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건의 비주얼경제사 ·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 16 - 30 回 |
| ▲ 그림 3 헨리 앨켄, 『증기의 진보』, 1828년. 많은 차들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장면. |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30. 혁신의 유인 (誘因) |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 필요의 척도는 상대가격 |
알렉산드리아의 헤론(Heron)은 고대 유럽의 수학과 공학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1세기에 활약한 학자로, 물과 공기와 기계장치를 결합해 많은 기발한 발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고안한 신전 자동문의 원리를 보여주는 설계도가 여기 있다. 자동문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런 자동문은 당시에 널리 제작되어 사용되었을까?
자동문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신전 앞에 도착한 사람이 오른쪽에 보이는 화로에 불을 피운다. 화로는 지하의 기계장치로 연결되어 있다. 화로 아래에는 물이 절반 찬 구체가 설치되어 있다. 화로의 열기가 아래로 전해지면 구체 내의 공기가 팽창하여 물을 파이프를 통해 양동이로 밀어낸다. 그러면 양동이의 무게가 증가해 도르래와 사슬로 연결된 신전의 밑기둥을 돌리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문이 열리게 된다. 이 장치가 작동되는 것을 본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화로에 불을 놓자 잠시 후에 신전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다니! 마치 신전을 감싸는 영묘한 힘이 작용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자동문이 고대 신전들에서 널리 사용되었을까? 그런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동문의 사용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이 장치는 천재적 공학자 헤론의 머릿속에 머무른 아이디어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신묘한 장치는 실용화되지 않았을까? 우선은 시간이 문제였다. 화로에 불을 놓고 한참이 지나 기계장치의 작동이 끝나야 문이 열렸을 것이다. 또 누구든 신전 문을 열 수 있을 테니 보안도 문제였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 앞에 경비를 세우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가 많았던 시기였으니 몸집이 좋고 방문자를 관리할 능력이 뛰어난 자를 뽑아 경비 업무를 맡기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게 아닌가. 자동문은 기술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실용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 ▲ 그림 1 헤론의 자동문 원리, 「공기역학과 자동장치」 1899, 176쪽. 자동으로 신전의 문을 여는 이 기술은 실용화되지 못했다. |
중세의 뛰어난 발명품들
 | ▲ 그림 2 콘라드 카이저, 「전쟁요새」, 15세기 중엽.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렸다. |
유럽 고대에 헤론이 있었다면 중세에는 콘라드 카이저(Konrad Keyser)가 있었다, 독일 지역 출신의 군사 기술자였던 카이저는 『전쟁요새(Bellifortis)』를 통해 자신이 고안한 수많은 발명품을 선보였다. 그들을 이 줄에 걸어 물에 빠지지 않게 하고 말을 탄 사람이 말을 채찍으로 몰면 말들이 물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된다. 일견 창의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이 장치가 널리 사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값이 상당히 비쌌던 말을 이렇게 힘든 방식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바람직했을까? 바지선에 사람과 말을 태우고 반대편에서 끄는 방식이 더 안전하고 손쉬웠을 것이다. 이런 발명품들은 고대와 중세에도 인류의 지식과 기술이 만만치 않았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여건’ 만 허락했다면 창의적인 두뇌가 생각해 낸 기발한 발명품들이 현실에서 일찍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여건’ 의 중심에 생산요소의 상대가격이 있다. 노예 노동이 값싸고 풍부했던 고대에 사람들은 자동문이 필요 없었고, 중세에 값비싼 말이 힘을 써야만 강을 건너게 하는 장치는 경제성이 없었다. 희소해서 값이 비싼 생산요소를 대체하는 발명이어야만 현실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발명의 이런 속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서였다. 과거에 발명이 소수의 호기심 많고 재기 넘치는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산업혁명 시대에는 발명이 만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발명은 더 이상 지적 유희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보물 상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서 왜 영국이 기술진보 경쟁에서 다른 국가들을 제치고 선두에 섰는지 의문을 던져보자. 이에 대해 그간 학자들은 다양한 설명을 제시해 왔다. 노동공급이 원활했다, 자본시장이 발달했다, 천연자원이 풍부했다, 도전적 기업가정신이 가득했다, 재산권보호가 잘 되었다, 지리적 조건이 유리했다 등등. 그러나 이런 설명 각각에 대한 반론도 많이 제기되었다. 영국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영국사회가 다른 국가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차별화 요인들을 추출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많았다. 이런 비판을 수용해서 최근에는 생산요소의 상대가격의 역할을 강조하는 설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영국에서는 1인당 임금수준이 높은 반면에 새 에너지원인 석탄의 매장이 풍부했다. 즉 노동의 상대가격이 높았던 반면에 석탄의 상대가격이 낮았다. 따라서 노동을 절약하고 대신에 석탄을 많이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할 유인(誘因)이 컸다. 그 해결책이 바로 증기기관의 개발이었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응축기 발명으로 정점을 찍은 증기기관의 개발은 다시 면공업, 제철공업, 석탄공업, 철도업을 발달시키는 도미노 효과를 낳았다. 한편 상대가격의 조건이 영국과 달랐던 국가들은 이와 다른 상황을 맞았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수력이 풍부한 프랑스나 노동력이 풍부한 인도에서는 경제성이 없었다. 노동절약형 기술진보는 영국의 혁신가들에게만 각별히 구미가 당기는 메뉴였다.
증기기관의 발달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장과 광산은 물론 교통수단도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그림 3은 런던의 화이트채플 로드(Whitechapel Road)가 어떤 풍경으로 변하게 될지 헨리 앨켄(Henry Alken)이 상상해서 그린 작품이다. 제목은 『증기의 진보(The Progress of Steam)』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차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내뿜는 시커먼 연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차량마다 수많은 사람들과 각종 음식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다.
증기로 작동하는 자동차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사실 영국인이 아니라 프랑스 기술자인 니콜라-조셉 퀴뇨(Nicolas-Joseph Cugnot)였다. 그가 1769년에 제작한 증기자동차는 파리 시내를 시속 4km의 속도로 달렸다. 바퀴 셋이 달린 동체에 커다란 보일러를 올려놓은 형태였다. 이 증기자동차가 곧 영국에 소개되었고 뒤이어 솜씨 좋은 기술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개조되었다. 1826년에는 28인승 차량이 정기적으로 운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림 3의 화가는 머지않아 도시들이 수많은 증기자동차에 의해 점령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지극히 개연성이 높은 예측이라고 볼만 했다.
진화하는 자동차 발명
그렇지만 이후의 기술진보 방향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화가의 예측과는 달랐다. 1886년 독일의 고틀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와 카를 벤츠(Karl Benz)가 내연기관을 발명함으로써 자동차의 역사에 새 경로가 그려졌다. 이들의 내연기관은 새 연료로 등장해 고효율을 보인 석유를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차체는 훨씬 가벼워졌고 속도는 크게 높아졌다. 미국의 혁신적 기업가 헨리 포드 (Henry Ford)는 1913년 어셈블리 라인을 이용한 자동차 양산체제를 갖춤으로써 자동차 대중소비의 길을 열었다. 어셈블리 라인은 자본에 비해 노동이 희소한 미국의 경제상황에 부합하는 기술 선택이었다. 자동차는 오늘날에도 ‘여건’ 을 반영해 전기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수소연료차 등의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헤론의 신전 자동문, 카이저의 도강(渡江) 구조물, 산업혁명 시대에 개발되어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온 자동차 모두가 발명을 위한 인간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모든 발명이 상용화되어 발명가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생산요소의 상대가격 상황에 딱 들어맞는 발명만이 사회적 필요에 부응했다. 분명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이 필요는 상대가격이라는 모습을 띠고 인류와 함께 해 왔다.
- 중앙선데이 | 제442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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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9. 케인스 경제학의 전성시대 |
| ▲ 그림 1 기계를 시연하고 있는 필립스, 1958-1967년. 물 · 커피 · 설탕의 양을 지정하듯 정부가 경제 변수를 적절히 조정하면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양복 차림의 남성이 어떤 기계장치를 시연해 보이고 있다. 기계장치에는 색깔이 다른 물이 든 수조가 몇 개 있고, 여러 개의 파이프가 이들을 연결하고 있다. 마치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음료를 제조해내는 자동판매기의 내부처럼 보인다. 이 기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기계를 시연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
케인스의 ‘자판기’ 경제학, 세계경제 황금기 이끌다 |
그림 1은 상업적 목적의 기계장치를 설명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 사진은 영국의 런던정경대(LSE)에서 경제학 강연이 진행되는 광경이다. 사진 속의 인물은 빌 필립스(A. W. “Bill” Phillips)라는 경제학자다. 실업률과 명목임금 변화율의 단기적 역관계를 보여주는 이른바 ‘필립스 곡선’으로 경제학 교재에 등장하는 학자다. 그가 시연하는 기계장치는 ‘필립스 기계 (Phillips Machine)’라고 불리는 것으로,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경제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케인스와 필립스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해 살펴보자. 20세기 전반에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례 없는 대공황으로 인해 거칠고 힘든 시절을 경험했다. 전쟁 · 학살 · 빈곤 · 실업 · 억압 · 불안 · 공포 등 어둡고 부정적인 개념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사람들은 자유롭고 편안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를 갈망했다.
1950~73년 세계경제 유례없는 성장
| ▲ 그림 2 노먼 록웰,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 1943년 3월 6일.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친지가 모여 식사를 하기 전의 화목한 모습을 그렸다 |
이런 분위기를 잘 표현한 화가로 미국의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시사 잡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에 수많은 표지그림을 실었는데,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네 자유(Four Freedoms)’ 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록웰은 전후 사회가 가장 시급히 이뤄야 할 덕목으로 ‘신앙의 자유’, ‘표현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1941년 연두교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림 2는 그중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친지가 모여 식사를 시작하려 한다. 인자한 표정의 주인 내외가 방금 조리된 큼직한 칠면조 구이를 내놓는다. 식탁에 다른 음식과 음료는 변변치 않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당시 부유한 국가로 손꼽히던 미국에서조차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원했느냐를 느끼게 해준다.
전쟁 직후의 이런 상황과 대조적으로, 이 시점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세계경제는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1950~1973년에 1인당 실질소득이 매년 미국에서 2.45%, 서유럽에서 4.08%, 동아시아에서 3.83% 올랐고, 일본은 무려 8.05%를 기록했다. 어느 지역이건 이 성장률은 19세기 이래 현재까지 다시 도달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빠른 경제성장은 일자리의 증가를 낳았다.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본격화됐다. 가전제품과 피임제의 등장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래도 부족한 노동력은 해외로부터의 유입으로 보충했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유리했으므로, 주로 과거에 식민지였던 지역으로부터 인력을 받아들였다. 이런 면에서 한국 광부와 간호 인력이 서독으로 향한 것은 세계적으로 예외적인 사례였다.
세계경제의 황금기는 케인스 경제학의 전성기였다. 과거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에 큰 신뢰를 보냈던 것과 달리 케인스는 정부가 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각국은 전쟁을 치르면서 통제경제 체제를 실시했고, 미국은 대공황 시기에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편 경험이 있었다, 이런 경험은 평화 시에도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체제를 채택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케인스는 각국 정부가 적절하게 총수요관리정책을 펴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사이에서 정부가 유효한 선택만 한다면 경제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그의 경제이론에 대해 전 세계의 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적극적 수용으로 답했다. 대다수의 국가가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사람이 정부의 경제관리 능력에 대해 신뢰를 보이자, 경제주체들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보면서 낙관적으로 소비와 투자 판단을 했다. 이런 대중의 신뢰는 다시 경제 번영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출발부터 탄탄한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케인스가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제시했던 주장이 정교한 이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는 뛰어난 후학들의 기여가 컸다. 필립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필립스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기계와 전기장치를 다루는데 수완을 보이며 자란 청년이었다.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전기공학을 공부하다가 2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종전 후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는 전공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케인스 경제학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이를 경제학 지식을 자신의 기계제작능력과 결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주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기계가 바로 필립스 기계다.
케인스 이론을 빛나게 한 후학들
그는 각 경제부문을 의미하는 수조들을 설치하고 이들을 파이프로 연결하여 국민경제의 순환모형을 비주얼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물을 펌프로 끌어올리고 기계를 작동시키면, 소득에 해당하는 물이 저축, 조세 등을 의미하는 여러 개의 밸브를 통해 여러 경제부문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흘러들어온 물은 다시 다른 경제부문으로 이동하게 된다. 결국 물의 이동이 모두 끝나면 각 경제부문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를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 전문용어를 쓰자면 ‘개방경제 하의 IS-LM 모형’이었다. 필립스 기계는 정교한 자판기에 비유할 만했다. 고객이 물, 커피, 우유와 설탕의 양을 지정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적절하게 배합된 커피음료가 만들어져 나오듯이, 정부가 경제변수들을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원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 ▲ 그림 3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케인스, 1965년 12월 31일. |
필립스가 대학 졸업반 때인 1949년에 시연한 이 기계는 경제학도들은 물론 교수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케인스 경제학의 핵심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기계장치가 정부의 경제정책의 효과를 상당히 정밀하게 예측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곧 필립스 기계는 뜨거운 화제가 되었고 필립스는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다. 이후 대학은 동일한 기계장치를 14개 더 제작해 교육 목적으로 영국의 다른 대학들은 물론 해외로도 보냈다. 필립스 기계의 명성도 더욱 높아졌다. 1946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대형컴퓨터 에니악(ENIAC)의 이름을 따서 ‘머니악(MONIAC)’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화폐경제를 관리하는 데 유용한 아날로그 컴퓨터처럼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그림 3은 1965년 시사 잡지 『타임(Time)』의 표지를 장식한 케인스를 보여준다. 이때까지 케인스 경제학은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에서 차분하면서도 자신만만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결정적으로 쇠퇴를 맞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이 발생하자 케인스 경제학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케인스 경제학은 이로써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기능을 강조하는 시카고 학파의 새 이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경제질서의 근간이 된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중앙선데이 | 제439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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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8. 산업 정보의 비밀스런 확산 |
| ▲ 그림 1 조반니 벨리니, 『신들의 향연』, 1514년. 술에 취해 누워있는 여신을 한 사내가 더듬으려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게 청화백자다.
