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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5권. 18세기, Le XVIIIesiècle273-506
제13장, 18세기 후기(1775-1800) : 감정의 학설들과 선(先)낭만주의
- Troisième Période (1775-1800): Les doctrines du sentiment et le préromantisme 430-443.
1절 신비주의와 계시주의: 생 마르땅 – I. Mysticisme et illuminisme : Saint-Martin 430
1775년경에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분석의 혐오가, 루소 작품의 성공이 그 증거가 되는 감정과 무매개적 직관에로 회귀가, 유럽에 조금씩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무한정한 몽상을 그 자체로 사랑하였다. 루소가 말에르브(Malesherbes, 1721-1794)에게 1762년에 편지를 썼다.“나의 모든 꿈들은 실재로 향해져 있을 때, 이 꿈들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상상했고, 욕망했고 꿈꿨고, 아직도 욕망할 것이다. 나는 자아 속에 설명할 수 없고 채워질 수 없었던 빈 것(un vide)을 발견했다. 즉 향유의 다른 한 근원으로 향하는 심정[심장]적인 어떤 동경(un certain élancement)을 발견했는데, 나는 이런 근원의 관념을 갖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나는 그것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그것 자체가 향유였는데, 왜냐하면 나는 이것에 대해 매우 생생한 감정으로, 그리고 내가 가지지 않기를 원하지 않았었던 끌리는 슬픔으로,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주어진 모든 것을 넘어서기에 이르는 감정이다. “존재들의 경계들 속에서 좁혀진 나의 심정은 거기에서 너무 협소한 곳에 있어서, 나는 우주[세계] 속에서 질실하였다. 나는 나를 무한 속에 내던져지기를 원했다.” (430)
이것이 이 시기에 바로 앞서, 널리 퍼진 주제이다: 인식은 감정 덕분에 자기의 대상을, 자기의 척도를, 자기의 정당화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뒤끌로(Duclos, 1704-1772)가 쓰기를 “사랑하지 않았던 자들은, 무한한 관념들이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지닌 어떤 최상위라고 말하는데 스스로 만족할 정도이다. 나는 정당한 관념들을 말한다. 그 관념들에게 그들은 도달할 수 없고, 그 관념들은 감정들에서만 예약되어 있으며…사람들은, 심정이 자기에게만 고유한 관념들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영국의 모든 감정론자들의 공통적 생각[관념]이었다. 1719년에 이미 시와 회화에 관한 비판적 반성들(Réflexions critiques sur la poésie et sur la peinture (1719)를 쓴 신부 뒤보(L'abbé Dubos, 1670-1742)는 아름다움의 인식에 다른 근원을 부여하지 않았다. “추론은 감정의 결정을 이유(raison, 근거)있게 하기 위하여 판단에 개입할 뿐이다. 우리의 심정[심장]은 모든 숙고에 앞서서 그자체로 작동하고 있다.”영국에서 아디선(Lancelot Addison 1632–1703)[?], 허치슨(Hutcheson, 1694-1746), 버크(Burke, 1729–1797)은 같은 견해로부터 나왔다.또한 사람들이 감정과 의식[양심] 속에서 의심에 접근 불가능한 진리의 기관을 찾는 것은 도덕에서이다. 추리하는 자는 이미 회의주의자이다. 양심은 이치(raison)와 아주 다르며, “영혼 속에 따로 있는 역량(cette faculté)”이며, “일종의 감각작용과 취향[기호]에 의해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본능”이며, “확실하게 밝게 인도하는, 심정들의 부드러운 연결하는”감정이다.감정을 만족하는 믿음은 정초되고 정당화된 믿음으로서 간주한다. 모페르뛰(Maupertuis, 1698-1759)가 말하기를, 그것은 행복하고자하는 욕망이며, 자연적 빛보다 훨씬 더 보편적 욕망이다. 이 욕망이 우리에게 신, 자연, 인간에 관한 믿음을 생성하며, 이것들은[세 가지] “우리들의 모든 관념들과 우리 정신의 모든 힘을 통과하는 대상들”이다. (「신의 현존과 지혜(L'existence et la sagesse du Dieu, 1714)」를 쓴)존 레이(John Ray 1627–1705)는 훨씬 더 멀리 갈 것이다. “신의 현존이 거짓일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거기서 어떤 장점을 항상 끌어낼 것이다.” 이것은 이미 사브와 지방의 부사제의 것이며, 그의 위로하는 착각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착각들을 따르면서라기보다 철학자들의 거짓말들에 굴복하면서 퇴폐[타락]될 것이다.” 유용한 것과 진실한 것에 대한 이런 혼동을 우리는 라메트리, 돌바흐, 엘베시우스에게서 이미 보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유물론적 논제들을 옹호하면서, 이 논제들이 유용하며, 적어도 위험이 없다고 한다. (431)
우리가 이제 도달한 시대에서 두 가지 주제들이 서로 교차한다. 진리는 일종의 직관에 의해, 일종의 감정의 자연[본성]에 의해 도달되었다. 진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유용성에 마땅히 비례되어 있다. 두 특징의 통합은 18세기말에 잘 특성 지워진 이런 계시주의(l’illuminisme)와 비의주의(l’ésoterisem)에서 태어났다.이것들은 어떤 카글리오스트로(Alessandro Cagliostro, 1743–1795)와 더불어 신비술사들(occultistes)의 사술[야바위짓, charlatanisme]으로 빠진다. 거꾸로 어느 레싱(Lessing, 1729-1781)같은 이와 어느 헤르더(Herder, 1744-1803) 같은 이와 더불어, 그것들은 빛의 철학자들의 개념작업으로부터 해방되는 우주의 개념작업에까지 고양된다. 칸트가 매우 자주 불평하는 계시주의(Die Schwärmerey, ou l’illuminisme)는 칸트에게서는 스웨덴보르(Swedenborg, 1688-1772)의 통찰들만큼이나 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를 잘 포함하고 있다. 로크 이후로 볼테르는 우리의 역량들과 우리의 필요들 사이에 정확하고 자연적인 연관을 믿었던 반면에, 사람들은 소수 인간들의 운[요행]이라는 초월적 역량들과 공통적 이법 사이에서 이제 대조를 본다. 사람들은 전수자들과 세속인들 사이의 경계구분을 그린다. (432)
