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도일 스님은 “도는 어떻게 닦는 것인가”를 묻는 한 스님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도는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다시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것은 성문의 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면 그는 그냥 범부일 뿐이다.”
도를 닦는다 함은 수행을 말합니다. 아마도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목숨 걸고 수행해야 하고, 수행만이 살 길이라는 말도 듣곤 했습니다. 3,000배며, 1만배 절 수행을 하거나,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좌선을 이어가거나, 금강경 7독씩 매일 독송을 하고, 대비주를 100독 이상 독송하는 등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오던 수행은 이처럼 끊임없이 혹독한 수행을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좌절감을 맛봅니다. 수행을 잘 하는 사람 앞에서 위축되기도 하고, 수행을 못하고 근기가 낮은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상대방과의 비교 속에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수행을 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며, 타인과의 비교나 차별을 여의기 위해 하는 것인데, 오히려 수행 때문에 괴로워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 불자님들 또한 자신이 3천배를 몇 번 해 보았고, 화두 수행을 몇 년 동안 했으며, 어떤 삼매를 맛보았다는 등의 자기 과시적인 수행 이야기를 드러내곤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수행이란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남들보다 더 잘한다거나 더 못한다는 이 양 변의 극단적인 생각은 지금 이 순간부터 완전히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망상이고 차별심일 뿐 전혀 불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닙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닦는다는 작위적인 노력을 통해 없는 것을 얻어 가진 것이므로 언젠가는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는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 도는 어떤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얻어 가질 수 있는 어떤 물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나 법이나 도가 특별한 경지의 어떤 대상이라면 노력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대상이 아닌 것을 어떻게 노력으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도가 만약 닦아서 얻는 것이라면 더 잘 닦는 사람과 잘 못 닦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도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잘 하고 못 하는 차별이 없습니다. 도는 누가 더 잘 닦는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행은 무슨 운동선수나 학교 시험 같은 것이 아니어서, 더 열심히 한다고 빨리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도는 성취하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얻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새롭게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지만, 확인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그렇게 있었음을 다만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조스님은 이어서 “어떻게 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이와 같이 답변하고 계십니다.
“자성은 본래 그대로 완전하다...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데 막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를 수도인이라 할 수 있다.”
도는 없었던 것을 새롭게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렇게 본래 그대로 완전하게 구족되어 있는 것을 다만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선이니 악이니 하고 둘로 나누어 분별하고 차별하는 망상심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도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망상 분별심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인 것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도나 깨달음이나 수행에 대한 편견에서 놓여나시기 바랍니다. 수행을 잘 하고 못하는 것으로 나누고, 남들 보다 수행을 더 잘하려는 생각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임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하게 온갖 망상과 생각이 만들어내는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잘한다느니 못한다느니, 좋다느니 싫다느니, 내 편이니 네 편이니 하는 그 모든 분별망상의 차별심들에 끌려가지만 않을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마조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법을 설하고 계십니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 무엇이 물듦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여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듦이다.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인위적인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으며, 끊어지거나 항상함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도는 닦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마조스님의 표현에 의한다면 “자성본래구족” 즉 “자성은 본래 그대로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금 이대로 우리는 본래로 구족해 있는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닦을 것이 없습니다. 이미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물들어 있습니다. 물든다는 것은 마조스님의 설명처럼 곧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사심, 생멸심으로 무언가를 조작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생사심, 생멸심이라고 하지요. 이 인연 따라 바람처럼 오고갈 뿐인 허망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무언가를 조작하고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더 많이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며,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고,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어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행복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성공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기준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기준에 잘 들어맞을 때는 즐거워하는 허망한 생사심의 놀이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해 온 모든 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처럼 물드는 짓을 해 온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수많은 것들을 조작해 온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도는 바로 평상심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재라는 삶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물들지 않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 현실이 그대로 도인 것입니다. 머릿속 생각으로 온갖 망상과 분별, 차별과 해석들, 판단과 관념들을 조작해 놓지만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실 그 자체는 그대로 도입니다. 배 고플 때 밥 먹고, 목이 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자는 이 단순한 매 순간의 평범한 현실이야말로 고스란히 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 고플 때 단순히 밥 먹는 도를 실천하지 못한 채 물들어 버립니다. 곧바로 생각을 가지고 조작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배 고플 때 그저 밥 먹을 뿐이면 되는데,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애쓰고, 남들과 비교해서 더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하고, 미래나 노후에 먹을 것 까지 저장해 놓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욕심을 부리는 망상을 조작해 내느라 단순하게 먹기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졸리면 자면 될 것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자야 한다거나, 오늘 많이 못 잤기 때문에 내일은 피곤할거라고 예상하고, 남들보다 더 적게 자고 더 많이 노력해서 성공한다는 관념 등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스스로 만든 관념에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단순한 평상심이라는 도를 실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망상과 분별, 조작하고 물드는 마음만 없다면 그 자리가 바로 도라고 마조선사는 이야기 합니다.
