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 지리산 애가(哀歌) -
서주마을 땅속에 묻다
- 민 수호
긴긴 세월 71년이나 흘렀어도
마음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있는
700여 억울한 영령들의 숨 거두는 소리가
환청으로 생생하다
세월 보따리에 아무리 묶고 짜매 두어도
한숨 쉬는 보따리 세월에 헐렁헐렁 낡았어도
산청 함양 거창 사건 총소리는 살아서 움직이고,
엄니께 전해 들은 역사, 뒤적거린 역사로
하늘과 땅은 양심이 있으니 울퉁불퉁하다
주름살 같은 계곡 지리산 그늘
서주리 마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라만 바라보며 한숨으로 세월이다
산자의 도리라고 해봤자 훌쩍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억울한 피를 쏟은 서주마을에
통으로 땅속에 묻고 또 맘속에 묻는다
추모하는 남들은
“님들”이라 불러주는 허무한 거품이여~~
* 서주마을: 1951년 2월 7일 국군이 산청 함양 사건의 4개 지역 학살 현장 중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 필자는 여기서 생후 10개월의 어린아이로 생존한 지역임.
*민수호 : 청옥문학으로 등단, 작품집 '지리산 메아리' 등 다수, 수상으로 '충열문학상', '청옥문학 대상', '천성문학상' 등
부두는 몹시 혼잡했다. 미국에서 출발하여 어제 도착한 군수품을 실은 배 앞으로 해상 크레인과 지게차 그리고 우리 측에서 수배한 특수화물차, 25톤 트레일러, 일반 화물차들이 빼빽이 들어서 있었다.
오전 8시 정각이었다. 나는 운송에 필요한 서류와 각종 증명서, 호송 관련 서류를 들고 도크 맨 앞에 서 있었고, 옆에는 세관 직원 몇과 군 관계자 여럿 그리고 그들이 몰고 온 트럭, 지프가 있었고 특별히, 무산 시에 주둔하는 헌병대 사령부에서 보내 준 헌병과 그들이 타고 온 지프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선사 총괄팀장이 직접 내려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정오가 채 되지 않아 군수품을 목적지에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이제 K 관세사에서 유희가 통관서류만 챙겨 오면 끝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도크 끝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멀리 승용차 한 대가 들어서더니 차는 돌아가고 유희만 내렸다.
목적지는 남도의 ‘내나로도’였다. 나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모두 각자의 차에 올랐는데, 서류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유희가 보였다. 원래는 K 관세사 측도 승용차를 준비하여 별도로 운행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녀를 싣고 온 차는 돌아가 버려 그녀는 어떤 차를 탈지 결정을 못 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날 발견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불편했지만 그녀와 나는 군수품 핵심 부품을 실은 특수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운전사와 나 그리고 그녀가 순서대로 앉았다. 헌병 호송차가 선두에 서고 내가 탄 특수 트레일러가 뒤를 따랐다. 이어 뒤편으로 군 관계자의 트럭과 나머지 부품을 실은 트럭이 줄을 이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운전사도 있고 해서 쉽지 않았다. 그저 일상적인 업무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 차가 도심을 빠져나가자마자 잠이 들고 말았다. 어제 한수와 늦게까지 술을 마셔 몹시 피곤한 탓이었다. 한참을 가다, 잠결에 눈을 떠보니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정자세로 고쳐앉았는데, 그때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인수인계를 끝내고 나니, 오후 8시가 훌쩍 넘었다. 그쪽 군기지에서 내일 아침 최종점검을 위해 관련자들의 숙소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식당에서 늦은 만찬이 시작되었다. 군 당국 책임자와 관련자들 그리고 선사 책임자, 세관 직원 그리고 운송업체 호송책임자인 나와 K 관세사 측 그녀. 단출한 식구였으므로 식사자리는 편했다. 이윽고 밤 10시가 되자 군 측에서는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끼리 방을 배정했다. 그녀는 세관 여직원과 한방을 쓰게 되었고 나는 선사 책임자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몹시 피곤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 그날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방에 가자마자 간단한 샤워를 마친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숙소에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군기지 앞의 바닷가에서 전화를 받았다.
“왜 거기 있어?”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하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파도 소리가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요! 이리로 올래요?”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 나는 그간의 서먹함과 불안을 떨쳐내고 바닷가 쪽으로 달렸다. 해변은 아름다웠고 밤하늘의 달도 밝았다. 언덕에 올라서자 밤바다와 겹친 그녀의 실루엣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는 혼자 파도를 만지고 뒤로 물러섰다가 앞으로 가는 행동을 반복했다.
“힘들지 않았어?”
“아뇨. 너무 좋던걸요. 군대 짬밥도 맛있고 이런 바다도 있잖아요. 과장님! 우리 좀 걸을까요? ”
그녀는 주춤하는 내 손을 끌었다. 손끝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화사함에 모든 섭섭함이 풀어졌다. 한참을 걷다 나는 그날 그녀가 했던 말이 궁금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있잖아. 그대가…….”
“알아요. 정말 감미로웠죠. 달콤했고.”
그녀는 내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를 곁눈질했는데 그녀는 혼자 웃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나와 장난을 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의미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재차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막았다.
“그냥, 이렇게 지내요. 우리. 너무 깊게 생각하지말구요.”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이렇게 지내는 게 어떤 건데?”
그러자 이번엔 그녀도 잠시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전, 객지에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난 거잖아요. 힘들 때 위로해주고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싶을 땐 이야기하고, 좋은 시가 있으면 함께 나누고. 뭐 그런 사이죠. 그 이상은 뭐라 할까. 우리 둘이 서로 불편해요.”