프랑 마송[프리 메이슨]의 모임들 속에서, 또 신비적이고 신지적인 사교계들 속에서, 백과전서파들의 철학에 반대하여 마담 귀용(madame Guyon, 1648-1717)와 야콥 뵈매(Boehme, 1575-1624)와 결부된 학설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753-1821)는 리용의 [프랑마송] 집회소에서 입문하였으며 다음과 연관 있다. 즉 거기에서 사람들은 “독일에서 초월적 크리스트교주의라 불렸던 열광적 크리스트교리를 가르쳤는데, 이 교리는 크리스트교의 기초 위에 플라톤주의, 오리게네스주의, 헤르메스의 철학을 섞은 것이다.” 뵈메(Boehme, 1575-1624)의 영감을 받은 신비적 역사가 중요하다. 뵈메는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인간의 최종 재건, 신에로 회귀를 이야기 했다. 신에로 회귀는 선과 악의 근본적 분리와 물질의 파괴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법 위에 세워진 자연 종교에 적대적이다. 거꾸로, 사람들은 신비적 학설들을 제시하기 위하여, 철학자들의 방법들과 톤[목소리]를 취급한다. 실재적인 것의 연속성의 관념, 존재들의 연쇄의 관념, 이런 관념(생각)은 그 세기의 철학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여기에서는 동등하게 부과되었다. 비에모즈(Willermoz/Villermoz)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에게 1779년에 쓰기를, “만일당신에게 소개된 체계가, 어떤 면에서, 당신에게 하나의 연쇄를 – 이 연쇄의 모든 고리들이 그것들의 자리에서 연결되어 – 제공하고, 그리고 당신이 지적이고 자연적인 우주 전체를 당신의 지성에 따라 설명하고 증명하는 일체를 소개한다면, 또한 만일그 체계가 당신에게 당신자신의 현존을 모든 연관들과 – 당신을 우주의 나머지에게 그리고 그 주제자에게 이런 성질로 연결하는 모든 연관들과 – 더불어 마치 인간처럼 증명해 준다면, 그러면 당신은 체계가 진리를 허락하는 모든 것을 채울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 취향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법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존재는 그것을 채택하기를 오래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드리십시오.”이런 보편적 이미지는 프로클로스(Πρόκλος, 410-485)에게서와 버클리(Berkeley, 1685-1753)에게서 신비적 연쇄 형식 하에 알려져 있었다. 이 이미지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철학적 표현방식(une tournure)를 취했는데 반하여, 자연주의자들과 이데올로그들은 이미지에 실증적 범위를 부여했다. 우리의 신지학들에게서 또한 이미지는 이들의 학설에 추리적 성격의 기호(signe)이기를 바랐다. 존재들의 연쇄 이미지에 이를 답보[주파]하는 보편적 힘의 이미지가 연결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항상 운동 중인 우주적 흐름이며, 이 흐름에 의해 메스메르(Mesmer, 1734-1815)는 동물 자기이론의 현상을, 즉 내재적 연결과 모든 사물들 사이의 공감적 연결을, 설명했다.그런데 이것은 레스티프 들 라 브르톤(Restif de La Bretonne, 1734-1806)의 세계 체계이다. 그는 뷔퐁(Buffon, 1707-1788)의 우주론적 가설을 다시 다루면서, 태양이 빛을 발하는 중심을 상상한다. 태양으로부터 행성들이 분리되었다. 각 행성은(마치 또한 당연히 셰니에(Chénier, 1762-1794)가 지구에 대해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하나의 살아있는 개체이며, 이 살아있는 개체는 서로 서로에게 파생되어 종들을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수천 세기에 걸쳐서 인간에까지 이른다.그러고 나서 재흡수의 반대 운동에 의해 모든 존재들은 중심으로 되돌아 간다. (433)
우리는 여기서 이미 자연에 대한 거대한 형이상학들과 철학들의 본질적 이미지들을 갖는다. 이런 이미지들은 19세기 한 중간에까지 계승될 것이다.이 이미지들은 디드로 또는 돌바흐 같은 철학자들에게서 유행하는 관념들의 왜곡일 뿐이다. 단지 이미지들은 종교적 색감[기미]을, 즉 우월한 계시의 국면이다.여기서부터 철학자들에게 적대성이 나온다. 뒤뜨와-망브리니(Dutoit-Membrini, 1721-1793)가 신적 철학(La philosophie divine, 1793)에서 썼듯이, 자연 종교(religion naturelle)는 서로 배척되는 두 단어로 되어있다. 비에모즈(Villermoz)에 따르면, 모든 신조들(les credo)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관용으로, 다시 말하면 자연 종교의 이름 하에서 모든 믿음을에 공통인 것을 제거하면서 무차별로 이끄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단들 때문에 상실되었던 원시적 크리트스교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1782년에 마송들의 회의는 세기의 철학을,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철학 위에 기초하고자 하는 몇몇 구성원들의 경향성을, 정식적으로 추방했다. 프러시아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fr. Frédéric-Guillaume II, 1744-1797)는 베를린으로부터 합리주의 철학자 니꼴라이(Nicolai, 1733-1811)[?]