어 갈비뼈 사이에 침을 한 후, 일직선으로 내려가며 그 밑의 갈비뼈 사이와 또 그 밑의 갈비뼈 사이에 좌우로 침을 한다. 팔추하혈 위치에는 우측에만 3센티미터 간격을 떼어 갈비뼈 사이에 침을 한 후, 역시 일직선 으로 내려가며 그 밑의 갈비뼈 사이와 또 그 밑의 갈비뼈 사이에 침을 한다. 그리고 나서 양쪽 다섯 손가락 끝에 침을 하고, 양쪽 발 양릉천(陽陵泉)혈과 양릉천에서 정강이뼈 쪽으로 1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부분에 각각 침을 한다.
마지막으로 얼굴에는 인중(人中)혈에 침을 하고, 윗입술을 들어 인중혈과 닿은 안쪽 부위의 닭벼슬처럼 노랗게 자라난 것을 실에 꿰어 잡아 늘린 다음 손톱깎기나 작은 가위를 이용하여 최대한 밑뿌리까지 잘라낸다. 잘라낸 부위에는 마른 조선솔잎만을 태운 무쇠솥 밑부분에 그을린 재를 모아 꿀에 섞어 발라준다. 간질환이 있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십중팔구 크건 작건 노란 게 닭벼슬처럼 길러나와 있다고 한다. 간혹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병이 더디 낫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목구멍까지 노란 게 끼어 있다고 한다.
침이 끝난 후에는 약을 복용하는데, 약은 일곱 가지 약재로 만든다. 약재 중 특이한 점은 마른 조선솔잎만을 태워 오랫동안 무쇠솥 밑부분에 그을린 재를 모아 쓰는 것이다. 재를 모을 때는 무쇠솥 밑부분을 쇳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살살 긁은 다음, 곱게 빻아 고운 체에 거른다. 이것을 다른 약재와 함께 작은 콩알 크기의 환을 만든다. (자세한 약재와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사정상 생략하니 방문자님의 이해를 바란다.) 침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맞고, 약은 아침 저녁 공복에 2알씩 먹는다.
병증이 심한 환자는 3~4알씩 복용한다. 약은 불미나리 뿌리를 생즙내어 복용하는데, 상하기 쉬우므로 그때그때 생즙을 내어 먹어야 한다. 또 불미나리 뿌리에는 거머리나 거머리알이 붙어 있을 수 있으므로 생즙을 내기 전에 천일염과 식초를 약간 푼 물에 담가 놓았다가 깨끗이 씻어 써야 한다. 놋수저를 담가 놓아도 거머리 등이 잘 떨어지기 때문에 예전에는 천일염과 식초 대신에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약을 먹을 때 금기사항은 콩나물·미역국·새우젓·게·커피·인스턴트 음료수·술·담배·찬 음식 등이다. 반면 수박은 이뇨효과가 어느 약보다 우수하고, 개고기는 소염효과가 뛰어나므로 많이 복용하길 권한다고 한다.
침을 맞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 일단 피곤증이 가시고, 소화가 잘 되고, 편히 잠을 자게 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또 소변이 재래식 간장과 같이 갈색으로 나오는데, 받아서 놓아두면 밑에 불순물이 잔뜩 가라앉아 있다고 한다. 박 옹은 이것을 간에 쌓여 썩었던 노폐물이라고 말한다. 대개의 환자는 4~5개월 치료를 받으면 완치가 되고, 아무리 심한 환자라도 1년 정도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나아줄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 중에서 실패한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는 황달환자 치료를 오랫동안 하다 보니 신기(神氣)가 들린 것처럼 진맥을 해보고, 간을 만져보고, 환자의 상태를 보면 어느정도 치료하면 나을지 아니면 며칠 밖에 못살지 영감처럼 떠오른다고 한다. 물론 간혹 인체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여 며칠 밖에 못살 정도의 말기 환자도 "죽어가는 사람 소원이니 한 번 치료라도 해달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치료하여 살려낸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자신의 의술로 한 생명이 다시 삶을 찾았다는 생각에 보람도 크다고 한다. 하지만 살릴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는 손을 대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고칠 가능성도 적으면서 환자를 붙잡고 있는다는 것은 돈에 욕심 낸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옹 집안에서 황달 치료비방이 언제부터 내려왔고, 어떻게 연구되어 탄생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그의 모친으로부터 물려 받았고, 그의 모친은 시집와서 시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만 할 뿐 어떤 이유로 치료효과가 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침을 하면 간과 담에 막힌 기혈이 터지고, 약을 복용하면 기력이 보강되고 해독작용이 발휘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박 옹이 황달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은 37년 전으로 그의 모친(홍봉순)이 작고하고 난 후이다. 그의 모친은 마을의 대소사를 앞장 서 처리해줄 정도로 성품이 활달하고 야무지었다고 한다. 또 시집와서 시아버지에게 배운의술로 마을에 경기(驚氣) 난 아이나, 체한 사람이나, 삐거나 마비된 사람이나, 두통이나 신경통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황달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하면 밤낮없이 약과 침을 가지고 달려가 고쳐 주었다고 한다.