고대 신들이 향연을 벌이고 있다. 오른편으로 술에 취해 누워있는 여신(로티스)이 있고 그녀를 더듬으려는 사내(프리아푸스)가 있다. 이 음흉한 시도는 왼편에 있는 나귀가 소리를 내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가고, 다른 이들이 상황을 알아채자 사내는 당황하게 된다. 이것이 로마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 그림에서 시대와 가장 동떨어진 사물은 무엇일까? |
지적재산을 훔치는 아슬아슬한 통로, 산업스파이 |
그림 1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작품이다. 나중에 도소 도시(Dosso Dossi)와 티치아노(Tiziano)가 배경을 중심으로 수정을 했다. 이 그림에는 위에 설명한 등장인물 외에 낯익은 신들도 등장한다. 프리아푸스 옆에 앉아 술잔을 들이키는 태양의 신 아폴론, 헬멧을 쓴 전쟁의 신 머큐리, 그 옆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최고신 주피터가 있다. 왼편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어린 아이는 술의 신 바쿠스다. 신들에게 음식과 술을 접대하는 이들은 반인반수의 사티르와 님프들이다. 질문은 그림이 제작된 16세기의 인기 물품을 찾는 것이다. 답은 바로 그릇이다. 중국에서 제작돼 세계적 명품으로 인기를 끈 청화백자다. 화가에게 그림을 요청한 이가 알폰소 1세 데스테(Afonso I d’Este)라는 인물인데, 중국산 자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 그림은 중국산 자기를 그린 최초의 유럽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중국 자기는 심심치 않게 정물화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화려한 사물들을 그려 역설적으로 인생무상을 설파하는 바니타스 정물에 중국 자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중국 자기가 그만큼 유럽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중국 자기에 대한 유럽인들의 수요는 엄청났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선에 의해 처음 소개된 중국 자기는 곧 이웃 국가들에도 알려지게 됐다.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을 통해 중국 자기가 속속 수입되었고, 왕족과 부유층은 자신의 저택을 이 명품으로 꾸임으로써 부와 취향을 과시하고자 했다. 청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1722)는 자기 산업을 중국의 대표 수출산업으로 부흥시켰다. 요업 중심지 징더전(景德鎭)은 수출용 자기를 생산해 해외로 공급하는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1721년 한 해에 영국 선박 네 척이 운송한 자기만 해도 80만 점에 이르렀다.
왜 유럽 국가들은 이런 자기를 생산하지 않은 것일까? 생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 색이 깨끗하고 맑은소리를 내는 경질자기(硬質磁器)를 생산할 기술을 유럽은 보유하지 못했다. 유럽으로부터 막대한 돈이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택한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기술을 중국으로부터 빼내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였던 프랑수아 자비에 당트르콜(Francois Xavier d’Entrecolles)은 징더전이 위치한 장시성(江西省)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마터를 방문하고, 중국 서적을 뒤지고, 예수회로 개종한 중국인들에게 캐물어 경질자기 제조비법을 알아냈다. 고령토, 장석, 석영이 섞인 재료를 써서 고온에 가열하는 것이 핵심 열쇠였다. 1712년 그는 이 비법을 편지에 적어 프랑스의 예수회로 보냄으로써 수 세기 동안 비밀로 남아 있었던 중국식 자기 제조법을 유럽에 전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과 영국도 중국 자기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마이센 자기와 영국의 웨지우드 자기가 탄생할 밑거름이 마련된 것이다.
중국 비단 기술 빼돌린 수도사
| ▲ 그림 2 얀 판 데어 스트라트(조반니 스트라다노), 『누에』, 1590~1605년 무렵. |
정보가 중국으로부터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중국이 기술적 우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양상은 이미 6세기에도 나타난 바 있었다. 로마시대부터 중국은 비단이라는 신비로운 직물의 공급지로 이름이 높았다. 로마제국의 재정에 위협이 된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동로마(비잔틴)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비단을 수입하였는데, 페르시아가 무역을 자주 중단하자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아교(경교) 수도사 두 명이 551년에 중국에 들어갔다.
이듬해 그들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뜻에 따라 누에고치를 몰래 빼내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이 중국의 기술누설 금지정책을 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나무 지팡이 안에 누에고치를 몰래 숨겨 나온 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국내에 들여온 것보다 800년 앞선 이야기다. 그림 2가 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얀 판 데어 스트라트(Jan van der Straet, 일명 조반니 스트라다노)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수도사들이 지팡이에 든 누에고치를 황제에게 바치고 있고, 그 뒤로 누에를 키워 비단을 만드는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두드러진 산업스파이 활동으로는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의 기술을 유출하려는 시도를 들 수 있다. 18세기부터 프랑스는 영국의 기술을 빼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산업 기술과 지식을 가진 제조업자와 상인을 꾀어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금전적 유인을 포함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이에 대응해 영국은 신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기술유출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산업스파이를 막기 위해 영국이 펼친 노력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경제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산업스파이 활동으로 영국의 면공업 기술을 미국으로 가져간 사건을 들 수 있다. 주인공인 영국인 새무얼 슬레이터(Samuel Slater)는 어려서부터 면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발명가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가 만든 수력방적기를 사용하는 공장주로부터 도제교육을 받았다.
21세가 되자 그는 면방적 기술을 완전히 익혔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기술유출 금지법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공업화를 시작하지 못한 미국에서는 신기술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큰 보상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그림 3 슬레이터의 면공장, 1800년대 초. |
산업 스파이 색출 위한 노력도 치열
1789년 슬레이터는 마침내 방적기계 디자인을 꼼꼼히 외우고서 뉴욕 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로드아일랜드에서 투자자를 찾은 그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서 미국 최초의 수력방적공장을 짓는데 성공했다. 그림 3은 이 공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급류가 몰아치는 계곡에 위치한 공장이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미국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상징물이다.
1807년 영국이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대미 금수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이때부터 미국에서 수많은 면공장이 설립되었다. 슬레이터의 면공장이 본보기가 되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1812~1815년의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에는 140개의 면공장이 운영되면서 26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슬레이터는 미국 공업화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그를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영국에서 ‘배반자 슬레이터(Slater the Traitor)’라고 부른 것과 대조적이었다. 미국인에게는 경제대통령으로 추앙받은 그였지만 영국인에게는 산업스파이였을 뿐이다.
산업스파이의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국가들이 공업화의 길에 접어들면서 기술유출의 유인은 더욱 커졌다. 후발국은 선발국이 가진 핵심기술을 빼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기업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가 이런 행위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도와주었다.
20세기 중반 세계 질서가 냉전체제로 재편되자, 국가 차원의 산업스파이 활동은 더욱 중요해졌다. 체제경쟁이 붕괴한 오늘날에도 산업스파이 활동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산업스파이 활동은 제도화된 기술이전의 장벽을 비밀스런 방식으로 뚫는 독특한 종류의 교류다. 이를 통해 지구는 오늘날에도 지극히 은밀한 방식으로 세계화되고 있다.
- 중앙선데이 | 제436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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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7. 18세기 영국에서 이뤄진 개량과 진보 |
| ▲ 그림 1 헨리 토마스 앨켄, 『불 베이팅』, 1820년. 기운 센 수소를 말뚝에 묶어놓고 개가 소의 주둥이를 물어 소를 탈진시켜 쓰러뜨리는 경기를 묘사했다 |
영국 혁신가들이 보여준 독특한 동물자원 활용법 |
그림 1은 영국에서 18~19세기 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불베이팅(bull baiting)’ 이란 오락을 표현한 것이다. 기운 센 수소를 말뚝에 묶어놓고서 그 주둥이를 개가 물도록 하여 소를 탈진시켜 쓰러뜨리는 경기다. 소는 개를 뿔로 치받거나 격렬하게 흔들고 내동댕이치는데, 그러면 다음 개를 데려와 소를 물게 해서 경기가 계속된다. 사람들은 몇 번째 개가 소를 쓰러뜨리느냐를 놓고 내기를 건다. 이 잔인한 오락은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세기 초에 경기의 잔인성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고, 그 결과 1835년에 ‘유혈스포츠’ 를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이 잔혹한 오락은 이미 영국을 벗어나 해외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이미 사회 분위기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은 해외에서 수입된 차, 커피, 설탕의 맛과 면직물, 견직물의 멋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도 감수했다. 또한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상품을 발명하거나 개량할 능력이 있는 이들은 앞 다투어 개발과 생산에 뛰어들었다. 농업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가축의 품종개량이 가져다주는 효과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가축 품종개량 효과에 열광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지만, 혁신적 마인드를 가진 농부들은 유전적 형질이 다른 개체군을 선택교배(selective breeding)하는 실험에 적극 나섰다. 품종개량에 탁월한 농부들은 오늘날의 첨단산업 전시회에 해당하는 농업경진대회에 가축을 출품하였고, 여기에서 수상한 품종은 오늘날의 최고사양 제품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선택교배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소의 몸집이 어느 정도 커졌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도축용으로 판매된 황소의 평균 무게가 1700년에는 약 170kg이었는데, 1786년이 되면 약 380kg으로 증가했다. 한 마리의 소로부터 두 배 이상의 고기를 얻게 된 것이다.
| ▲ 그림 2 토머스 위버, 『뉴버스 황소』, 1812년 |
그림 2는 토머스 위버(Thomas Weaver)가 그린 뉴버스 황소(Newbus Ox)라는 품종의 모습이다. 왼편의 농부는 당대의 혁신가로서 명예와 부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 · 양 · 닭도 품종개량의 효과가 뚜렷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로부터 유전적 형질이 뛰어난 품종들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교잡육종을 한 결과였다.
다시 불베이팅(bull baiting)으로 돌아가 보자. 불베이팅에 가장 적합한 개는 어떤 형질을 지녔을까? 소의 주둥이를 잘 물려면 개의 주둥이가 뭉툭하게 생겨야 한다, 개를 내동댕이치고 땅에 짓이기는 소의 공격으로 부터 잘 버티려면 개의 다리가 짧아야 유리하다. 또한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완강한 근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스펙에 맞춰 개량된 이상적인 개가 바로 불독(bulldog)이었다. 불독이야말로 혁신과 개량의 시대에 오락 분야에서 영국인들이 이룬 특별한 성취였다.
생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향상되자, 동물의 활용 범위가 품종개량을 넘어서 한층 높은 수준으로 확대됐다. 가장 뛰어난 혁신은 의학 분야에서 나왔다.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치명적 질병인 천연두를 정복하고자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였다. 천연두 퇴치법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에서 사용되던 접종방법이 이미 1721년에 영국에 처음 소개되었고, 다시 1770년대에 우두(牛痘), 즉 소의 두창을 사람 피부에 접종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1796년 제너가 우두를 접종하면 면역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 소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얻은 두창도 접종하면 면역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밝힌 것을 계기로 종두법은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백신(vaccine)’이란 말은 라틴어로 소를 의미하는데, 제너가 소의 두창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 훗날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에 의해 인위적으로 면역을 주기 위해 약화시킨 병원체를 접종하는 것을 통칭하는 용어로 정착했다. 제너의 예방접종법은 이후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와 아시아 등 전 세계로 전파되어 수많은 인명을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구하게 되었다.