그녀의 정확한 말에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내가 그녀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답은 금방 나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겨울이었다. 그런데도 바닷바람이 춥기는커녕 시원했다. 나는 공연히 모래에서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뜨고, 그녀는 코트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물수제비를 다 날리고 그녀 곁에 앉았다.
“그런데 과장님.”
그녀가 대뜸 나에게 말을 건넸다.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요?”
“그러게. 나도 너무 오래된 단어라 금방 정의할 수가 없네.”
“영원한 사랑도 없겠죠?”
그녀의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인가 그럴듯하게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영원한 사랑은 있어. 종종 문학작품에 나오듯 사랑하던 사람이 둘 다 죽거나, 아니면 그중 한 명이 죽으면 돼.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거든.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렇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베르테르도 그렇잖아.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정도 간다고 하지만 그사이,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을 때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랑은 영원한 거지.”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긍한다는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요?”
그녀는 이 말을 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내용이 약간 쑥스러운 질문인 것 같았다.
“어떤 경우?”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면.”
“뭐?”
“아니, 예를 들어 제가 앞에 있는 과장님도 사랑하면서, 또 다른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 말이에요.”
나는 직감적으로 꽤 의미 있는 질문이라 생각되었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의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이 말은 분명 나 외에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그건 탕녀지. 뭐.”
그러자 그녀는 어이가 없는지 화를 내며, 앙증스럽게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쳤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이 내게 가까이 왔다. 그런 그녀를 나는 내 무릎 위로 눕히면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차에 올 때 무릎 내어 준 것에 대한 앙갚음이야.”
“뭐예요?”
앙탈 지게 그녀는 화를 내었지만 이내 그녀는 온몸을 내게 맡긴 채 눈을 감았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은 달빛에 반사되어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너무 황홀했고 온몸이 떨렸다. 이건, 명백한 사랑의 기쁨이었다.
그녀는 긴 입맞춤이 끝나자 내 무릎에 누워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나는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든 그녀는 너무 예뻤다. 나는 그녀를 보며 이 어린 여자를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렵고 떨리는 설렘으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평생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내 생애, 마지막 사랑의 환희였다.
무산 시로 돌아온 후, 내 삶은 변화되었다. 퇴근 후 일이 없어도 남아 있던 직장의 시간을 줄여 일찍, 퇴근하여 내 방에서 시를 썼고, 통기타를 다시 잡았다. 교회에도 많은 부분을 줄이고 오직 주일 오전 예배에만 참석했다. 그러자 그동안 좀처럼 써지지 않던 시가 줄줄 나왔으며, 노래도 꽤 잘 되었다. 그녀와 나는 이제 평일이나 주말에 한 두 차례 만나 함께 영화를 보던지, 산책하든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요청대로 술도 많이 자제했다. 그녀가 서울, 고향 집으로 가는 날을 빼곤 언제나 주말에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도 나 때문인지 회사에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원래 똑똑한 친구였으므로 자신이 맡은 업무는 다른 사람이 따라서 오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해내어서, K 관세사 대표인 한수로부터 침이 마를 정도의 칭찬이 쏟아졌다.
그녀는 매일 연희를 만나기 위해 우리 사무실을 들렀다. 연희와 수다를 떨다 돌아가는 길엔 언제나 칸막이에 얼굴만 내민 채 내게 손을 흔들고 가곤 했다. 나는 마치 꿈결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밤 내게 문자나 메일로 그녀가 좋아하는 시 혹은 노래, 명언 등을 보냈다. 나는 이제 그녀의 소식에 길든 그녀의 남자였다.
그러던 한날이었다. 금요일이라 일찍 퇴근한 나는 내 방에서 시를 쓰다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자정 무렵이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자려다 혹시나 하고 휴대전화를 봤는데 그녀로부터 몇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뭐 하세요?’
‘올 수 있나요?’
‘보고 싶은데. 너무 늦었죠?’
나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 시 쓰느라 이제 확인. 뭔 일 있어?’
그녀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보고 싶어서요.’
나는 아무래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잠이 확 달아났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내를 뒤로하고 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원룸 앞 가로등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그 곁에 차를 세우고 그녀 곁으로 달려간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날 꽉 껴안은 것이다. 그녀 혼자 사는 원룸에 들어가기 뭣해서 나는 그녀를 근처 포장마차로 데려갔다.
“왜 그래?”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더니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내게 작은 선물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야?”
대답 대신 그녀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선물에 눈길 질을 했다. 얼른 풀어보니 기타에 쓰는 카포였다.
“얼마 전에 기타 카포가 없댔잖아요. 그래서 생일 선물로 하나 샀어요.”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내일이 내 생일인 줄 알고 있었다. 아아. 나는 가슴이 뭉클해오면서 눈물이 났다. 신혼 때 잠시 챙겨주던 아내도 모르는 내 생일이었다.
“나, 내일 일찍 서울에 가요.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해요. 대신 이렇게 늦은 밤에 달려왔으니 이것 말고 다른 선물 하나 드릴게요.”
그녀는 놀랍게도 포장마차 여주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가져가더니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달콤한 혀가 내 입 깊숙이 들어가자 나는 한동안 정신을 잃어버렸다.
“사랑해요.”
그녀는 입술을 잠시 떼더니 이렇게 말하고선, 다시 길고 긴 입맞춤을 시작했다.
첫댓글 생생한 슬픈 역사를 ㅡ
저의글을ᆢ
감삽니다ㅡ
함양, 산청 사건외에 제주 4.3 섯오름 사건도 있습니다. 평소 그쪽 유족회장 추도사를 쓰다, 민 회장님 시 중,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저로선 최고의 시입니다.
제주 4.3 사건 김창범유족회장 -
비와그대 (이인규 소설가)님 대단한 역작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