당시는 시골에서 그런 유형의 환자가 많고, 마땅히 치료받을 곳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모친은 동네의 유용한 의원이었다. 또한 모두가 없이 사는 때라 무료로 봉사해주는 게 인정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사람치도 그의 모친 덕을 여러번 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모친을 마을을 위해 큰 일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박 옹 역시 모친에게 배운 의술로 황달뿐만 아니라 침으로 여러 질병을 고쳐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달만큼은 다른 데에서 쉽게 고치지 못하는 반면, 그의 집에서는 신효하게 고쳐내니 자연히 선대에서부터 그의 집은 '간 전문'으로 통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집에 찾아오는 환자는 황달을 고친 사람의 소개로 오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소문이 퍼져 인근은 물론 전국 각지와 해외서까지 찾아온다고 한다. 지금 그는 1995년에 어떤 이의 무고한 협박으로 울화병이 생겨 치료하는 걸 멀리하고 있지만, 환자를 받을 때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가 밀려 쉴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치료효과가 없었다면 그 오랜 세월동안 환자가 오라고 해도 벌써 끊어졌을 거라고 한다.
박 옹의 말을 듣다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간질환 환자들이 그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는 마을사람들의 말이 생각나 그간 고쳐준 환자수를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해 그는 아마 수 천 명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인근에 있는 4개 면만 해도 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수 백 명 고쳐주었을 거라고 한다. 어느 경우는 일가족 전체를 고쳐 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간질환을 고치며 젊은 사람들이 재발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가끔 찾아올 면 자신이 헛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고 한다. 또 매년 명절 때마다 고맙다고 안부 전화하는 사람, 멀리서 일부러 찾아와 고구마나 농사지은 것을 놓고 가는 사람, 생일을 기억하고 떡을 해 가지고 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럴 때면 비록 시골에서 이름없이 살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든다고 한다.
그간 고쳐준 많은 환자 중에서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냐고 묻자, 박 옹은 먼저 홍콩에서 온 30대 중국남자를 꼽았다. 그 중국인은 통역관을 데리고 찾아왔는데, 간경화가 너무 심해 식도까지 부어 입으로 피를 쏟고 있었다. 침을 놓은 다음 20일 간 약을 주어 보냈는데, 한 달 후 멀쩡히 나아서 찾아 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병원을 다녔는데, 박 옹의 의술이 동양에서 최고라며 극진한 예의를 갖추고 갔다고 한다. 또 간염이 심해 조기 제대한 군부대 사병을 여럿 고쳐주었는데, 나중에는 그들의 소개로 여러 부대에서 사병과장교들이 연이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10여 년이 지난 작년에 막내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그 부대의 대대장이 주소지를 보더니 "그 마을의 박동한 씨를 아느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이다"고 하자, "그분이 바로 10여 년 전 나와 아들의 병을 고쳐준 은인인데 이렇게 인연이 될 줄 몰랐다"며 반가워 했다고 한다.
또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의 시집간 여동생이 황달이 심하다 하여 가보니 온몸이 노란 물 뿌려 놓은 것과 같으면서 여기저기 여드름처럼 물집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진단을 해보니 3개월 정도 치료하면 나을 것 같아 치료 해주고 매일 가서 점검했는데, 차츰 물집이 없어지면서 예상대로 3개월만에 완치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또 적십자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간경화 말기로 양방병원에서 살 가망성 없다는 말을 듣고 퇴원하였다. 배는 남산만하게 부어 오르고, 소변을 받아보면 쑥물과 같았다. 모두가 못산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멀쩡히 나아 지금도 가끔 생명의 은인이라며 인사차 찾아온다고 한다.
전북 익산에 사는 사람의 부인도 간경화 말기로 양방병원 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퇴원하였다. 배는 복수가 차 임신 9개월쯤 된 사람처럼 나오고, 다리는 퉁퉁 부어 걷지도 못하였다. 처음에 실려서 올 때는 모두 금방 죽는다고 말했지만, 멀쩡히 살아 지금 형제처럼 지낸다고 한다. 또 대전 모 백화점의 한 중역은 3개월만에 간염을 고쳐주었는데, 양주를 과음한 나머지 재발되어서 다시 찾아 왔다고 한다. 결국 2번 고쳐준 셈인데, 지금은 건강하게 살며 가끔 안부 전화를 해온다고 한다.