를 추방했다. 그리고 라바테르(Johann Kaspar Lavater, 1741-1801)의 말에 따르면 그 왕은 “비신뢰성의, 소치니즘의, 비종교의 괴물을 물리치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1788년에 이신론과 합리주의에 대한 검열을 재확립하였다. 그리고 파브르 돌리베(Fabre d’Olivet, 1767-1825)는 자신의 인류의 철학사(Histoire philosophique du genre humain, 1824)에서 “철학적 체계들의 혐오”, “흉칙한 이신론”, “모든 것을 전복하기에 유용하며, 아무것도 세우지 못하는 서툴고 또한 파괴하기를 좋아하는 백과전서” 등에 반대하는 계시자들(les illuminés)을 일으켜 세웠다. 심지어 칸트의 열렬한 제자인 페슬러(Fessler, 1756-1839)는 1797년에 베를린의 로얄-로크의 집회소의 정관들을 다시 수정하였다. 1799년 이 집회에 피히테도 참석했음이 틀림없다.그는 조심스럽게 선언하기를, 집회소(la loge)는 “수많은 그것의 목표들 또는 그것의 수단들에서, 사람들이 빛들의 퍼짐이라 불리는 것을 결코 이해하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을”것이라는 것이다.칸트의 비판주의, 실천 이법과 요청들의 비판은 계몽(Aufklärung, 진상규명)과 거리가 멀다. 계시받은 자들이 프로테스탄트 출신일 때, 그들은 심지어 카톨릭주의에 공감들을 갖는다. 영향력 있는 개종들이 있는데, 그 중에 슐레겔(Schlegel, 1772-1829)의 개종이 있다. 파브르 돌리베는 프로테스탄트 출신인데, 교황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었다. 노발리스(Novalis, 1772-1801)는 제수이트파 친위대의 개혁을 꿈꿨다. 유명한 라바테르(1741-1801)는, 보편적 종교가 보편적 군주제만큼이나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또한 신앙은 개별적이고 각각에게 고유하다고 덧붙이면서, 그럼에도 신앙의 통일성이 존재들의 연속성 덕분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각 자연은 모든 다른 자연들의 복사물을 구성하기 때문이다.”보편적 연쇄의 이미지와 존재들의 통일성의 이미지는 다른 학자들에게서는 동포애와 평등성의 혁명적 관념에 이른다. 본빌(Nicolas de Bonneville, 1760-1828)은 종교적 정신(L’esprit des religions, 1792)에서 “무신론자를 오랑우탕의 약간 그 위에 분류하고, 그러나 인간들 가운데서” 총체적 공산주의(le communisme intégral)를 채택한다. 권리와 개체들의 독립의 모든 관념은 “위대한 동물”의 이미지 속에서 해체된다. 그 이미지는 세계이며, 그것의 영혼은 신이다. (434)
후작 루이-끌로드 드 생 마르땅(Louis-Claude de Saint-Martin, 1743-1803)은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이다. 그는 이런 혼란된 관념들에 일관된 어떤 것을 부여하였다. 그는 비술주의적 실천들에도 묵시록적 비전들에 적대적이며, 뵈메의 사변적 신비주의에서 그의 모델을 발견한다. 그는 뵈메를 1788년에 인식했고, 뵈메의 오로라(Aurore naissante, 1612)를 번역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람네(Lamennais, 1782-1854)의철학의 소묘(Esquisse d'une philosophie, 1846)에서 다루어졌던 중심 관념을 발견한다. 피조물은 신에 속하며, 마치 신처럼, 사유된, 말해진, 드러난 신, 즉 한마디로 말씀(lv Verbe)은 사유하는 말하는 찬성하는 신에, 즉 성부(le Père)에 속한다. 모든 것은 이미지이다. “우리는 이미지들의 분위기 속에 그림자 아래서 헤엄친다.” 이런 관념으로부터 세기의 철학에 대한 그의 모든 비판이 생겨난다. 그 비판에서 입말들, 사회들, 과학들은 경험의 자료들(les données)에 근거하여 작업하는 인간적 이치(la raison humaine)의 반성적 작품이다. 입말들은 원시적 계시에서 온다. 만일 철학자들이 달리 생각한다면, 그것은 “입말들이 철학자들을 위한 결집물일 뿐이며, 삶 자체의 표현과 사실이 아니다.”사회들과 정부들은 그 자체로 형성된다. 이것들은 자연 생산물들이다. 계약은 사회를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그가 갖지 못한 권리들을 부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들은어머니 전통(la tradition mère)으로부터 온다.우리의 사유들은 이 전통의 부스러기이며, 사람들은 이 전통을 인민들 속에서 재발견한다. 과학들이 경험으로 온다고 말한다는 것은 부조리이다. 왜냐하면 “사실들은 지성의 확정일 뿐이고, 제2서열을 감당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거짓 원리들로부터 출발한 프랑스 혁명은 섭리적 의미를 갖는다. “바로 앞의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면서, 혁명은 정신적 크리스트교를 예고한다. 그 희생들자에 관한 한, 희생자들은 “원초적 죄에 의해 이루어진 필수적인 속죄의 희생자들이다.” 결국 마르땡주의는 메스트르(Maistre, 1753-1821)와 보날(Bonald, 1754-1840)이 전개한 반혁명적 관념들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435) (57OMJ)
2절 레싱, 헤르더 –II. Lessing, Herder
이 시대에 독일 철학은 점진적으로 “빛[계몽]”의 이상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분리되어 간다. 레싱(Lessing, 1729-1781) 관념들, 젊은 괴테(Goethe, 1749-1832)의 관념들, 헤르더(Herder, 1744-1803)와 야코비(Jacobi, 1743–1819)의 학설들, 칸트(Kant, 1724-1804)의 비판론 등 모든 것들은, 로크(Locke, 1632-1704)의 분석과 뉴턴(Newton, 1642-1726)의 과학에 의해 세워진 추론하는 지성이 심층적 실재성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435)