| ▲ 그림 3 제임스 길레이, 『우두(Cow Pock)』, 1802년. |
제너의 종두법, 가장 뛰어난 의학 혁신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종두법을 순조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로운 발명과 혁신이 반대에 직면하지 않은 채 전파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드물지 않은가. 제너의 백신도 당시에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림 3은 1802년 반(反)백신협회(Anti-Vaccine Society)라는 단체에서 저명한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가 발표한 그림을 보여준다. 제너가 중앙에 앉아있는 여인의 팔에 주사기로 우두를 접종하고 있다. 제너의 왼편으로는 접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려있고, 오른편에는 이미 접종을 마친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접종을 끝낸 사람들의 입, 코, 귀, 팔, 엉덩이에서 작은 소의 형상이 튀어나오고 있다. 우두를 맞으면 예상치 못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다행히도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이런 부작용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의 우려가 해소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신기술에 대한 저항과 우려는 종두법의 사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다. 새롭게 제작된 증기기관과 직물기계, 새로 건설된 철도와 공장, 새로 사용된 석탄과 금속 · 비금속 자원이 사람들을 그간 익숙했던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사람들은 변화의 종착점이 어디일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문학적으로 보여준 작품으로 메리 셸리(Mary Shelly)가 1818년에 출간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들 수 있다.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익히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한 끝에 죽은 몸뚱이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을 개발한다. 그는 키가 2.4m나 되는 인물을 창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인물은 흉측한 외모에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로,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그의 동생과 신부 등 주변 사람들을 잔인하게 해친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심에 가득 차서 괴물을 뒤쫓아 북극까지 가지만 결국 괴물을 없애지 못한 채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전례 없는 속도의 기술진보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 기술진보가 인류에게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가축의 몸집을 두 배로 키우고, 불독을 개발하고, 종두법을 대중화한 이들은 미래를 밝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 셸리에게는 미래가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과연 산업혁명에 불을 댕긴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인간은 자신이 시작한 기술진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영국을 뒤이어 19세기와 20세기에 공업화에 들어선 서구와 아시아의 모든 후발공업국에서 재등장했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조차도 아직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 중앙선데이 | 제433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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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6. 16세기 종교개혁과 경제발전 |
| ▲ 그림 1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가톨릭 신앙의 알레고리』, 1670~1672년.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한 화가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보인다. |
한 여성이 손을 가슴에 얹고 지구본에 발을 올려놓은 채 위에 걸린 유리 구체(球體)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녀 뒤로는 십자가에 묶인 예수의 그림이 걸려있고, 탁자 위에는 십자가와 종교서, 포도주를 담는 성배 등 가톨릭 성물들이 놓여있다. 바닥에는 사과와 초석(cornerstone)에 눌려 피를 흘리는 뱀이 보인다. 왼편으로는 대형 태피스트리가 한쪽으로 걷힌 채 걸려있다. 이 그림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박해받던 신교도의 해외 탈출이 프랑스 쇠락의 원인 |
그림 1은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가 그린 ‘가톨릭 신앙의 알레고리’ 라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여성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의인화한 것이다. 저명한 화가의 작품이니만큼 여러 미술사학자들이 이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해 해설을 하였다. 사과는 원죄를 상징하고, 초석에 짓눌린 뱀은 예수에게 제압된 악마를 상징한다. 주인공의 옷은 순수함(흰색)과 하늘(파란색)을 의미하는 색이며, 손짓은 독실한 믿음을 뜻한다. 신앙은 ‘지구를 발아래 두는’ 것이며, 투명한 구체, 즉 무한한 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상징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왼편의 태피스트리이다. 평상시에 주인공의 가톨릭 신앙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태피스트리로 가린다는 뜻이지 않은가! 주인공이 앉아있는 곳은 가정집에 몰래 마련된 기도실인 듯하다. 그림의 제작 시점에 네덜란드는 신교(프로테스탄티즘)를 공식 종교로 채택하고 있었다. 베르메르는 혼인을 앞두고 신교에서 구교(가톨릭)로 개종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림 1은 화가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 그림으로 볼 만하다.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지 못하는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떳떳하게 드러내놓지 못하는 시대였음을 그림 1은 보여준다. 이런 시대상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사제인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가 가톨릭교회의 면벌부(免罰符)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 라는 문서를 게시하였다. 교회의 권위에 정면도전한 루터에 대해 교회는 주장을 철회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루터가 이를 거부하고 교회와 교리 논쟁을 계속하자 교황은 루터를 교회로부터 추방했다. 그러나 루터의 교회개혁 사상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때마침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제 활판인쇄술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루터와 여타 개혁가들의 주장은 인쇄물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여,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에 불을 댕겼다. 인쇄술 보급은 오늘날의 인터넷혁명에 버금가는 정보혁명이었다.
| | | ▲ 그림 2 에두아르드 쇤, 『루터, 악마의 백파이프』, 1535년경. 루터의 사상을 공격하는 그림이다. | 그림 2는 구교 진영에서 루터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보여준다. 화가 에두아르드 쇤(Eduard Schoen)은 루터를 악마가 부는 백파이프로 묘사하였다. 루터의 사상이 악마에 의해 조종받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신교 진영에서 구교 진영을 공격하는 그림도 많이 제작되었다. 양측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반복되었고, 그 속에서 갈등의 골을 깊어져만 갔다.
16~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곳곳에서 본격적인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신앙적 차이가 불관용으로 불거지고 이것이 탄압을 낳고 결국 대규모 내란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종교개혁 운동은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속적 이해관계와 뒤얽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헨리 8세가 구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 성공회를 세운 이유는 단지 구교가 자신의 이혼을 반대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단절로 그는 전국에 산재한 구교 교회와 수도원의 엄청난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도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고자 한 제후들이 신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30년 전쟁(1618-1648)으로 절정까지 치달은 유럽의 종교전쟁은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국가 간의 국제법적 관계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었고, 종교적 관용 원칙에 따라 구교와 신교인 루터파, 칼뱅파는 모두 독립적 지위를 획득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교국가들이 북유럽과 서유럽에, 그리고 구교국가들이 남유럽과 동유럽에 포진했다.
종교개혁은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남긴 경제적 영향은 강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이었다. 특히 신교도와 구교도가 각자의 종교 성향에 맞는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함으로써 유럽의 경제적 지형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의 사례였다. 16세기 말 프랑스의 종교 갈등은 학살과 전쟁으로 비화하였다가 1598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칙령의 선포로 일단락된 듯 보였다. 그러나 1685년 루이 14세가 퐁텐블로칙령을 내려 낭트칙령을 무효화하자 위그노는 다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 ▲ 그림 3 고드프루아 엥겔만, 위그노를 위협하는 용기병, 1686년 |
그림 3은 위그노를 소총으로 위협하여 구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는 구교 병사의 모습을 묘사한다. 퐁텐블로칙령이 선포된 직후를 배경으로 고드푸르아 엥겔만 (Godfroy Engelmann)이 그린 작품이다. 구교 병사들은 ‘드래곤’이라는 소총을 소지한 탓에 용기병(Dragonnades)이라고 불렸다. 용기병들은 위그노 집에 제멋대로 머물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심지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위그노에게 개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무자비한 박해 속에서 위그노는 해외로 탈출을 감행했다. 1685~1689년 사이에 적어도 20만 명의 위그노가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스위스 등으로 이민을 했다. 루이 14세 아래에서 오래 재정총감으로 일하며 프랑스의 중상주의를 이끌었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는 위그노 탄압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줄 거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의 경고는 적중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이주는 빈곤, 기근, 실업과 같은 경제적 원인이 배경이 되었다. 그 경우 이주민은 교육과 기술수준이 낮은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위그노의 경우 교육수준이 높고 직업적으로도 상공업자와 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해외이주는 프랑스에서 심각한 ‘두뇌유출’을 의미했다. 실제로 비단제조, 보석가공, 시계제조, 가구제작에 정통한 위그노 장인들이 외국에서 새롭게 산업발달의 기틀을 마련해갔다. 프랑스는 이미 네덜란드와 영국에 비해 국제무역에서 뒤쳐져 있었는데, 이제 숙련기술과 전문지식을 가진 인력을 경쟁국들에 빼앗겼으니 국가가 입은 타격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프랑스의 산업 경쟁력이 낮아지면서 국가재정은 더욱 궁핍해져 갔다. 훗날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고난의 길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자비한 박해 피해 위그노 해외 탈출
종교개혁의 경제적 영향을 가장 거시적 시각에서 논의한 인물은 막스 베버(Max Weber)였다. 그는 1904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신교국가와 구교국가의 역사적 경제성과를 비교하고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제시하였다. 신교의 금욕적 윤리가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고취시켜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내용이었다. 즉 교회의 가르침이 세속의 영리활동에 긍정적인 방향이었기 때문에 신교도들이 더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베버는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주장을 뒤집어 종교라는 상부구조가 경제에 영향을 강하게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세기를 뜨겁게 달군 역사적 대논쟁의 시작이었다.
종교는 세계화를 이끄는 중요한 힘의 하나였다. 종교의 형성과 전파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사상과 가치관을 흡수하고 교류하고 배척했다.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은 종교를 넘어 경제 전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유럽의 종교개혁만큼 이를 잘 보여준 사례도 드물다.
- 중앙선데이 | 제430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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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5. 청일전쟁과 동아시아의 재편 |
| ▲ 그림 1 미즈노 도시카타, 청 북양함대 제독의 모습, 1895년.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이 독배를 마시기 직전에 불타는 자신의 함선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장면. |
청나라 전통 복장을 한 인물이 중국풍으로 꾸며진 방에 앉아있다. 한 손에 술잔을 들고서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멀리 바다 위에서 함선이 시커먼 연기에 휩싸여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북양함대의 치욕적 패배, 청의 몰락을 재촉하다 |
그림 1의 배경은 1895년 2월 초이고, 주인공은 청나라의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지휘 하는 제독 정여창(丁汝昌)이다. 이 그림은 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였던 전투의 결과를 묘사한다. 청일전쟁의 격전장이었던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 해전에서 청은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아시아 최고의 전력이라고 자부하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에 참패하자 정여창은 일본군에게 항복하고 남은 전함과 군사물자를 일본에 양도해야 했다. 굴욕을 참기 어려웠던 그는 집무실로 돌아와 패전의 치욕에 몸서리치며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몇몇 부하 장군들도 뒤따라 죽음을 택했다. 일본의 화가 미즈노 도시카타(水野年方)가 제작한 이 우키요에(浮世繪)는 정여창이 독배를 마시기 직전에 불타는 자신의 함선을 마지막으로 돌아다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는 비장한 기운이 가득하다. 일본으로 귀화하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죽음을 택한 적장에 대해 화가가 나름의 경의를 표한 것이리라.
| | | ▲ 그림 2 고바야시 기요치카, ‘일본만세 백찬백소(日本萬歲 百撰百笑) 에 실린 ‘전기충격을 당한 만주인’, 1895년. 청나라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 미즈노와는 달리 대부분의 일본 화가들은 청나라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적국을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그림 2는 같은 해에 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淸親)가 잡지에 실은 만평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구로부터 소개된 전기가 한창 보급되고 있었다. 전력회사들이 앞 다투어 설립되면서 전기의 놀라운 특성이 알려지던 시기였다. 화가는 서구기술문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전기를 그림에 재치 있게 활용하였다. 말을 타고 칼을 든 모습의 청의 관리가 전기충격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청이 받은 충격은 실제로 대단했다. 일본이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빠르게 도입해왔고, 군사력을 키워 동아시아 패권국가로서의 청의 지위를 흔들어 온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청은 이미 1870년대에 타이완과 류큐(오키나와)에서 일본에게 통제력을 넘겨준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우위를 잃지 않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조선 정치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자국의 지배력을 가시적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정세는 다시 요동쳤다. 농민운동의 확산에 위기를 느낀 고종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대응해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6월부터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아산만 앞바다, 평양, 압록강 어귀, 랴오둥반도의 뤼순(旅順),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은 연전연승했다. 이즈음 서구 열강이 중재에 나섰다. 결국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시모노세키에서 종전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의 결과로 청은 일본에 배상금으로 거액 2억 냥(3억 2000만 엔)을 지불하고, 랴오둥반도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고, 조선 지배권을 후퇴시켜야만 했다.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은 청의 동아시아 지배권에 치명적인 충격파가 미쳤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본의 급부상에 서구 열강들은 긴장했다. 동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세 나라는 힘을 합쳐 일본에게 랴오둥반도의 영유권을 청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 ‘삼국 간섭’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던 일본은 하는 수없이 이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세 국가가 힘을 모아 일본을 압박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이제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는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머지않아 일본과 최종 승부를 겨루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 ▲ 그림 3 앙리 마이어, ‘르 쁘띠 주르날’에 실린 ‘중국, 왕과 황제들의 파이’, 1898년. |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과 일본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청은 열강의 손에 자국의 이권들을 하나둘씩 빼앗기면서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산업화와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주변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켜 갔다. 그림 3은 1898년의 상황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만평이다. 앙리 마이어 (Henri Meyer)가 그린 ‘중국, 왕과 황제들의 파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청나라 관리가 두 손을 번쩍 들고서 분노에 찬 표정을 지으며 서있고, 그 앞에 중국이라는 큰 파이를 둘러싸고 다섯 열강의 대표들이 앉아있다. 맨 왼쪽에는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이 파이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려는 듯 손바닥을 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옆에서 빅토리아여왕과 눈길을 부딪치고 있는 인물은 독일의 빌헬름 2세이다. 그는 자오저우 만(膠州灣) 지역에 칼을 박아 넣고 있다. 1897년에 독일은 자국 선교사가 살해된 사건을 핑계 삼아 산둥반도 남쪽의 자오저우 만을 무력으로 점령하고서 이듬해에 청으로부터 99년간의 조차권을 얻어낸다. 칭다오(靑島)가 포함된 지역이다. 다음으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앉아있다. 그 뒤로 프랑스의 상징인 마리안이 유일하게 칼을 들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니콜라이 2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이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 간에 체결한 동맹을 상기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사무라이가 칼을 내려놓고 턱을 손에 괸 채 파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니콜라이 2세 앞에 있는 아서 항(Port Arthur)이라고 적힌 파이 조각에 꽂혀있다. 아서 항은 뤼순(旅順)의 별칭이다. 러시아가 일원으로 참여한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이 청에 반환을 해야만 했던 랴오둥반도의 항구도시이다. 사무라이의 눈초리에서 이 땅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소유욕이 동시에 묻어난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정치 · 경제 · 군사적 중심축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이동시킨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청에서는 이미 아편전쟁(1840~42년)과 태평천국 봉기(1851~62년)를 계기로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홍장과 같은 관료들은 중국 전통의 가치를 유지한 채 서양 문물만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다. 군수산업이 육성되고 직물업, 교통업, 광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양무파 관료들이 중앙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채 분열된 상태로 각자 개혁을 추진한 까닭에 운동의 효과가 크지 못했다. 이런 약점은 청일전쟁에서 패배로 나타났다. 일본이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고 서구의 군사기술을 체계적으로 도입해 군대를 성공적으로 근대화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패전 이후 청에서는 서구문물의 도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정치 · 교육 · 사회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도 충분치 못해 청은 몰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일본은 거액의 배상금과 할양받은 영토를 이용하여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중공업을 육성하고 군비확충에 가속도를 냈다. 이는 앞으로 일본이 신흥 강자 러시아를 제압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이어서 만주와 중국으로 발을 뻗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의 상황은 헤어나기 힘든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청에 대한 우세를 보였으나, 곧이어 삼국간섭이 발생하면서 친러파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면서 다시 저울의 추는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기울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즉 ‘강압적 세계화’의 시대인 19세기 말에 한반도를 배경으로 쇠락해 가는 청, 기세를 올리고 있는 일본, 신흥 패권국 러시아의 세 나라 간에 피 말리는 두뇌싸움과 힘겨루기가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 중앙선데이 | 제427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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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4. 바이킹의 탐험과 교역 |
| ▲ 그림 1 크리스티안 크로스가 그린 ‘레이프 에릭손 미국을 발견하다’, 1893년. 1000년 경 바이킹 일행이 아메리카 땅인 뉴펀들랜드를 발견하는 장면을 그렸다. |
험한 파도가 몰아치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바다를 뚫고 목선이 나아가고 있다. 배 위에는 모두 여섯 명의 사내가 있다. 대장으로 보이는 노란 옷의 건장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고, 몸집이 작은 아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나머지 거친 모습의 네 어른 중 한 명은 대장이 있는 쪽으로 발을 성큼 내딛고 있다. 그의 손에는 투구가 들려 있다. 이 그림은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것일까?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에 상륙한 바이킹 |
그림 1은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스(Christian Krohg)의 작품이다, 19세기 말 노르웨이 화풍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옮겨가고 있었는데, 이 그림에서도 이런 이중적 화풍이 느껴진다. 그림 제목은 ‘레이프 에릭손(Leif Ericsson) 미국을 발견하다’ 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노란 옷의 사내가 가리키고 있는 쪽에 육지가 보인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에릭손은 누구일까? 그는 1000년경에 탐험대를 이끌고 그린란드를 떠나 서쪽으로 나아간 끝에 오늘날 아메리카 땅인 뉴펀들랜드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는 도착지를 빈란드(Vinland)라고 명명하였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가 머나먼 항해를 한 끝에 지금의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해가 1492년이니, 에릭손은 그보다 5세기나 앞서서 아메리카에 상륙한 유럽인이었던 것이다.