즉 평상심이란 인위적인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며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지 않고,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이 없으며, 옳은 것은 붙잡아 집착하고, 그른 것은 싫어하거너 거부해버리는 이 양 극단의 치우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재라는 삶 위에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과도하게 싫어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도록 허용합니다. 인위적으로 붙잡거나 밀쳐내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평상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삶에는 부처나 중생도 없고, 도와 도 아님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도 없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구족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할 일이 없고, 아무런 판단도 없기에 언제나 여여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물듦이 없고 조작이 없고 분별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첫댓글 헷갈린다는 것 자체가 생각으로 하는 거다. 생각을 내려놓아라. /평범하게 살고 싶다 하는 것 또한 나를 틀 안에 가두는 것이다. /당당하게 맞서고 깨지고 또 깨지라는 말씀을 내내 새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물듦이 없고 조작이 없고 분별이 없다면 당 신은 누구입니까?'
감사합니다~ 스님! _()()()_
"이 단순한 매 순간의 평범한 현실이야말로 고스란히 도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현재라는 삶 위에서 오롯이 지켜보고 깨어있기만 하면되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모든것이 흘러가도록 허용합니다"
이 자연스러운 평상심을 마음에 담아갑니다.
수용합니다 ()
감사합니다 ()
사랑합니다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마음에 담아갑니다_()()()_
_()_
감사합니다 _()__()_()_
道無對無稱 有對非道 有稱亦非道 道無常道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오는인연 막지말고 가는인연 잡지말라는 말씀이 이제서야 조금은 내안에 들어오네요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인연을 수용합니다
나와 남을 용서하겠습니다
모든 경계는 나의 영적성장을 돕는일이니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우주의 메시지를 매순간 실천하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맘에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떠오르는 망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허상덩어리를 근심걱정거리로 만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현재를 바라보라는 것이지죠?! 스님
감사합니다
이게 유지가 어려워요. 마음에 끌려다니지 말아야지, 하고 올곧게 서다가도 금새 무너지곤 합니다. 나하고 싸우지도말라시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살으라하셨는데, 이게 수행으로 가능한가? 의구심도 들지만, 반드시 가능하게 해내고싶어요
옴 마니 반메훔 ()()()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좋은 말씀 잘 받아 놓겠습니다()
현실은 번뇌와 망상에 연속일뿐 평상심을 잡을수가 없네요. 노력하는 수행의 삶을 위해 비우도록 힘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단어들을 여기 와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읽고 또 읽어도 좋네요.
물들지 않는다..휘둘리지 않는다..바깥 경계 보다 내 안의 참된 존재에 더욱 가깝다..'업'의 결과인 '보'를 겸허히...그저 감사히 수용하며..지금 이 순간에 맞이하는 모든 상황,느낌,사람을 받아들이는것...그게 이치에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완벽한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힘들면 힘든대로,,즐거우면 즐거운대로..모두다 완벽한 것입니다..집착하고 거부할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냥 통째로 받아들이십시오..완전한 흐름을 느끼십시오..내 안이 변화되어 굳건해짐을 느끼실겁니다..그렇게 안으로 안으로 치닫다 보면..언젠가는 바깥 경계에 무뎌져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겠죠?...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물듦이 없고 조작이 없고 분별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는 성취하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확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라~
내 생각과 내 관념으로 내 발목을 잡지말고 온전히 느껴라~
할 수 읶을 듯 하지만 할 수 있으려나 싶어요. 이 또한 저의 생각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