레싱(Lessing, 1729-1781)은 이 시기에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들, 볼프 앞잡이의 조각글들(Wolfenbütteler Fragmente, 1774-1777(Reimarus라는 익명으로)과 인류의 교육(Die Erziehung des Menschengeschlechts, 1780)을 낸다. 분명히 그는 프랑스와 여욱의 자유 사상가들을 계속하여 여러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는 자신의 조각글들(Fragmente) 중에서 그 당시에 익명의 한 작품을 출판하였다. 그 책에서 라이무스는, 많은 다른 작품들 다음으로, 경전과 복음의 비판에 앞서서 정통교리의 허약함을 보여주었다. 그 책에서 그는 더군다나 예수는 대속과 구원의 교리[독단]의 저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매우 힘든 투쟁 속에서, 레싱은 [루터파] 신학자인 괴제(Goeze, 1717-1786)에 반대하여, 마치 그의 다른 저술들에서처럼, 이런 기회에 주장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어떤 볼테르나 어떤 톨랜드와 뉘앙스와 매우 다른 자유사상의 뉘앙스가 드러난다. 이런 뉘앙스는 그가 생성해야만 했던 깊은 직관으로부터 그리고 믿음들의 변형작용으로부터 온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떠한 인간도 성공했거나 성공했다고 믿는 진리의 소장(la possession, 숙달)이 아니다. 그의 가치를 있게 하는 것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그의 노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힘들이 발전되어 가는 진리의 탐구이다.” 따라서 크리스트 종교는 거짓으로 간주되어 그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종교는 진리의 발견 속에 한 국면이 있다. 이 국면은 극복되어야할 국면이다. 선량한 프랑 마송인 레싱은 “그가 더 많이 침묵해야할 가치가 있는 진리들을” 안다. (사람들은 그가 영혼들의 이주[여행]에 대한 찬성자임을 안다.) 왜냐하면 정신은 그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의 주어진 순간에 정신을 마치 계시 작용처럼 이전되었을 것이라는 것만큼이나 진실이다. 그리고 보다 나중에는 그러한 진리가 증명된 진리가 되었을 때이다. “신은, 이 진리들을 보다 빨리 퍼트리기 위하여 또한 진릳를 견고하게 보증하기 위하여, 이법의 단순한 진리들이 마치 계시되었던 진리들처럼 가르쳐져도 좋도록 허락한다.”따라서 그가 꿈꾸었던 순수 추리 종교는, 자유 사상가들이 정토교리에 대립시켰던 자연적 종교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계시를 넘어서고 또한 그 지체 안에서 흡수하는 종교이다. 이것은 헤겔(Hegel, 1770-1831)에서 종교 철학의 근본적 관념들일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관한 그의 관점은 그의 사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가 말하기를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체계를 옆으로 밀쳐놓았다. 그는, 각각을 그가 있어왔던 그 진리의 길로 향하여 인도하고 애썼다.” 이리하여 인간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진리의 진보 속에서만 발견되는 진리의 덧없는 형식들일 뿐이다. 게다가 레싱은 종교적 믿음들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가져야만 하는 순수하게 실천적 성격을 종종 강조한다. “둘은 다른 것이다. 즉 영혼 불멸이 마치 철학적 사색처럼 믿는 것과, 그러한 것에 따라서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그의 믿음들을 제정[설립]하는 것은 별개이다.” (436)
헤르더(Herder, 1744-1803)는 자연과 역사에 관한 일종의 몽상을 위한 그의 시대의 취향에 참여했고 또한 강조했다. 그런 몽상은 우리의 현실적 삶은 마치 거대한 전체의 삶 속에서 맥박처럼 파악했다. 그는 그의 모든 저술들 속에서, 신적 구상의 통일성에 대한 자신의 설비[창설]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는 과거와 기원들에 관한 몽상들에서 특이한 편애(la prédilection)를 가졌는데, 거기에서 그는 탄생의 상태에서 인간적 성질들을 발견한다고 믿었다. 이로부터 언어의 기원(Origine des langues 1772)이 나온다: “언어를 발명하는 것은, 또한 인간이 되는 것(d’être homme)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적이다.” 그것의 토대에는 어떠한 사회적 협약(convention)도 없다. 언어(le langage, [die Sprache])는 외톨이[고독자]에 의해서는 발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정신 속에서 번역되는 자연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나뭇잎들은 잎파리의 살랑거리는 신선함을 가련한 외톨이 위해 떨어지게 한다면, 만일 시냇물이 졸졸거리며 흐른다면, 산들바람이 그의 양 뺨을 선선하게 하면서 스치어간다면, 그는 기분 좋은[자비로운] 존재들을 인식하게 하는 관심을 충분히 갖고, 또한 눈[시각]도 혀[입말]도 없이 그의 영혼 속에서 이것들을 명명할 경향을 충분히 갖는다. 나무는 살랑거림으로 불릴 것이고, 산들바람은 스쳐감이라, 생물의 흐름은 졸졸이라 불릴 것이다. 자 여기서[이로부터], 기대하는 작은 사전(辭典)이 이루어진다.” 이로부터민중 시(詩)의, 즉 그가 사물들의 직관적 관점들을 위하여 인간의 기원적 선물들을 실현했다고 보는 거짓 오시안(Ossian)의 작업들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로부터 그의 위대한 저술, 인간사의 철학에 관한 관념들(Idées sur la philosophie de l'histoire de l'humanité, 1784–1791)이 나온다. 이 저술은 그의 정신에 비추어서 다음의 저자들에 대립된다. 