잔인한 약탈자로 악명 높던 바이킹
에릭손과 일행은 바이킹이었다. 흰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중세 유럽 전역을 피로 물들인 잔인한 약탈자로 악명을 떨쳤다. 원추형 투구와 위쪽이 둥글고 아래쪽이 좁은 방패가 호전적 침략자 바이킹의 상징과 같았다. 그림 1에서 이마가 넓은 이가 들고 있는 것이 이 투구 이고, 배 바깥쪽으로 줄지어 걸려있는 둥근 물체들이 이 방패다. 그러나 바이킹을 치고 빠지기 스타일의 약탈자로만 봐서는 안 된다. 현대의 여러 역사가는 바이킹이 약탈만이 아니라 정복과 정착을 통한 장기적 통치에도 능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이 전투에서 뿐 아니라 교역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바이킹의 실제 모습을 어떠했을까?
바이킹의 전성기는 8~11세기였다. 793년 바이킹 전사를 가득 실을 배들이 영국 북동부 린디스판을 공격했다. 그들은 수도원을 약탈하고 보물을 빼앗고 수도사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잡아갔다. 이것이 약탈자 바이킹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이후 바이킹은 영국 해안지역에 자주 출몰하였다. 그들은 재빨리 공격한 후 전리품을 챙겨 신속하게 사라지는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영국 방어체계의 취약점을 확인하자 점차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정착한 후 주민들을 통치하는 길로 나아갔다. 이 지역을 데인로(Danelaw)라고 불렀다.
| ▲ 그림 2 영국 해안에 상륙하는 바이킹. ‘성 에드먼드의 생애’, 12세기 | 그림 2는 9세기 영국 해안에 상륙하는 바이킹을 보여준다. 앞서 설명한 투구와 방패가 보인다, 이들이 탄 배는 롱쉽(longship)이라 불렸는데, 배의 양쪽 끝이 위로 솟은 날렵한 곡선형 선체가 특징적이었다. 롱쉽은 빠를 뿐만 아니라 먼바다 항해와 해안 접근에 모두 유용했다. 또 노 젓는 방향만 반대로 하면 배가 전진하는 방향을 거꾸로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영국을 공략한 후 바이킹은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885년 그들은 센강을 타고 프랑스 내륙으로 들어가 파리를 포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파리는 겨우 함락을 피했고 바이킹은 외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노르만(북쪽사람)이라고 불린 이들의 위세는 여전했다. 911년 프랑스 국왕은 이들에게 북부지역의 넓은 땅을 봉토로 하사함으로써 평화를 얻게 되었다. 노르만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은 노르망디 공국이라고 칭해졌다.
러시아까지 지배한 개척 정신
바이킹의 해양진출은 영국 너머 서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스칸디나비아 본국에서 ‘금발 왕 하랄’이 경쟁 관계의 수장들을 제거해 간 것이 계기였다. 불안을 느낀 수장들은 지지 세력을 이끌고 새 땅을 찾아 떠났다. 870~930년 사이에 1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노르웨이 지역을 떠나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아이슬란드에서도 정착민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졌고 정착민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982년 아이슬란드에서 살인죄로 3년의 해외추방형을 선고받은 ‘붉은 머리 에리크’는 서쪽 바다로 더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수백km의 항해 끝에 그는 얼음에 뒤덮인 땅을 발견해 그곳에서 추방기간을 보냈다.
이후 그는 아이슬란드로 돌아와 자신이 발견한 섬으로 갈 이민자를 모집했다. 그가 그린란드(Greenland)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붙인 때문인지 희망자가 많았다. 결국 986년 약 400명의 이민자가 그린란드에 도착해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에 서쪽으로 탐험을 계속해 결국 북아메리카에 상륙한 에릭손은 바로 붉은 머리 에리크의 아들이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왕권을 놓고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고드윈슨, 노르웨이 국왕 하랄 하르드라디,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해럴드는 하랄을 꺾었지만,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에게 패배하였다. 이 시기 노르망디 공국은 이미 바이킹의 원래 색깔을 버리고 프랑스식 문화를 수용한 지 오래됐기 때문에, 1066년은 영국에 프랑스 문화가 전면적으로 퍼지는 분기점이 되었다.
서쪽과 남쪽으로 향한 바이킹이 노르웨이 출신이었다면, 동부로 떠난 바이킹은 주로 스웨덴 출신이었다. 9세기 후반 류리크(Ryurik)라는 바이킹이 러시아 서부의 노브고로트를 지배하게 된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바이킹이 키예프를 포함한 슬라브계 영토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들을 루스(Rus)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기원이 된다. 루스는 러시아의 중추적 지배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무역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강줄기들을 타고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드네프르 강을 따라 흑해까지 가서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도 했고, 볼가 강을 따라 카스피 해에 도착하여 이슬람 상인들과 거래하기도 했다.
| ▲ 그림 3 올라우스 마그누스, 『북방민족의 역사』, 1555년 |
종려나무처럼 큰 키에 얼굴 붉은 사람들
그림 3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바이킹 무역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웨덴 작가 올라우스 마그누스(Olaus Magnus)가 기술한 『북방민족의 역사』에 등장하는 그림이다. 강을 운항하다 육지를 만나면 짐을 내리고 배를 끌어올려 육상에서 운반하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한 이슬람 역사서는 이들을 ‘종려나무처럼 큰 키에 머리는 금발이고 얼굴은 붉은’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바이킹은 종종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교역이 이들에게 더 중요한 활동이었다. 서유럽과 이슬람세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던 비잔틴제국과 슬라브 지역에서 바이킹은 경제적 교류의 주체로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은 · 비단 · 향신료 · 와인 · 도기 등을 구매하고 모피 · 주석 · 꿀 · 바다코끼리 상아 등을 판매했다. 노예도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바이킹이 없었더라면 유럽 전 지역을 단일한 무역망으로 묶는 국지적인 세계화는 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바이킹들은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 탐험대장 에릭손은 상륙한 이듬해에 고향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이후 이민을 희망하는 그린란드 사람들이 빈란드로 옮겨가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새 정착생활은 20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곳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는 원주민들이 살아온 터전이었지 유럽인이 ‘발견’할 대상물이 아니었다. 바이킹 이주민들은 그들이 스크라일링(못생긴 사람)이라고 부른 원주민들과의 전투에 지쳐 결국 그린란드로 철수하고 말았다. 수 세기 동안 유럽 곳곳을 호령하고 뛰어난 항해술로 아메리카에까지 도달했던 바이킹은 11세기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 중앙선데이 | 제424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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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3. 무기혁명과 국가재정 시스템 |
| ▲ 그림 1 장 드 와브랭이 묘사한 1340년대 전투 장면, 15세기 말 작품. 총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그렸다. |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성채를 둘러싸고서 공격을 퍼붓고 있다. 돌로 성벽과 능보(불룩 튀어나온 부분)를 높게 쌓고 주위에 해자를 두른 요새는 중세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형적 형태다. 전통적 무기인 활과 창으로 공략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병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총기와 대포와 같은 화약무기다. 이 그림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일까? 그리고 화약무기의 사용은 세계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화약무기의 확산이 근대 국가 탄생의 원동력 |
그림 1은 15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서 과거 전쟁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긴 장 드 와브랭(Jean de Wavrin)의 ‘영국연대기(Chroniques d’Angleterre)’에 등장한다. 200여 년 전에 있었던 백년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 도시를 공략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낯선 느낌이 난다. 건물은 낯익은 중세 유럽 성채의 모습인데, 병사들의 무기는 활이나 창이 아니라 화약무기다. 그림의 배경인 14세기 중반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화약무기가 전투에 사용된 시기였다.
| ▲ 그림 2 화공무기를 든 악마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석가모니, 10세기 둔황 석굴벽화(부분). | 화약무기는 중국에서 유래했다. 그림 2에서 초기 화약무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10세기 둔황 석굴에 그려진 이 벽화에는 석가모니가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난 마라(魔羅)로부터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장면이 그려있다. 석가모니의 오른편 위쪽으로 화창(火槍)을 들거나 수류탄처럼 보이는 화공무기를 손에 든 악마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 탱화는 화약무기를 묘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여겨진다.
12세기 송나라 때 화약무기 사용
중국에서 실제로 화약무기가 전쟁터에서 사용된 것은 12세기 송나라 때였다. 이후 화약무기는 연이은 왕조들에 의해 더욱 발달했다. 초기에는 화약이 발화를 주목적으로 사용됐으나 점차 폭발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화약무기도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개발됐다. 화약무기의 잠재력은 곧 다른 국가들에게 알려졌다. 13세기 몽골제국이 서아시아 정벌을 하는 과정에서 화약과 화기가 이슬람세계에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다시 유럽은 이슬람을 통해 화약무기의 위력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화약무기 개발에 힘을 쏟으면서 마침내 14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가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 그림 1과 같이 총포가 등장하게 됐다.
초기 화약무기는 파괴력이 변변치 않았고 사용하기도 불편했다. 때론 무기를 다루는 병사가 사고를 내기도 했다. 신기하지만 효과는 의심스런 화약무기가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 · 무기혁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을 당시에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화약무기 성능이 향상되자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 것은 기사였다. 중세 군사력의 상징이었던 마상 기사는 총포를 이용한 공격에 무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사의 몰락은 중세 유럽사회의 근간이었던 봉건제가 무너지는 걸 의미했다. 전투력이 없는 기사를 가신으로 임명하고 봉토를 내줄 주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화약무기를 다룰 줄 아는 병사들을 대규모로 보유하는 것이 최상의 군사전략이 되었다.