이밖에 처음엔 자신의 신분을 숨기다가 다 낫고 갈 때 자신도 의사라며 밝히는 사람도 여럿 된다고 한다. 그중에는 서울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게 해줄 터이니 같이 가자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큰 사업을 하는 교포 역시 복수가 차고 혈변을 하는 걸 고쳐주자 나중에 갈 때는 사무실을 내주겠으니 한 번 대대적으로 치료해 보라고 제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서울에서 온 고등학교 선생은 항암제를 너무 많이 맞아 머리가 없다시피 하고 복수도 많이 차 있었는데, 그걸 고쳐주자 고맙다며 여기저기서 간질환에 걸린 선생을 많이 소개하여 데려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에 사는 청년은 간경화로 죽는다는 걸 고쳐주자 나중에 나이 들어 장가갈 때 신부와 인사하러 오기도 했고, 어떤 처녀는 치료를 받고 나아서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고 찾아 오기도 했다고 말한다. 박 옹의 사연을 들으며 간질환에 특효인 전통의술이 향리에 숨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에 무엇보다 기쁜 마음이었다. 필자는 10여년 전에도 서울 한강변에 간질환만큼은 분명하게 고치는 노인이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노인이 작고한 뒤라 의술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박 옹의 방법과 같은 전통의술문화가 풀뿌리처럼 살아 있다는 것은 민족의 의술발전을 위해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재 간질환은 서양의학에서 뚜렷한 완치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무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생활상의 주의점을 알려주고 약을 계속 복용케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면 간을 절제수술한 후 화학약을 투여하는 치료만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간질환에 걸리면 병을 낫기 위해 녹즙 등으로 자가치료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비해 박 옹의 의술은 분명한 임상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있게 재조명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박 옹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고도 의료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시비를 하여 마음 고생이 심하였다고 한다. 어느 때는 관에서 나와 조사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 협박하기도한다.
그럴 때마다 박 옹은 자신이 죄인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남을 구해주는 일을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어 몇 번이고 고쳐달라고 찾아와 매달리는 사람을 뿌리쳤다고 한다. 특히 1995년에 무고한 협박을 당해 고생한 후로는 일체 손을 놓고 있다고 한다. 박 옹에게 1995년의 일에 대해 물어 보았다. 사연인 즉 당시 간암 말기의 환자가 거의 인사불성인 상태로 찾아 왔다고 한다. 그는 이미 양방병원에서 살 가능성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가던 중이었다. 진단을 해보니 간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하여 며칠 살기 힘든 상태였다. 그래서 치료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기왕 죽을 사람 내일 죽어도 좋으니 원이라도 없게 한 번 치료라도 해달라고 울면서 통사정을 하였다. 그래서 사후에라도 원망을 듣지 말자는 생각으로 치료를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환자가 사망했는데, 엉뚱하게도 환자의 누나가 무면허자가 사람을 죽였다고 고발을 해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심한 충격으로 울화병과 마비가 와 근 5년을 몸져누워 지냈다고 한다.
또 그 일로 자식들은 남에게 좋은 일하고 고맙다는 말은못들을 망정 왜 욕을 당해야 하느냐며 앞으로는 절대 아픈 사람이 찾아와 사정해도 봐주지 말라고 약이고 침이고 모두 갖다 버렸다고 한다. 박 옹은 현재 양방병원에서는 항암제투여다 또는 방사선치료다 하여 환자의 머리를 빠지게 하고, 구토에 시달리게 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지경을 만들고, 인사불성에 빠뜨리는 등 많은 치료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어느 누구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저질렀으면 부작용 났다고 벌써 구속되고 난리났을 거라고 한다. 그는 가족들의 만류로 이제 더 이상 환자를 치료하지 않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지만 마음대로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일전에도 전북 김제에서 간염환자가 왔는데, 치료하면 뻔히 나을 걸 알면서도 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때 환자나 자신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때 나아줄 수 있는 방법을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뻔히 나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처지에서 자신을 믿고 찾아온 환자를 그냥 보내는 것도 죄짓는 것이라는 생각에 며칠이고 괴로웠다고 한다. 이렇게 말을 이어가던 박 옹은 면허가 있고 없고를 떠나 자신을 믿고 집에 찾아온 환자라면 일단 구해 놓고 보는 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자신은 죄책감에 더 이상 찾아오는 환자를 되돌려 보낼 자신이 없으니, 이제 관에서 면허없이 환자를 치료했다고 문제를 삼으려면 차라리 문 앞에 지키고 서서 오는 환자를 막아달라고 하소연한다.
박 옹은 자신은 나이가 든 처지에서 욕심이 없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집에 그래도 희망을 안고 찾아온 환자를 마음 편히 고쳐줄 수만 있으면 더 이상 원이 없다며 말을 맺었다. 박 옹의 사연을 들으며 의료법이란 무엇인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료법은 과연 국민을 위한 법인가. 국민의 바람은 면허를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치료받기를 원하고 있지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의료법이란 틀을 묶어 면허를 가진 자만의 의술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국민의 의료 선택권은 박탈당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료법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 보다는 면허를 가진 자의 독점적 지위와 이익을 보호하는 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의료방법을 일정한 틀 속에 묶어 두려는 한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자생적으로 탄생된 전통의술문화와 의료자산은 사장되고, 의료발전 또한 요원할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박 옹의 집을 나오는 길에 동네 어귀에 버티고 선 수령 5백 년은 넘은 직한 느티나무가 오늘도 낯선 길손의 밤길을 지켜주고 있었다.
출처 :명리순행과한방(오행연구협회)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