빛의 세기의 철학자들의 계승자들인, 이젤린(Isaak Iselin, 1728-1782) (인류의 역사(Sur Geschichte der Menschheit (Histoire de l'humanité) 1764)또는 조금 나중에 꽁도르세(Condorcet, 1743-1794) 등은 인류의 진보를 제시하고자 애썼다. 이 철학자들은 인간이 보다 많은 지식과 완전함을 향해 나가는 일련의 단계들을 규정한다. 헤르더에게서는 이러한 것 어떤 것도 없다. 헤르더는 일련의 사건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형들의 규정작업을 추구했다. 그에게서 자연에서든 역사에서든 모든 것은 완전한 전형의 주위에 왔다갔다하는 일종의 진동을 증거한다. 자연과 역사는 인과적으로 연쇄되어 있는 사건들의 직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초벌들의 일체이다. 우선 자연 속에서부터 “거기에서 돌로부터 수정으로, 수정으로부터 광물들로, 광물들로부터 식물계로, 식물들로부터 동물로, 사람들은 조직화의 형식이 높아지는 것을 본다.” 이어서 역사에서도, 역사는 우리에게 모든 종족들을, 문명의 모든 전형들을 제시하며, 그리고 유럽 문명에 도달한다. 유럽 문명은 “인간들이 있었던 그대로, 또한 인간들이 있고자 원했던 그대로, 인간의 문명이다.” (437)
이런 지배적인 사상은 기원적 전형으로부터 나온 형상들의 연속성의 사상이다. 그의 철학은 젊은 괴테(Goethe, 1749-1832)의 성찰들과 재결합한다. 괴테와 더불어 헤르더는 1770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리고 1776년에 바이마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 양자는 우주를 재현한다. 그 우주 속에서 자연은 한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마찰없는 연속적 이전에 의해서 이행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형상들의 충만”이라는 라이프니츠의 공리가 아니다. 이 형상들의 충만은 모든 공가능한 형상들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진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이 형상들을 위하여, 형상이 할당되어 있었던 전형의 한계 안에서 새로운 형상들을 생산하면서, 생성 중에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것은 배아들의 쟁여짐(l’emboîtement, 차곡차곡) 이론이 아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표출된 형상은 소형모형처럼 선현존해 있었다. 왜냐하면 자연은 창조적이고, 괴테는 형식적으로 후생설(l’épigenèse)을쟁여짐 이론에 대립시켰다. 후생설은 소위말하는 변신론(une métamorphose)을 함축한다. 이 변신론에서 사람들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점진적인 변형론(la transformation)에 동의한다. 이는 마치 생리학자인 캄페르(Camper, 1722-1789)가, 그 자신의 도식적인 뎃상[그림]들에서 물고기의 두뇌에서부터 인간의 두뇌로 변형형성을 알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또는 괴테 자신이 지신의 식물들의 변신(Métamorphose der Plante, 1790)에서, 식물의 모든 기관들은 변형된 입[사귀]들일 뿐이라고 제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438)
이런 창세기[발생기]를 파악하기 위하여 이런 이전들이 필요하다. 즉 고정된 개념을 사고하는 오성, 표면에 머무는 경험이라는 것과, 로크 같은 이 또는 뉴턴 같은 이의 분석적 이법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감정과 예술에 비슷하게 가까운 직관이, 즉 자연의 작업 자체에 대해 무매개적인 직관이 필요하다. (438) (57PKC)
3절 멘델스존에 반대하는 야코비, 헴스테르휘이스 Jacobi contre Meldelssohn: Hemsterhuis
빛의 세기의 합리주의는 거의 동일한 시대에서 그러나 아주 다른 의미에서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에 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야코비의 중요한 주제는 합리주의 종교의 불가능성과 신앙(la foi, Glauben)의 필연성이다. 일관성 있는 모든 합리주의는 동일한 것으로써 무신론 또는 스피노자주의에 이른다. 왜냐하면 합리주의는 충분이유율에 따라서 사유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즉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야코비는 이것을 증명하면서 볼프(Wolff, 1679-1754)에 의한 스피노자의 비판을 지지한다.보편적 실체의 나머지 모든 것은 양태일 뿐이며, 사람들은 그것[실체]에 도달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신은 세계에 앞선 것으로 생각하자마자, 그리고 사람들이 신의 바깥에 현존하는 세계를, 또는 자유로운 인격들을 생각하자마자, 사람들은 충분이유율로부터 해방된다. 라이프니츠가 일관성이 있는 귀결에 이르렀다면, 그는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신앙에서 이법과 독립적인 확실성의 근원을 인정해야만 한다. 심지어는 이런 확실성이 합리적 확실성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확실성은 무매개적이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확실성이 모든 증거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 확실성이 모든 매개적인 확실성에 전제들을 제고 해야만 한다. 마치 합리적 확실성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증거는 이미 증거된 어떤 것을 - 그 어떤 것의 원리는 계시인데 - 가정한다. 야코비는 파스칼 (Pascal, 1623-1662)의 사유를 인용하면서 그의 이론은 다시 다룬다. “우리는 퓌론주의[회의주의] 전체에 극복할 수 없는 진리의 관념을 갖는다.” 나의 신체의 현존, 다른 신체의 현존, 나의 바깥에 사유하는 다른 존재들, 이러한 것들은 “자연이 우리들 모두와 각자에게 믿도록하고 인정하게 강요하는” 진실한 계시의 대상들이다. 인간에게서 신앙은 사회만큼이나 회피할 수 없는 마치 터전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신앙 속에서 태어났으며, 우리들은 신앙 속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마치 우리들 모두가 사회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우리는 사회 속에 남아있어야만 한다.” (439)