성채의 구조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돌담을 높이 쌓은 성채는 대포 공격으로 붕괴하기 쉬웠고, 둥근 능보는 아래쪽으로 바짝 접근한 적군에 대응하기 어려운 사각(死角)의 문제가 있었다. 화약무기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흙벽을 비스듬한 각도로 두텁게 다져 누벽을 세우고, 능보를 뾰족하게 각진 형태로 지어 근접한 적군을 다른 능보에서 직선화기로 공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성채 곳곳에 작은 구멍을 내어 엄폐된 채로 공격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새로운 요새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능보 개수만큼의 꼭짓점을 가진 별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른바 성형요새(星形要塞, star fort)의 등장이다.
| ▲ 그림 3 베네치아 근교 팔마노바 성채 지도, 17세기 | 이상적인 성형요새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완벽히 점대칭인 별모양이지만, 요새가 위치한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로 건설되었다. 이상적인 요새의 사례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의 팔마노바 성채를 들 수 있다. 1593년 베네치아의 건축가 빈첸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림 3이 보여주듯이 도시를 감싸는 성채가 정구각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고 꼭짓점마다 각진 능보가 돌출한 형태였다. 이 성채는 평탄한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성채들과는 달리 정구각형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무기혁명이 야기한 이런 변화들은 곧 재정 확충의 필요성을 낳았다. 돈이 부족하면 성능이 향상된 화기를 개발할 수도, 대규모의 상비군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다. 상비군을 훈련시켜 일사불란하게 화기를 사용하게 할 수도, 견고한 요새를 건축할 수도 없었다. 반대로 돈이 있으면 군사력이 강해졌다. 주변 세력을 흡수해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대다수의 영주들은 설자리를 잃었고, 대신에 대규모 영토를 단일 권력이 통치하는 국가가 만들어졌다. 봉건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화한 근대적 국가체제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바로 무기혁명이었다.
무기혁명은 수세기에 걸쳐 진화를 거듭하였다. 14세기에 보병의 전투력이 크게 인정받은 데 이어서 15세기에는 포병부대가 군사력의 중핵으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요새 건설의 혁신과 소총부대의 밀집대형전술 도입이 중요시되었다. 마지막으로 17~18세기에는 각국이 이렇게 개혁된 군대를 대규모로 확충하고자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는 병참시스템을 강화하고 행정체계를 완비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
무기혁명의 영향은 가히 범세계적이었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적 변수로 작용했다. 1453년 오스만제국 군대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릴 때에도, 1490년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군대가 이슬람 최후의 보루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킬 때에도 개량된 화기가 큰 역할을 했다. 1610년대 이후 변방국가 스웨덴이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배경도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인도의 무굴제국도 군사개혁 덕분에 지방 세력들을 누르고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도 변화의 흐름에서 빗겨나 있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1560~80년대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각각 소총부대와 야포부대를 창설해서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중국에서는 1630년대에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포병을 양성해 대륙장악의 기반을 마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총부대 창설
어느 국가가 강대국이 되느냐는 무기혁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무기혁명 달성을 좌우하는 핵심 열쇠는 재정개혁에 있었다, 특히 유럽이 신항로 개척에 성공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중상주의 시대를 개막하자 해군력의 중요성이 급속히 커졌다. 성능 좋은 대포를 장착하고 잘 훈련된 수병들을 갖춘 함대를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자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세금 징수를 늘리거나, 은행에서 차입을 하거나,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달리 말하면, 조세제도와 금융제도를 잘 갖춘 국가만이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과거의 강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힘을 잃고 신흥 강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떠오르게 된 것이 바로 이 차이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은 국채발행을 통해 전비를 마련하는 새로운 제도를 개발했다. 이 창의적 제도에 힘입어 영국은 중상주의 시기 국제적 무력 대결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최초로 맞이하게 되었다. 강대국이 되려면 무기혁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재정과 금융이 발달해야만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 중앙선데이 | 제421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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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2. 관광산업의 성장 |
| ▲ 그림 1 제임스 앙소르, ‘오스텐드에서의 목욕’, 1890년. 벨기에의 휴양도시 오스텐드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유럽 중산층의 모습을 그렸다. |
뭉게구름 사이로 작열하는 태양, 그 아래에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그리고 그곳을 가득 메운 인파.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알몸을 드러내거나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이들도 많다, 왼편에는 마차 형태의 구조물들이 해변에 빼곡하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해수욕객을 구경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키스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구조물 지붕 위에도 망원경과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보인다. 이 그림은 어느 시대, 그리고 어느 장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일까?
19세기 중반 유럽 중산층, 휴가와 여행의 맛에 빠져들다 |
언뜻 보면 이 그림은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는 휴가객이 넘치는 오늘날의 인기 휴양지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참 시간이 흐른 과거의 모습이라는 단서들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마차 형태의 구조물이다. 말이 끌어서 해변에 설치하는 이 구조물은 이동식 탈의장이다. 해수욕객이 돈을 지급하고 빌려 오늘날의 방갈로처럼 사용하는 것이었다.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둘째 힌트는 구경꾼들의 차림새다. 다수의 남성들은 콧수염을 기른 얼굴에 전통적 모자를 쓰고 있다. 여성들은 긴 드레스와 외출용 모자가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해수욕객들이 입은 줄무늬 수영복이 시선을 끈다. 남성들이 수영복 상의를 입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그림 1의 배경은 1890년 벨기에의 휴양도시 오스텐드이고, 화가는 벨기에 출신인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다. 다른 화가들과 차별화하는 자유분방한 화법과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앙소르는 해안 휴양지를 가득 메우고 낯 뜨거운 볼거리를 연출하는 관광객들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구경하는 사람들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경쾌하게 묘사했다.
휴가철에 유명 관광지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은 19세기 유럽에서 본격화했다. 이전에도 여행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중국 주나라에서는 태산(泰山)을 찾아가서 제물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로마제국에서는 건강을 위해 온천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세에는 자신이 믿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7~18세기 유럽에서는 상류층 자제들이 그리스 로마 및 르네상스의 건축과 예술을 공부하고 고급 예법을 익히기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유행했다. 이때까지도 여행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게 아니라면 소수의 부유한 귀족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19세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관광과 휴양을 위한 여행이라는 특권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오스텐드는 전형적으로 이런 변화를 겪은 휴양지였다. 1831년 권좌에 오른 국왕 레오폴드 1세는 이곳을 즐겨 찾곤 했다. 1838년 브뤼셀과 오스텐드를 잇는 철도가 건설되자 오스텐드의 인기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1846년에는 영국의 도버로 오가는 페리가 개통됨으로써 국제적 휴양지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19세기 중반 이래 오스텐드는 휴가 여행을 갈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인기 관광지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은 제조업과 상업을 영위하는 기업가, 고급 교육을 받고 대학과 정부에서 일하는 전문가, 그리고 예술가와 같은 프리랜서 등이었다. 이 새로운 중산층은 국적을 불문하고 유명 휴양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관심을 나누고 생활양식을 교류했다.
| ▲ 그림 2 토머스 쿡이 조직한 첫 여행단, 1841년 | 초기에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관광여행이 집단적인 모습으로 변모한 것도 산업화의 진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업화한 단체관광 시대를 연 인물이 영국의 토머스 쿡(Thomas Cook)이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림 2는 1841년 쿡이 처음으로 모집한 여행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500명으로 구성된 여행단은 기차를 타고 레스터에서 러프버러에 이르는 19㎞의 거리를 왕복 주행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845년 쿡은 본격적인 유료 여행업을 시작했다. 기차로 영국 남서부를 출발하여 북부 산업도시 리버풀에 이르는 경로였다. 단체관광은 개인별 여행경비를 낮추는 장점을 지녔기 때문에 사업성이 좋았다.
10년 후인 1855년에 쿡은 최초로 유럽대륙 여행 패키지를 선보였다. 영국에서 출발해 앤트워프, 브뤼셀, 쾰른, 프랑크푸르트,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파리에 도착해서 국제 박람회를 구경하도록 내용이 구성되었다. 여행의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마침내 1872년 쿡은 최초의 세계일주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여행에 꼬박 222일이 걸렸고 이동거리는 총 4만㎞에 달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단지 여행거리 늘리기에 머물지 않았다.
1874년 그는 스위스 여행가이드북을 발간했고, 뉴욕에서 여행자수표(travellers’ cheque)의 초기 형태를 만들었다. 1878년에는 외화환전소를 설립했다. 쿡이 사망한 이후인 20세기에도 그의 회사는 획기적인 여행상품을 계속 만들어냈다. 1919년 최초로 항공여행 광고를 냈으며, 1927년에는 뉴욕에서 시카고로 날아가 인기 권투경기를 관람하는 패키지를 만들었다. 확실히 쿡은 여행업의 부가가치를 높일 줄 아는 탁월한 사업천재였다. 그의 예를 따라 서구 각국에서 다양한 여행상품이 개발되었고 관광과 관련한 직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빠르게 증가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를 거치면서 관광여행은 중산층에서 일반 대중에게로 퍼졌다. 직장에서 휴가 제도가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많은 노동자가 관광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바닷가 휴양지에 국한되었던 여행지가 알프스산맥과 같은 산악지역, 가족이 함께 찾는 전원지역으로 넓혀졌다. 국내에서 주변국으로, 다른 대륙으로 범위가 확장된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동시에 여행의 수단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철도에서 시작한 관광여행은 유람선과 자동차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20세기 중반에는 여객기가 등장했다.
항공여행의 등장은 관광여행에 한 단계 높은 차원을 제공했다. 사진에서만 보던 에펠탑, 콜로세움, 자유의 여신상, 피라미드를 직접 찾아가 만져보고 올라가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돼 1970년대 초까지 계속된 세계경제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항공여행의 인기는 날아올랐다. 소득수준의 향상과 평화로운 국제정세 속에서 여행객들은 변화된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그림 3 ‘3주에 유럽 17개 주요 도시 탐방’, 1965년 6월 5일자 뉴요커에 실린 만평 | 그림 3은 1965년 미국의 시사 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에 실린 만평이다. 미샤 리히터(Mischa Richter)가 그린 이 그림은 당시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항공여행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관광객들이 바쁘게 내려 앞다투어 뛰어가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한 공항요원이 동료에게 ‘3주 만에 유럽 17개 주요 도시를 도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고 있다. 유명한 관광명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풍경은 항공여행이 대중화한 초창기에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관광여행은 사람들이 낯선 지역의 문화를 경험하고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세계화 과정의 주요 채널 가운데 하나였다.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시간을 들여서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는 정성이 들어가는 지극히 자발적인 세계화였다. 낯선 음식을 맛보고, 신기한 풍물을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휴가를 보내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관광객들은 자연스럽게 세계화를 경험하였다. 세계화는 상품과 자본과 기술의 이동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서도 확산하는 것이다. 산업화는 중산층의 성장을 통해, 운송수단의 발달을 통해, 그리고 관광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개발을 통해 세계화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관광산업은 오늘날에도 저가항공, 오지탐험, 공유여행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 중앙선데이 | 제418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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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1. 일본의 서구화와 근대화 |
| 그림 1 가와나베 교사이, 39교사이낙화(曉齋樂畵)39, 1874년. 일본이 큰 변화에 휩싸여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
일본의 19세기 목판화에 다양한 인물이 묘사돼 있다. 오른편 위로 털북숭이 인물의 머리털을 자르고 있고, 왼편에는 저울 아래로 문서가 불타고 있다. 조금 더 내려오면 초록색과 빨간색 괴물들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뿔을 뽑거나 잘라내기도 하고 옷을 강제로 입히기도 한다. 거울을 보면서 망연자실한 괴물들도 있다. 이 그림은 무엇을 묘사하고 있을까? 화가는 어떤 역사적 현실을 반영해 이 그림을 그렸을까?