이것은 빛의 세기의 철학과는 정 반대이다. 의지를 인도하는 것은 오성이 아니며, “의지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 오성이며, 순수하고 영원한 빛으로부터 솟아난 불꽃이 오성이다.” 인간의 사유는 그의 품행에 의존한다. “인식을 이끄는 길은 삼단논법도 않고 기계적이지도 하는 길이다.” 또한 야코비는, 우리가 레싱에게서 괴롭힌다(poindre)고 보았던 진리의 상대주의적 이론에 이른다. “각 시대는 자기의 고유한 진리를 가지며… 각 시대에 맞는 자기의 생생한 철학을 갖는다. 그 철학은 이 시대의 진보에 맞게, 이런 시대를 지배하는 행동의 양태를 제시한다.” (439)
1785년에 야코비(1743–1819)와 멘델스존(Mendelssohn, 1729-1786) 사이에서, 레싱의 주제에서 자연종교의 지지자와 빛의 철학의 지지자 사이에서 일어났던 논쟁은 이 시대에 통용되는 관념들의 자연을 되풀이하게 했다. 야코비는 레싱이 범신론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신이 한 사물로부터 갖는 관념은 사물을 본질을 다 사용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결국에는 전체로서 세계는 신의 아들과도 동일하고, 신 그 자신에 의한 자신 사유와도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레싱의 친구인 멘델스존은 1754년부터 이런 비난에 대해 그를 방어했다. 그러나 논쟁이 일어나고, 이들 사이에 신앙의 용어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멘델스존은 유대주의에 충실한 삶에 전적으로 머물러 있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유대주의였던 그는 신앙이 가능하다고 인정했다. 그것은 역사적 진리들을, 예를 들어 유대주의의 의례에 기초한 사실들을, 믿는 신앙이다. 신의 현존과 전능에 관한 한, 이것들은 이법에 의해 알려져 있다.멘델스존은 유대주의가 계시된 종교가 아니라 계시된 율법이라고 주장한다. 계시(스피노자의 관점인데)는 우리 인식들을 증가하게 함이 없이 작동들(des actes, 행실들)을 규정한다. 종교의 진리들에 관한한, 이것은 착한 의미에 접근 가능한 매우 단순한 추론의 직무이며, 철학은 그것을 깊이 탐구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의 지지자인 야코비도 이법의 방어자인 멘델스존도 이러 종류의 지적 직관을 파악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이 지적 직관에 대한 관념이 레싱(1729-1781)에서는 묘사되고, 헤르더(1744-1803) 또는 괴테(1749-1832)에게서는 정확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지적 직관은 칸트에도 불구하고, 독일 철학의 중심관념으로 될 것이다. (57PKD)
야코비의 경향성들에, 그의 친구인 홀란드인 철학자인 헴스터휘스(François Hemsterhuis, 1720-1790)가 연합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어로 쓰는 탁월한 작가인데, 너무나도 알려지지 않았다. 원인들의 무한정한 탐구의 토대위에 선 무신론, 인간에게서 두 종류의 확신들로부터 나온 현존, 즉 하나는 내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부터 태어나는 확신, 다른 하나는 추론으로부터 파생되지만 전자 없이는 존속할 수 없을 것 같은 확신, 이것들은 그의 사유의 일상적 주제들이다. “잘 구성된 인간 속에서, 시시 때때로 최상을, 미래를, 완전함을 향하여 표출되는 영혼의 유일한 한숨[탄식]은 신성에 대한 자연의 기하학적인 것보다 더 많은 증명작업이다.” (440) (57PKD)
4절 토마스 리드의 철학 – La philosophie de Thomas Reid. 440
다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비적인[비슷한] 고민거리들에게, 스코틀랜드인 토마스 리드(Thomas Reid, 1710–1796)의 학설이 응답한다. 그는 1763년에 글래스고 대학의 교수였다. 데카르트(1596-1650)에서 흄(1711-1776)에까지 모든 인식 이론들의 공통적 특징, 그것은 로크(1632-1704)의 반대자들이 “이신론”이라고 불렀던 주제이다. 우리는 무매개적인 인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관념들을 갖는다. 이로부터 전적으로 일련의 문제거리들이 생겨난다. 어떻게 우리의 관념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사물들에 관한 주장들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이 주장들을 정당화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낯선 학설들에(태생주의, 신 속에서 통찰) 이르렀던 시도들 이후에, 버클리(1685-1753)와 흄(1711-1776)은 각각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끝내 선언하였다. 전자는 관념들로부터 구별되는 사물들에게 속하는 모든 실재성을 부인했으며, 후자는 관념들의 내용을 넘어서는 주중들에게 속하는 자발적 신념의 가치와 다른 모든 가치를 거부했다. 이처럼 철학과 상식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un hiatus)이 있었다. (441)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대신에, 리드는 단지 이 문제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주제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관념에 의해서만 인식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이 주제는 그에 따르면, 충분히 조잡한 혼동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 그것이 있지 않는 거기에서는 행동하거나[능동] 또는 감내할[수동]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귀결로써, 우리의 정신은 단지 자신 고유한 변모 형식들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신이 현재 있지 않는 외적 물체들은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류는 지각작용이 정신을 향한 물체[우리 신체]의 작용이라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존재는, 자기가 자기로부터 힘을, 즉 다른 존재 안에서 변화를 생산하는 힘을, 발산하는 경우에만 다른 존재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대상은, 우리가 대상을 지각하는 사실로부터 보건데, 어떠한 힘도 생산하지 못한다. 이것은 대상에서 보아, 논리학자들이 외속적인 명칭작업(une dénomination extrinsèque)이라 불렀던 것이고, 이 명칭작업은 지각된 대상에서 작용도 성질도 함축하고 있지 않다.”헤밀턴은 리드에 주석을 달면서, 리드가 가상디(Gassendi, 1592-1655)에게서 외속적인 명칭작업의 지각작용으로부터 관념과 용어를 빌려왔다는 것을 주목했다. 이 지각작용은 오캄주의자들의 유명론자들에 의해서, 특히 비엘 아마도 가상디에게 온 것으로 추측된다. 상식의 전통은 데카르트주의와 반대로 정신의 어떤 것을 무매개적으로 지각된 대상 속에 놓기를 거절한다. (441)
그런데 이런 편견에 대한 부인작업, 그것은, 리드가 이것을 잘 인정했듯이, 그의 철학 전부였다. 이로부터, 외적 감관의 대상들에 대한 무매개적 지각작용에 대한 일종의 정당화 작업뿐만이 아니라, 또한 상식의 진리들에 대한 무매개적 지각작용에 대한 정당화작업이 나온다. 이러한 것은 상식에 의해, 알려진 것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이법 또는 역량에 반대되는 믿음을, 즉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하는 자발적이고 자연적이고 믿음을, 그를 앞서 나갔던 비티(James Beattie, 1735–1803)처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뷔피에(Claude Buffier, 1661–1737)처럼, 그가 상식 안에서 이법을 포괄하는 선구자처럼 고려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삶의 품행에서 공통적인 신중함을 가지고 행동하기에 충분한, 그리고 사물들이 판명하게 알려졌을 때, 명증한 사물들에서 진실과 거짓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지성의 정도차로서” 그것[상식]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상식은, 듀걸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1753–1828)의 말에 따르면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법칙들”을 지칭한다. 사람들이 게다가 필수불가결한 분석에 의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매개적이고, 환원할 수 없고, 기원적이고, 자연적이고,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규칙들이다.더군다나 상식은 정신의 어떠한 수동성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식(le sens commun)은 다음을 주목하고 있다: 즉 만일 철학자들 속에서 감관(sens, 의미)라는 단어가 수용적인 단순한 역량을 지칭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만일 철학자들이 반대로 공통의 입말에서 판단을 지각작용으로부터 이렇게 분리하려 애쓴다고 할지라도, 단어 상스(감관)는 종종 판단(양식, 무의미, 느끼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442)
무매개적 지각작용의 원리는 정신의 철학을 변형하였다. 이신론자들은 하나의 의식 또는 사유에 정신의 모든 역량들을 재조정하였다. 왜냐하면 이 관념은 그들의 유일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의식이 현재의 변모작용들의 무매개적 지각작용이라면, 의식은 외부(exterieurs) 대상들의 무매개적 지각작용인 외적(externe) 지각작용으로부터, [또한] 과거의 무매개적 지각작용인 기억으로부터, 그리고 하물며 모든 매개적인 인식들로부터 구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리드는, 당대에 데카르트로부터 하틀리(Hartley, 1705–1757)에까지 유행하는 소위 말하는 생리학적 설명들 대신에, 그리고 꽁디약에서처럼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시도 대신에, 심리학적 역량들의 묘사와 분류작업으로 대체 하였다. 그 심리학은 서술적으로, 분류적으로 또한 신중하게 귀납적으로 이루어졌다. (442)
분명한 것은, 무매개성으로 회귀, 분석의 힘에 일종의 족쇄를 채우는 것, 환원할 수 없이 주어 실재성들 앞에서 멈춤 등, 이러한 것들을 오성은 비교와 분류에 의해서 외부적인 것으로서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 시대에 일반적 특성에 응답한 것이었다. (442) (57P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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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 리드(Thomas Reid, 1710–1796), 스코틀랜드 철학자. 행동이론, 언어, 심성 철학.