페리 제독의 흑선, 일본 개조의 닻을 올리다 |
일본의 서구화와 근대화
그림 1은 일본의 전통적 니시키에(錦繪)다. 니시키에는 목판으로 프린팅한 에도 시대의 다색 그림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17세기부터 일본에서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가 발달했는데, 1760년대부터는 색깔별로 목판을 따로 만들어 순차적으로 찍어내는 방식인 니시키에가 인기를 끌었다. 이런 목판화는 메이지 시대(1868~1913)에 크게 유행했다. 작품들은 풍속화가 많은데, 특히 해외에서 들어온 새로운 물품과 패션, 철도와 같은 교통수단 등이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 작품을 제작한 이는 가와나베 교사이(河鍋曉齋)다. 그는 전통 일본화를 공부했지만 점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화풍을 지향했다. 격식을 무시하고 과장된 표현을 섞은 캐리커처에서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일본 문화사를 통해 특징적으로 발달한 ‘망가(漫畵)’의 선구자였다고 볼 만하다. 그림 1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림이 묘사하는 것은 지옥이다. 털북숭이 인물은 다름 아닌 염라대왕인데, 난처한 표정을 한 채 머리털이 잘리고 있다. 그 앞으로 염라대왕이 벗어놓은 붉은색 도포를 집어 드는 이가 있고, 반대쪽에는 서양식 옷차림을 한 노파가 염라대왕을 위해 양복과 신사 모자를 들고 이발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 ▲ 그림 2 '흑선 두루마리(black ship scroll)'에 수록 된 페리 제독의 초상, 1854년. | [흑선, 함포사격으로 무력 시위]
왼편의 저울은 저승에 온 자가 생전에 지은 죄의 무게를 재는 도구이며, 그 아래에서 불타고 있는 문서들은 죄상을 기록한 자료다. 괴물들은 염라대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을 텐데, 이제는 뿔을 제거당하고 있고 염라대왕과 마찬가지로 전통 복장 대신에 서양 옷을 강제로 착용당하고 있다. 괴물들 가운데 일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뿔 잘린 볼품없는 자신들의 얼굴만 확인할 뿐이다. 죽은 자의 생전 행동을 보여주는 업경(業鏡)으로 몸뚱이조차 양복에 가려져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화가는 지옥도를 희화화함으로써 자신이 살던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때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가 서구화를 빠르게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전통적 풍습을 서구에서 도입한 새 풍습으로 교체하는 제도들이 우후죽순 마련됐다. 예를 들어 1871년에는 앞머리를 밀고 후두부에 상투를 트는 존마게(丁?>)라는 전통적 머리 모양이 금지됐다. 1876년에는 군인과 경찰을 제외하고는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불법화됐다. 그림 1은 서구화라는 급류에 휩쓸린 일본 사회를 비유했다. 뿌리 깊은 전통적 가치가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상황, 그리하여 본연의 몸체와 기록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을 화가는 조롱하고 있다. 화가가 당시의 변화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반세계화’주의자였는지, 아니면 다만 변화와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본 ‘대안 세계화주의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당시 일본이 얼마나 급속한 전환기를 겪고 있었는지를 그림 1이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 사회와 경제의 대전환은 언제 시작됐을까? 그것은 에도 막부 말기인 1853년 미국의 소함대가 도쿄만에 들어서면서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개방 압력을 높여 왔지만 일본은 네덜란드에만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해 왔다. 그런데 페리 제독이 이끄는 증기선-흑선(black ship)-들은 통상을 요구하는 대통령의 친서를 내미는 한편 함포 사격으로 무력시위를 하면서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이듬해 페리의 함대가 다시 찾아오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교역에서 최혜국 대우를 얻었고, 미국 함대에 연료를 공급할 수 있도록 두 항구를 여는 데 성공했다. 난파한 미국인의 안전귀환도 보장받았다. 뒤이어 일본은 영국 · 러시아 · 네덜란드 · 프랑스와 유사한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인들에게 페리 제독은 어떤 인상으로 인식됐을까? 그림 2는 입항 직후 일본인이 그린 페리 제독의 모습이다. 이 그림도 만화적 묘사를 보여주는데, 페리 제독은 일본의 전설에 등장하는 덴구(天狗)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덴구는 깊은 산골에 살면서 마계를 지배하는 요괴로, 원래 옛날에 벼락이 쳤을 때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개라고 한다. 덴구는 보통 붉은 얼굴에 높은 콧대를 지니고 수행자 차림을 하는데 페리 제독의 초상이 영락없이 이 이미지다. 페리 제독 일행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원하는 이익을 강제로 취할 요괴처럼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졌나 보다.
페리는 이런 모습으로 자신이 일본인에게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일본의 대외 개방이 기술 진보와 경제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시킬 만한 물품들이었다. 그중에서 일본인들의 눈을 가장 확실하게 사로잡은 것은 미니어처 기차였다. 미국 선원들은 실물의 4분의 1 크기로 제작한 미니어처 기차와 100m에 달하는 철로를 요코하마 영빈관 뒤에 설치했다. 그림 3은 근대화 혹은 ‘문명’의 궁극적 상징인 증기기관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기심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차를 운행하고 통제하는 미국인들과 시승하고 관찰하는 일본인들의 상호작용이 호의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림 2의 페리 초상이 보여주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 그림 3 페리가 가져온 미니어처 기차, 1854년께 | [일본, 사농공상 신분질서 폐지]
페리의 입항으로 촉발된 일본의 개방은 일본 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두고 막부세력과 반대세력이 충돌하였는데, 1866년 막부가 패배함으로써 700년 넘게 지탱해온 체제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새로 들어서게 됐다.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서는 서양 세력의 확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개화파 중에는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의 정신은 보존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가장 많았다. 청나라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일맥상통하는 관념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서양을 배척하자는 양이(洋夷)사상이 퍼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힘을 잃어갔다. 오히려 화혼양재로서는 개혁이 불충분하다는 주장이 확산되면서 전면적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일본 정부는 우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폐지했고, 영업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했다. 1870년대부터는 식산흥업정책을 실시했다. 서구로부터 근대적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며, 근대적 경영자와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 전략을 통해 일본은 빠르게 공업국으로 변모해갔다. 예를 들어 1886년 일본은 국내 소비용 면직물의 3분의 2를 수입에 의존했다. 그림 1에 등장하는 의류도 화가가 수입품을 가정해 그렸음 직하다.
그러나 1902년이 되면서 면직물 생산을 완전히 국산화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전 세계 면직물 무역량의 무려 4분의 1을 일본의 수출이 담당하게 됐다.
1885년 일본의 개혁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탈아론(脫亞論)에서 일본은 청과 조선이라는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고 서양 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차별화 전략을 천명한 바 있다. 그의 주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바로 국가주도형 공업화 전략이었다.
- 중앙선데이 | 제415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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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20. 중세 무역상 마르코 폴로 |
| 그림 1 폴로 가족이 1275년에 쿠빌라이 칸을 만나는 모습, 15세기 프랑스 작품. 마르코 폴로(맨 왼쪽 어린이)와 그의 아버지, 삼촌이 쿠빌라이 칸에게 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
중세 서양식 복장의 두 어른과 한 아이가 예를 갖추고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왕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왕좌는 화려한 직물로 덮여 있고, 그 옆에 시중을 드는 인물이 서 있다. 벽면 장식은 화려하고 바닥 무늬는 선명하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누구이며 배경을 이루는 장소는 어디일까. 그림에서 역사적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은 무엇일까. 허풍쟁이 ‘백만이’의 베스트셀러가 미래 탐험가들 키워 |
⑳ 중세 무역상 마르코 폴로
왕좌에 앉아 있는 인물은 언뜻 서양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중국 원나라의 세조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을 묘사한 것이다. 그가 1275년 북경 부근의 상도(上都)라는 도시에 위치한 여름궁전에 머물 때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 가족이 그를 알현하러 왔다.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 형제, 그리고 이들 손에 이끌려온 니콜로의 어린 아들 마르코 폴로였다. 쿠빌라이 칸의 모습이 서양인처럼 묘사돼 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에 이 미니어처를 그린 프랑스 화가가 몽골 황제에 대해 별로 지식이 없었을 테니까.
더 중요한 ‘역사적 오류’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배경에 그려진 두 척의 서양식 선박이다. 상도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위치했으므로 궁전에서 배가 보였을 리 없다. 이것도 화가의 무지 탓일까. 마르코 폴로 일행이 고비사막을 넘어 육로로 상도(上都)에 이르렀다는 점에 비춰보자면 그림은 분명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그림은 오늘날의 스냅사진과는 다른 역할을 했다. 스냅사진이 한 시점에서 한 공간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과거의 그림에는 화가가 의도한 내용이 시공을 초월해 집약된 경우가 많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멀리 유럽으로부터 지중해를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화가가 그림에 의도적으로 담았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멀리 언덕 위의 건물도 유럽의 성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 그림 2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이 1266년에 쿠빌라이 칸을 만나는 장면, 15세기 작품. | 마르코 폴로, 7살 때 몽골제국 여행
그림 2는 마르코 폴로 가족의 중국 방문을 묘사한 대표적인 그림으로 손꼽힌다. 여러 역사책에서 이 그림은 마르코 폴로와 동행자가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설명돼 있다.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이 처음으로 쿠빌라이 칸을 만난 것은 1266년인데, 이때 마르코 폴로는 두 살짜리 어린아이로 베네치아에서 살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다섯 살이 되던 1269년에야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와 삼촌을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2년 후 세 사람은 다시 몽골제국으로의 장거리 여정을 시작했고 그림 1이 묘사하는 장면이 그 이후에 일어났다. 세 여행자는 중국에서 총 24년에 이르는 시간을 보낸 후 1295년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무려 2만4000㎞에 이르는 이들의 여정이 우리에게 『동방견문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책에 실리게 된다.
그림 2에서 쿠빌라이 칸이 신하를 통해 상인 일행에게 하사하고 있는 금색 물체는 무엇 일까. 이것은 패자(牌子)라고 불리는 일종의 특별 여권이었다. 이걸 지닌 몽골 관리는 국경 내의 모든 지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품이나 용역을 주민들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 칸이 패자를 유럽에서 온 상인에게 주었다는 것은 황제가 이들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제네바에서 옥살이하다 모험담 출간
『동방견문록』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집필된 것일까. 13세기는 지중해 무역을 둘러싸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특히 베네치아 · 제노바 · 피사는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주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로 귀환한 이듬해에 갤리선을 이끌고 제노바의 함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제노바에서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는데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동료 죄수들에게 자신의 아시아 여행담을 들려주곤 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곧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낯선 문화와 제도, 이탈리아 도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의 중국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이유도 있지만 그가 워낙 허풍과 과장에 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중국에는 수백만 명의 인구가 세금을 내는 도시가 수백만 개나 있고 기마병과 선박의 수도 수백만이나 된다는 식이었다. 마르코 폴로에게는 곧 ‘백만이(Il Milione)’ 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런 허풍과 과장은 이야기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듣는 이에게 재미를 더해주는 효과가 더 컸다.
마르코 폴로는 곧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유명해졌고 피사 출신으로 함께 수감 중이던 죄수 루스티첼로(Rustichello de Pisa)는 그의 모험담을 받아 적어 출간하면 큰 인기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방견문록』이 탄생했다.
루스티첼로가 처음에 프랑스어로 출간한 『동방견문록』은 곧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언어로 책이 번역됐고 수많은 각색이 이뤄졌다. 책 제목도 『세계의 이야기』 『경이의 책』 『대칸의 로망스』, 심지어 『백만이』까지 다양했다. 유럽에서 인쇄술이 전파되기 이전에 제작된 필사본만 해도 엄청나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본 수가 무려 150개에 이른다. 인쇄술이 보급된 이후 출판이 더욱 크게 늘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는 상도(上都)와 북경은 물론이고 그가 거쳐 간 수많은 지역, 예를 들어 섬서 · 사천 · 운남 · 하북 · 산동 등이 등장한다. 유럽에서 중국으로 오가면서 거쳐 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도 기록돼 있다. 각 지역의 독특한 외양, 다양한 생활방식과 기이한 풍습을 여행기는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다.
『동방견문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논의의 시발점은 애당초 마르코 폴로와 루스티첼로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중국에 대해 엄밀하고 정확한 기록으로서 기획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책에 묘사된 내용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게 많으며 저자 특유의 과장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중국에 가지 않고 이슬람 상인 등으로부터 전해들은 여러 이야기를 짜깁기했을 뿐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타는 돌’, 즉 석탄이 연료로 사용되었다거나 지폐가 통용되었다는 사실처럼 실제로 가보지 않고서는 상상해 맞추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들어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분명하다는 반론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 그림 3 콜럼버스가 읽고 여백에 메모를 기록한 라틴어판 『동방견문록』 1480년대. | 『동방견문록』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가라는 문제와 별도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수많은 독자에게 호기심과 모험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중국이라는 땅, 유럽의 소국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인구와 자원과 기술과 문화를 보유한 곳으로 묘사된 미지의 세상에 대해 잠재적 탐험가들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펴면서 미래를 꿈꾸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 교류와 교역으로 연결하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욕망이 이들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그림 3은 1480년대에 발간된 라틴어판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의 여백에는 책을 읽은 이가 남겨놓은 메모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책을 꼼꼼히 읽고 많은 생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메모를 남긴 독자는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훗날 스페인 국왕을 설득해 탐험대를 구성하고 아시아로 가는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남들과 달리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모험가, 탐험의 결과로 ‘구세계’와 ‘신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세계사적 변화를 탄생시킨 위대한 탐험가 콜럼버스는 2세기 전 허풍쟁이 ‘백만이’가 쓴 과장 가득한 여행기를 읽으며 세상을 바꿀 꿈을 키웠던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412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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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9. 종이와 책의 전파와 변천 |
| 그림 1 조반니 바티스타 란제티(Giovanni Battista Langetti),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1670년께. 정복왕 알렉산더와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만남을 묘사했다 |
벌거벗은 노인과 갑옷을 입은 젊은 남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낡은 담요를 허리에 두른 노인의 차림과 화려한 문양이 아로새겨진 갑옷을 입은 젊은 장군의 차림이 대조를 이룬다. 젊은이가 노인에게 뭔가를 말하려 하는데, 노인은 펼쳐진 책을 가리키며 거부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예상하듯 이 그림은 정복왕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만남을 묘사한 것이다. 작품에는 두 인물이 조우했던 기원전 4세기의 모습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근대 초 유럽의 지식혁명은 백지 위에서 시작됐다 |
⑲ 종이와 책의 전파와 변천
그림 1은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란제티(Giovanni Battista Langetti)가 1670년께 그린 작품이다. 그는 마치 두 인물에만 강한 조명이 비치는 것처럼 작품을 그렸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화가 카라바조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이 느껴진다. 알렉산더가 권좌에 오른 후 자신을 축하하러 오지 않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몸소 찾아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햇빛을 가리니 비켜 달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사물이 무엇인가에 있다. 정답은 바로 책이다. 디오게네스가 가리키고 있는 책은 사각형의 얇은 종이를 가지런히 모아 한쪽 모서리를 고정한, 오늘날 가장 흔한 ‘코덱스(codex)’라는 책 형태를 보여준다. 화가는 그의 깊은 지식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두꺼운 책을 펼쳐놓았다. 그 뒤로 다른 책도 보인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는 이런 형태의 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에서 제작된 벽화를 보자(그림 2).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잿더미에 묻힌 해가 79년이므로, 이 벽화는 그 이전에 제작된 게 분명하다. 주인공이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당시의 책이다. 밀랍을 칠한 나무판을 서너 겹 묶은 ‘밀랍판(wax tablet)’이다. 오른손에는 ‘스틸루스(stylus)’라 불리는 뾰족한 필기구가 들려 있다. 그리스인들이 밀랍판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기원전 8세기라고 역사책은 전한다. 이 밀랍판이 코덱스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파피루스로 책 만들어
그렇다면 디오게네스는 어떻게 생긴 책을 읽었을까? 코덱스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두루마리(scroll) 형태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두루마리 책은 제작과 보관이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글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해서 중간의 특정 지점으로 바로 찾아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한 코덱스가 나타나기까지 두루마리 책은 인류와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스인들이 두루마리 책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주로 이집트산 파피루스였다. 나일강변에 야생하는 갈대 줄기를 얇게 잘라 가로 · 세로로 겹친 후 두들기고 건조시켜 제작했다. 분명히 디오게네스는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 책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추가 100%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parchment)도 오랜 기간 인간이 사용해 온 재료였다. 디오게네스의 책은 양피지로 제작된 것이었을까? 양피지는 기원전 3세기 페르가몬에서 개발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파피루스의 공급이 부족해져 가격이 급등하자 대응책으로 양피지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부터 기원전 3세기 이전에는 파피루스가 책을 만드는 주요 소재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짐승 가죽에 글을 쓰는 건 드물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에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에 이런 글쓰기가 자주 이뤄졌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디오게네스의 책이 양피지로 만든 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파피루스로 만들었건, 양피지로 만들었건 간에 디오게네스가 읽은 책이 두루마리 형태였음은 분명하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 유럽인들 사이에서 그리스 시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는 했지만, 그리스 책에 대해서는 17세기 화가에게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 ▲ 그림 3 한대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 간쑤(甘肅)성에서 출토. | 종이책을 유럽인이 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최초의 종이는 중국 후한의 채륜(蔡倫)이 105년께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나무껍질과 낡은 그물 등을 원료로 하여 얇고 가벼운 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무를 이용한 기존의 목간(木簡)이나 죽간(竹簡)에 비해 관리하기 쉽고, 비단을 이용한 백서(帛書)에 비해 값이 싸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채후지(蔡侯紙)’는 인기가 컸다. 그림 3은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종이다. 한대에 만들어진 이 종이는 표면이 거칠고 불규칙한 초기 종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이, 당나라 때 세계로 퍼져
한동안 동아시아에서만 사용됐던 종이가 더 넓은 세계로 알려진 것은 당나라 때였다.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를 장악할 목적으로 7세기에 당 태종은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8세기에는 힌두쿠시 산맥 부근까지 깊숙이 진격했다.
그러나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교를 매개로 응집력을 강화한 아랍인과 투르크인도 8세기 초 사마르칸트를 점령하면서 실크로드의 통제권을 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새로 발흥한 압바스 왕조와 당 왕조의 군대는 751년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위치한 탈라스에서 한판 대결을 벌였다.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이끄는 보병 중심의 당 군대는 기병 중심의 이슬람 군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종이 제작 기술을 가진 당 병사들이 사마르칸트에 포로로 끌려가 제지공방을 만들게 되면서 기술이 이전됐다.
그 후 제지술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전파됐다. 793년에는 바그다드에서, 900년에는 이집트에서, 1085년에는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종이가 생산됐다. 제지 기술은 더욱 발달했고, 책을 제작하는 기술도 개량됐다. 십자군전쟁을 거친 후 제지술은 유럽 전역으로까지 확산됐다. 1190년에 프랑스에 상륙한 제지술은 13세기에 이탈리아로, 그리고 14세기에 네덜란드와 독일 지역으로 소개됐다. 유럽의 나머지 지역들도 대부분 16세기 말까지는 종이를 생산하게 됐다.
활판 인쇄술,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
1440년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제 활판 인쇄술이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였다. 성직자의 역할을 중시하는 구교와 달리 신교는 개인이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신의 뜻에 접근할 것을 강조했다. 이런 신교의 교리가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과거보다 값싸게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의 등장이 중요했다. 그러나 새 인쇄술만으로는 인쇄물의 생산비를 대중이 구입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출 수 없었다. 고가의 양피지를 대신해 값싸고 튼튼한 종이가 공급돼야만 했다. 1500년까지 유럽에서 10개국 이상의 언어로 5만 종의 인쇄물이 2000만 권이나 발행될 수 있었던 데에서 수백 년에 거쳐 유럽에 전파된 중국 원천기술의 공이 컸다. 이후 유럽에서 진행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바로 이 토대에서 출발했다.
인쇄물 대량생산으로 지식 대중화돼
종교개혁 이후 신교가 들어선 지역은 구교 지역에 비해 빠른 경제성장을 보였다. 그 이유를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신교의 교리가 개인의 영리 추구에 더 잘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종교적 가르침의 차이보다 신교 지역에서 사람들의 문해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종이와 새 인쇄술이 결합해 종교적 · 비종교적 인쇄물을 대량 생산하게 되자 글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열망이 고조됐다. 많은 사람이 교육에 힘을 쓰게 되었고, 그 결과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이 대중화됐다는 것이다. 백지장에서 시작된 이 ‘지식혁명’이 경제적 진보를 낳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높다. 결국 경제발전은 구성원들의 두뇌로부터 나오는 게 아닌가.
- 중앙선데이 | 제409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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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8. 산타클로스 이미지의 상업화 |
| 그림 1 성 니콜라우스를 그린 이콘(왼쪽)과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코카콜라 광고. 과묵하고 진중한 인상의 니콜라우스와 호탕하게 웃는 산타클로스가 대비된다. [사진 코카콜라] |
두 개의 그림이 있다. 그림 1의 왼쪽 그림은 동방교회의 이콘으로, 한 성인을 묘사하고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 넓은 이마, 짙은 피부색, 짙은 턱수염을 지닌 이 인물은 4세기에 살았던 성 니콜라우스다. 과묵하고 진중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쪽 그림은 20세기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다. 뚱뚱한 체격에 발그스름한 혈색을 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낯익다. 그런데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다. 어떻게 성 니콜라우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현대 세계에 등장했을까? 산타, 자선 베푸는 성인에서 대중소비 아이콘으로 |
⑱ 산타클로스 이미지의 상업화
성 니콜라우스는 4세기에 활동한 성직자로 오늘날의 터키에서 태어났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해 삼위일체설을 기독교의 정통이라고 결정하는 데 참여한 주교 가운데 하나였다. 교리를 둘러싼 입장보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그가 생전에 보여준 수많은 자선활동이었다. 지참금이 없어 사창가에 팔려갈 위기에 처한 세 처자를 위해 몰래 금화주머니를 전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선행으로 꼽힌다. 그의 선행이 무척이나 다양했던지 훗날 그는 선원, 궁수, 전당포업자, 그리고 어린이의 수호성인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산타클로스 모습의 전형 이다. 콜라를 여름에만 팔리는 음료가 아니라 사철 음료로 재탄생시키려는 기업 전략에 따라 1931년에 광고회사 다아시(D’Arcy)가 기획하고 선드블럼(Haddon Sundblum)이 그림을 그려 제작한 광고 시리즈였다. 이 광고 시리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거기에 등장한 마음씨 좋게 생긴 혈기 넘치는 뚱보 할아버지의 모습이 소비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진 것이다. 선드블럼이 그린 산타클로스는 오늘날까지도 경쟁자 없이 거침없는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사슴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차가운 겨울 밤하늘을 가로질러 착한 아이들이 사는 집에 굴뚝을 통해 들어가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주는 산타클로스는 세계인이 공유하는 통일된 이미지다. 크리스마스를 더운 계절에 맞이하는 남반구나 저위도 국가들에서도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성 니콜라우스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풍채 좋은 산타클로스로 변신한 것일까? 먼저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문화가 영향을 끼쳤다. 중세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에 유럽의 게르만족들은 다양한 겨울 축제를 즐겼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율(Yule) 축제였다. 추운 겨울에 유령의 무리가 밤하늘을 뚫고 행진을 하는데, 무리를 이끄는 이는 오딘(Odin)이라는 이름의 신이다. 이 신은 긴 턱수염에 망토를 입고서 회색 말들이 끄는 탈것을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중세 초기에 유럽 전역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오딘의 모습이 전파돼 오늘날의 산타클로스와 부분적으로 비슷한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됐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인 12월 6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관습이 굳어졌다.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인 크리스마스는 4세기 이래 12월 25일에 기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축하 만찬은 더 화려해졌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축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을 받았다. 중세 후반 종교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마르틴 루터는 아이들이 선물 받는 날로 성 니콜라우스 축일 대신 크리스마스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성공회를 도입한 영국에서도 성 니콜라우스 축일을 더 이상 중시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판 산타클로스인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가 12월 25일에 등장하는 것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인물이 여럿이다가 점차 성 니콜라우스에 기초한 신터클라스(Sinterklaas)로 통일되어 갔다.
하지만 산타클로스가 결정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은 미국에서였다. 1624년 네덜란드의 이주민들이 미국 북동부의 한 해안지역을 정착지로 삼고서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했다. 1664년 이 지역을 점령한 영국인들은 뉴욕으로 개명을 했다. 이곳에서 정착한 네덜란드계와 영국계 이주자들은 자국에서 들여온 크리스마스 풍습을 받아들여 혼합된 문화를 만들어 갔다. 산타클로스라는 이름도 네덜란드의 신터클라스가 미국식으로 발음이 변형되어 생겨난 것이었다.
| 그림 2 토머스 내스트 ‘산타클로스의 방문(1872년)’. 빨간 모자가 아니라 화환을 쓰고 있다. | 19세기를 거치면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졌다. 1823년 미국인 클레멘트 무어(Clement C. Moore)가 지은 ‘니콜라우스의 방문’이라는 시(詩)가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그에 따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클로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풍습이 퍼졌다. 그렇지만 산타클로스의 전형이 갖춰진 것은 19세기 중반 독일 출신의 삽화가 토머스 내스트(Thomas Nast)에 의해서였다. 내스트는 1863~86년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32장 그려서 인기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실었다. 그림 2는 그가 1872년에 그린 작품이다. 뚱뚱한 몸매에 흰 턱수염이 가득하고, 흰털을 덧댄 빨간 외투를 입고 있다. 굴뚝으로 들어와 아이들이 걸어놓은 양말 속에 선물을 남기는 인물로 산타클로스가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와 다른 유일한 차이점은 빨간 모자가 아니라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화환을 머리에 쓰고 있다는 것뿐이다.
| ▲ 그림 3 1858년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산타클로스의 모습. 수염이 없는 게 이채롭다 | 1858년 같은 잡지에 실린 산타클로스의 모습(그림 3)은 사뭇 달랐다. 이 산타클로스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낯선 복장을 하고 있으며, 칠면조가 끄는 썰매를 타고 있다. 내스트의 그림이 나오기 불과 5년 전까지도 이렇게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다양했다. 산타클로스의 표준 초상이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내스트의 손끝에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와 크리스마스가 상업화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1875년에는 영국에서 먼저 제작되었던 크리스마스 카드가 미국에 도입되었다. 크리스마스 카드의 상업적 잠재력을 인식한 독일 이민자 출신의 루이스 프랑(Louis Prang)은 매사추세츠에서 수백 명의 종업원을 고용, 카드를 대량으로 제작해 판매했다.
한편 백화점들은 화려한 전구 장식으로 사방을 장식하고서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영국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이 상징하듯이 가족이 모여 오붓하게 지내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는 빅토리아시대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형태로 전환된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 경제와 문화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산타클로스도 세계적 유명세를 탔다. 새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필리핀에서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빨간 외투의 산타클로스가 등장했으며 서구 문화와 거리가 먼 태평양 도서국가의 아이들도 선물을 받으려고 양말을 내걸었다.
마침내 1931년 코카콜라의 역사적인 산타클로스가 등장했다. 때는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창 짙어지던 시절이었다. 선드블럼이 그린 산타클로스의 호쾌한 표정은 전통적인 비수기인 겨울철에 콜라의 소비를 급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불황과 실업으로 짓눌린 마음을 잠시나마 풀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이렇듯 시대적 분위기를 잘 잡아낸 덕에 코카콜라의 산타클로스는 전설적 광고의 반열에 올랐다.