1721 헴스터휘스(François Hemsterhuis, 1721-1790) 네델란드 작가, 철학자. 미학과 도덕철학 전문가.
1729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 빛의 세기에 독일-유대계 철학자. 하스칼라(der Haskala, 유대 계몽주의) 선구자.
1743 끌로드 드 생 마르땅(Louis-Claude de Saint-Martin, 1743-1803) 프랑스 철학자. 계시주의, 별명: 미지의 철학자(le Philosophe inconnu)», 1765년 마송 기사회(l'Ordre des Chevaliers Maçons)가입. <독일에서 서로 비슷안 인물 참조: 에카르트샤우엔(Karl von Eckartshausen, 1752-1803) 독일 작가, 철학자, 신지학자. 카발라 (En Sof)와 부정신학을 다루었다.>
1743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 독일 철학자, 법률가, 작가.
1744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독일 시인, 번역자, 신학자, 역사철학, 문화철학자.
[1761 바일러(Cajetan/Kajetan Weiller, ab 1807 von Weiller, 1761-1826) 독일 카톨릭 성직자. 교육자. deu.Wiki에 야코비 관련 설명이 없다.]
[1784 티에르쉬(Friedrich Wilhelm von Thiersch, 1784-1860) 독일 고전문헌학자. deu.Wiki에 야코비 관련 설명이 없다.]
1809 구라우어(Gottschalk Eduard Guhrauer, 1809-1854) 유대계 독일 문학사가.
1810 프랑크(Adolphe Franck, 1810-1893), 프랑스 철학자, 꾸쟁 계보의 절충학파. 유대주의 철학자, 랍비교육을 받았다. 권리(법)철학자. 프랑스에서 신비철학(La philosophie mystique en France à la fin du XVIIIe siècle: Saint-Martin et son maître Martinez Pasqualis. 1866)
1818 단쩰(Theodor Wilhelm Danzel 1818–1850), 독일 철학자, 미학자, 문학사가.
1819 프레이저(Alexander Campbell Fraser, 1819–1914), 스코틀랜드 신학자, 철학자.
1821 하임(Rudolf Haym, 1821-1901) 독일 철학자, 출판가. Herder nach seinem Leben und seinen Werken dargestellt(Berlin [1877 /] 1880)
1825 리터(Immanuel Heinrich Ritter, 1825-1890) 독일 유대인 랍비, 역사가, 번역가.
1829 조레(Charles Joret, 1829-1914) 프랑스 문학사가, 문헌학자, 식물학자. 독일어 교사자격 통과.
1832 보세르(Adolphe Bossert, 1832-1922), 프랑스인 독일문학사가.
1833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 독일 신학자, 고등학교 교사, 철학자.
1847 도리악(Lionel-Alexandre Dauriac, 1847-1923), 프랑스 철학자,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의 제자. 몽펠리에 대학 교수, 음악미학 전공.
1851 한젠(Karl Adolf Hansen, auch (Carl) Adolph Hansen, 1851-1920) 독일 식물학자, 식물학 교수
1857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 1857-1939),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1872 베르틀로(René Berthelot, 1872-1960) 프랑스 철학자, 법률학자, 시인. Science et philosophie chez Goethe, 1932.
1874 불랑(Emile Alfred Anatole Boulan, 1874–1947), 프랑스 낭만주의자, 대학교수.
1878 피트보겐(Gottfried Fittbogen, 1878-1941) 독일 박식가, 작가.
1879 슈나이더(Ferdinand Josef Schneider, 1879-1954), 독일 문학이론가, 교수.
1884 숄츠(Heinrich Scholz, 1884-1956), 독일 논리학자, 철학자, 복음신학자. Die Hauptschriften zum Pantheismusstreit zwischen Jacobi und Mendelssohn, 1916. 이 책은 Deu.Wiki의 숄츠 항목에서 저술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동명이인이 있지만 또 다른 이가 있을 수 있다.]
1888 몽글롱(André Monglond, 1888-1969), 프랑스 작가 Histoire intérieure du préromantisme français de l'abbé Prévost à Joubert... (파리대 문학 박사 논문, 1929)
1890 라이제강(Hans Leisegang, 1890-1951) 독일 철학자, 물리학자, 작가.
1900 에로(Roger Ayrault, 1900-1985) 프랑스 게르만학 전공, 특히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전공. La Genèse du romantisme allemand, Paris, Aubier Montaigne 1961-1976, 4 tomes
1901 비아뜨(Auguste Viatte, 1901-1993) 스위스 태생, 20세에 프라이부르 대학에서 박사학위(카톨릭과 낭만주의 연결로), 카나다, 프랑스, 스위스 문학인,
1915 가뉴뱅(Bernard Gagnebin, 1915-1998), 스위스 문학인, 법률학자, 스위스 대학교수.
1924 아마두(Robert Amadou, 1924-2006), 프랑스 작가, 파라심리학(la parapsychologie)과 비의주의(l'ésotérisme: franc-maçonnerie, martinisme, soufisme, etc.) 연구가. Louis-Claude de Saint-Martin et le martinisme.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vie, de l'Ordre et de la doctrine du Philosophe Inconnu, Le Griffon d’Or, 1946)
?-? 로렌츠(P. Lorenz, s.d.), Lessing’s Philosophie, Leibzig, 1909. (57OMH)
(14:35, 57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