자선의 정신을 상징했던 동로마의 성 니콜라우스는 비기독교 풍습과 신교적 문화의 영향을 받고서 산타클로스로 변신했고, 미국에서 본격적인 상업화를 거친 후 다시 전 세계로 전파돼 대중소비의 아이콘이 되었다. 세계화는 진로를 미리 예상하기 힘든 참으로 길고도 복잡한 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 중앙선데이 | 제406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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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7. 감자 흉작이 초래한 대기근과 해외 이민 |
| 그림 1 어스킨 니콜(Erskine Nicol) ‘밖으로(Outward Bound)’(1854).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담벼락에 있는 뉴욕행 여객선의 광고를 보는 모습 |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멘 채 서 있다. 낡고 찌그러진 모자와 곳곳이 해진 외투가 눈에 들어온다. 사내는 허름한 담벼락에 붙어 있는 벽보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그는 무엇을 읽고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
수백만 아일랜드인의 운명을 바꾼 ‘악마의 감자마름병’ |
⑰ 감자 흉작이 초래한 대기근과 해외 이민
화가 어스킨 니콜(Erskine Nicol)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스무 살 때인 1845년부터 5년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살았다. 이 기간은 아일랜드에 전례 없는 대기근이 발생해 엄청난 수의 사람이 고통을 겪던 때였다. 니콜은 이후 자신이 목격한 아일랜드인들의 고난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1은 ‘밖으로(Outward Bound)’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벽보를 보면 우선 뉴욕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주인공은 뉴욕으로 향하는 여객선의 광고를 살펴보고 있다. 오른편 배경에 보이는 건물은 더블린에 위치한 세관이다. 남자가 있는 곳은 바로 더블린의 부둣가다. 벽보를 자세히 보면 선박회사 이름이 ‘샴록라인(Shamrock Line)’ 임을 알 수 있다. 샴록은 클로버의 잔가지를 지칭하는데, 이것도 아일랜드와 관련이 깊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패트릭(St Patrick)이 5세기에 대중에게 삼위일체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세 잎 클로버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와 훗날 샴록은 아일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고소득층은 밀빵, 저소득층은 감자
이제 그림의 맥락이 분명해졌다. 가난에 찌든 아일랜드 사내가 새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까? 화가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보이고 싶었는지 사내의 손에 주화 한 닢을 들려주었다. 낯선 이역만리로 떠나는 뱃삯을 마련하는 것조차 힘들 만큼 가난이 깊었다고 말하고자 했으리라.
이 시기에 아일랜드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여온 감자로부터 시작된다. 1570년께 유럽에 처음 들어온 감자는 곧 서유럽과 중유럽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감자는 척박한 토양과 습한 기후에서도 잘 자랐고, 쟁기와 같은 농기구 없이 삽만 가지고도 경작이 가능했다. 장기간 보관하기도 쉬웠고 오븐이 없어도 쉽게 조리할 수 있었다. 영양학적 측면에서는 괴혈병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우유와 함께 섭취해 칼슘과 비타민A를 보충하면 영양상의 균형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감자의 인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천한 계층의 식량’ 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심지어 감자를 ‘악마의 식물’ 로 여기기도 했다. 감자는 표면이 거칠고 마맛자국 같은 홈이 나 있고 모양이 불규칙했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대단한 성장력과 번식력을 보였다. 이런 속성이 감자를 불경스럽고 위험한 작물로 보게 했다. 그래서 고소득층은 희고 고운 밀빵을 소비하고, 중소득층은 검은 호밀빵과 오트밀 죽을 찾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저소득층만 감자를 식량으로 삼는 계층 분화가 발생했다.
유럽에서 저소득층이 대표적으로 많았던 아일랜드에서 감자가 널리 퍼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일랜드는 1801년부터 통합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의 일부로 통치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잉글랜드의 직간접적 영향하에 놓여 있었다.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지대를 받아갔는데, 18세기를 지나면서 중개인(middleman)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중개인은 지주에게 고정된 지대를 내고 농지를 임차한 후 이를 작은 단위로 쪼개 농민들에게 높은 지대를 받고 재임대해 이득을 챙겼다. 대지주들은 중개인에게 경지 관리와 지대 수취를 일임하고, 자신이 소유한 경지를 거의 찾지 않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잉글랜드에 사는 부재지주(不在地主)였다,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지대는 점점 높아졌고, 이를 납부하지 못한 농민은 땅에서 쫓겨났다.
이런 여건에 있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는 안성맞춤의 식량이었다.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고, 잦은 관리가 요구되지 않으며, 조리가 간편한 감자는 가난한 가정으로 파고들었다. 상당수의 아일랜드인은 봄에 텃밭에 감자를 심고 잉글랜드로 떠나 날품노동자로 일하다 가을에 돌아와 감자를 수확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집안 경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1840년대에 아일랜드 인구의 40%가 감자에만 의존해 살았고, 한 명당 연평균 1t이 넘는 감자를 소비했다고 한다.
| 그림 2 로버트 시모어 ‘부재자’(1830). | 전체 인구 10% 굶어 죽어
1830년에 발표된 그림 2는 아일랜드의 경제상황을 잘 보여준다. 로버트 시모어(Robert Seymour)는 ‘부재자’ 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부재지주를 묘사했다. 음악과 음식이 넘치는 실내에 주인공 남자가 여인과 함께 앉아 있다. 창밖으로는 나폴리 항구와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해외에서 만끽하는 풍요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마음은 편치 않다. 아일랜드에서 굶어 죽어간 농민들의 환영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의 불기둥이 불길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1845년 ‘감자기근’ 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아일랜드인들은 만성적인 빈곤과 간헐적인 기근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그림 3 조지 프레데릭 와츠 ‘아일랜드 기근’ (1850). | 1845년부터 유럽 전역에 감자마름병이 휘몰아쳤다. 아일랜드의 타격은 엄청났다. 병에 걸린 감자는 식물 전체가 검게 썩어 문드러졌고 그 자리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났다. 이듬해에도, 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감자마름병은 맹위를 지속했다. 감자 생산이 격감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신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양 부족으로 허약해진 몸속으로 콜레라와 발진티푸스가 침투했다. 사망자 수는 속절없이 늘어갔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숨진 인구가 무려 100만 명에 이른다고 추계한다. 전체 인구의 10%를 훨씬 넘는 수치였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의 그림 3은 절망과 비탄으로 가득했을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타 들어가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대재앙에서 목숨 건진 사람들 미국으로
이 대재앙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영국 정부는 기근 초기에 즉각적으로 구호에 나서지 않았다. 식량 배급은 지연되었고, 공공취로사업은 성과가 미미했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정부는 아일랜드산 농산품이 외부로 수출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이외에 많은 작물이 재배되었지만 구매력을 갖지 못한 아일랜드인들은 식량이 외부로 반출되는 모습을 허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호업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은 찰스 트레블리언(Charles Travelyan)은 기근이 나태한 아일랜드인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발언했다. 역사적으로 세계의 수많은 기근 사례가 보여주듯이 아일랜드에서도 기근의 근본적 원인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식량이 돌아가지 못하는 배분 시스템에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들에게도 미래는 어두웠다. 많은 지주가 지대를 내지 못하는 농민들을 가차없이 추방했다. 그래야 납부할 세금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방된 이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더 멀리 미국과 캐나다 · 호주로 이민을 떠나는 숫자도 급증했다. 기근 기간에 연평균 25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구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이민선의 환경은 무척이나 열악해 ‘관선(棺船 · coffin ship)’이라는 별명을 얻을 지경이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는 이들로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신세계 인구에서 아일랜드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대량 이민의 결과였다.
- 중앙선데이 | 제403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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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 | 16. 콘스탄티노플 함락 |
| 그림 1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 ‘해외여행’, 1455년. 콘스탄틴노플이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이슬람군대에 포위된 모습. | 1453년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 수도로 삼은 콘스탄티노플은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의 중심 도시로 오랜 번영을 누렸다. <그림 1> 에서 삼각형의 푸른색 성곽으로 둘러싸인 이 기독교(동방정교) 천년고도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이슬람군대에 포위돼 있다. 육지 쪽으로는 오스만 육군이, 바다 쪽으론 해군이 둘러싸고 있다. 곧 있게 될 전투가 세계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게 되리란 사실을 어느 측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 오스만군대를 승전으로 이끈 비결을 찾을 수 있을까? |
비잔틴 천년제국의 최후 전투, 세계 경제를 뒤흔들다 |
⑯ 콘스탄티노플 함락
메흐메트 2세는 ‘정복자(Fatih)’라고도 불린다. 그는 스스로를 시저나 알렉산더를 뛰어넘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이런 자부심은 그가 이룬 세계사적 업적에 기초한다. 메흐메트 2세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역사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의 수도이자 기독교 세계의 중심 축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경제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그의 손에 의해 이슬람 세계의 일부가 됐던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 (Bertrandon de la Broquiere)라는 인물이고, 제작연도는 역사적 전투가 끝난 지 불과 2년 뒤인 1455년이다. 화가는 부르고뉴 공작인 필리프 선량공(Phillippe le Bon) 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향사(하급 귀족)였다. 필리프는 백년전쟁에서 영국군과 동맹을 맺고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영국군에 넘겼던 인물이다. 베르트랑동은 1432~1433년 중동으로 성지 순례를 나서 기독교 및 이슬람 도시들을 방문하고 술탄에서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의 손에 넘어간 직후 필리프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해외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저술의 목적은 무슬림 손에 넘어간 콘스탄티노플을 되찾기 위한 새 십자군운동을 기획하는 데 있었다. 이런 까닭에 베르트랑동은 역사책에서 스파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을 반영해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오스만제국의 군사전략이 공들여 묘사돼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외부에서 군사적으로 공략하기 힘들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곽이었다.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건설한 이 성곽은 1024년 십자군에 의해 한 차례 함락됐을 뿐 10여 차례의 공성전을 막아 천년제국을 지켜낸 막강한 방어막이었다. 비잔틴군은 이 성벽을 더욱 보강해 놓고 이슬람군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철통방어의 둘째 요인은 위쪽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아래쪽으로 뻗은 긴 물길, 그림에서 왼편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골든 혼(Golden Horn)’이라 불리는 수로였다. 이 물길의 양 끝을 육중한 나무 구조물과 쇠사슬을 이용하여 봉쇄해 놓으면 침략군은 이 도시를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방어체계를 메흐메트 2세의 군대는 어떻게 뚫을 수 있었을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오스만군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아래쪽 금빛 막사 뒤로 포병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오스만군대가 자랑하는 초대형 대포가 시선을 끈다. 성곽의 파괴는 이 대포가 맡았다.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 우르바노스를 영입해 포신이 8m를 넘고 450㎏짜리 돌덩이를 1.5㎞ 이상 날릴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대포를 제작했다. 이 포는 사용 중 파열되고 말았지만 오스만군의 최신 대포들은 방어벽을 타격하기에 충분했다.
골든 혼의 방어막을 극복하기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더욱 획기적인 작전을 고안했다. 보스포루스해협의 전함을 육지를 통해 골든 혼으로 끌어오는 방안이었다. 땅 위로 2㎞에 가까운 목재 레일을 깔고, 그 위로 60~80척의 전함을 운반해 골든 혼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편으로 육지에서 선박을 이동시키고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 베르트랑동이 군사전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인식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도 약점은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건축물들이 모두 서유럽에 많았던 고딕양식으로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건축양식은 스파이 화가의 관심이 아니었나 보다.
| 그림 2 파우스토 조나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는 메흐메트 2세’, 1908년. |
오스만군의 골든 혼 공략 전술은 20세기 초에 제작된 다른 작품에 묘사돼 있다. 그림 2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오스만제국의 궁정화가로 활약했던 파우스토 조나로 (Fausto Zonaro)가 그린 작품이다. 술탄의 요청으로 제작한 이 그림에서 메흐메트 2세가 선박 이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총 57일에 걸친 공성전 끝에 메흐메트 2세의 군대는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군대는 오스만제국의 전통에 따라 3일간에 걸쳐 도시 전역에서 약탈을 벌였다. 술탄은 3일째 되는 날 약탈 종료를 선언했고, 곧바로 도시를 재건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 역사적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 오스만제국의 새 수도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유럽의 무역을 주도해 번영을 구가해 왔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경제적 번영의 근간인 동방무역, 즉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향신료 · 직물 · 도자기 등을 유럽 전역에 판매해 이익을 얻는 무역활동이 전면적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동방과의 교역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한데, 이교도와의 접촉을 못마땅해하는 교황청의 매서운 눈길도 부담스러웠다. 결국 베네치아는 무역강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오스만제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그 방법은 가급적 교황청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고심 끝에 짜낸 아이디어가 바로 저명한 화가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술탄의 환심을 사게 하는 것이었다.
| 그림 3 메흐메트 2세의 두 초상화. 1480년께 |
| ▲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오토만 제국 황제.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초상화(1480년). |
그림 3은 1480년께 그려진 메흐메트 2세의 두 초상화를 대비시켜 보여 준다. 첫째 그림은 터키풍으로 그린 초상화로, 장미꽃을 들고 향기를 맡는 전통적 포즈로 묘사돼 있다. 둘째 그림이 벨리니의 작품으로,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술탄의 모습을 화려하고 중후한 장식 안에 배치시켰다. 현대 외교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화외교의 중요한 선례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전략을 통해 베네치아는 동방무역을 주도하는 유럽의 경제 중심지라는 지위를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부신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가 추세적 쇠락이란 역사적 운명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이 동방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상황을 수세기 동안 지켜본 유럽의 군주들은 아시아로 통하는 새 교역로를 개척하려는 야망을 키워 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이 야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군주들로부터 후원을 약속받은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새 항로의 개척이라는 벤처사업에 몸을 던졌다. 이들의 성공 소식은 곧 다른 나라 군주와 탐험가들을 자극했고, 머지않아 유럽의 상인들이 장거리 무역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우위를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영향은 메흐메트 2세가 생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흘렀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게 됐고, 결국 이것이 세계의 경제적 · 기술적 · 군사적 무게 추를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는 실로 승자가 패자로 되고 패자가 승자로 바뀌는 반전의 연속이다.
- 중앙선데이 | 제400호 |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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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 · 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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