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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隆熙) 4년/순종(純宗) 3년/일본(日本)메이지(明治) 43년 1910년 10월 17일 (月 음력,1910.9.15) ❦ 警務總監府,新韓民報 第198호(미국,샌프란시스코 사이크라멘호街 崔正益 발행)와 新韓國報 第114號(미국,하와이 盧在浩 발행) 발매 반포 금지,압수 [출전] 朝鮮總督府官報 1910.10.20 일제침략하 36년사 p.83 ❋ 警務總監部에서는 新韓民報 第198號(美國 샌프란시스코우 사아크라멘호 街崔正益 발행) 및 新韓國報 第114號(美國 하와이盧在浩 발행)를 치안 방해를 이유로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하다. [출전]朝鮮總督府官報 1910.10.20 |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서는 신한민보(新韓民報) 第198號(美國 샌프란시스코우 사아크라멘호 가(街) 최정익(崔正益) 발행) 및 신한국보(新韓國報) 第114號(美國 하와이 노재호(盧在浩) 발행)를 치안 방해를 이유로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하다.
신한민보 (新韓民報)
1909년에 대한 국민회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신보와 대동공보를 통합하여 만든 주간 기관지
* 창작/발표시기 1909년 2월 10일(창간)
* 간행/발행 최정익(1909), 김운하(1974년 이후)
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국민회는 하와이의 교포단체인 한민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발족하였다. 1910년 2월 국민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되며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하였다. 그에 따라 합성협회 기관지 『합성신보』와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제118호까지 발행)가 통합되어 『신한민보』(제119호)로 발간되었다.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면서 대동보국회 기관지 『대동공보』 역시 『신한민보』로 통합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최정익(崔正益)이었다. 제1호 사설에서 과거의 『공립신보』가 일개 단체의 대변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새롭게 출발하는 이 신문은 민족 전체의 대변기관으로 자처하였다.
국문으로 매주 수요일에 발간되어 국권회복운동에 관련된 논설과 기사를 싣고 국내 소식과 재외동포에 대한 소식도 광범위하게 실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행하였다.
국내에도 일부 유입되어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압수되어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1910년 이후에는 국내 독자에게는 거의 배포되지 못하였다.
이 신문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재미동포에게 지식을 보급하는 데 힘을 기울여 창간 초기부터 서적광고를 빈번히 게재하고 일반 신문 구독자가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신문의 광고로는 『청구신보』·『학생영문보』·『한인신문』 등의 판매대리 광고를 게재하였고, 일반 도서광고로는 국사·기독교서적·일반 교양도서 등이 눈에 띄었다.
▲박용만 (朴容萬,) 1881년 7월 2일[1] ~ 1928년 10월 16일) 이승만의 앨범에 포함된 독사진 | 1910년 5월 14일 이항우(李恒愚)가 편집인이 되어 영문난(英文欄)을 신설하였으나 경영난으로 곧 폐지하고 최정익이 다시 편집을 맡았으며, 그 뒤 박용만(朴容萬)·홍종표(洪宗杓) 등이 맡았으나 경영난으로 휴간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1915년 3월 11일부터는 이대위(李大爲)가 고안한 인터타입의 식자기로 최초의 신식 국문활자를 사용하여 신문을 제작하였다.또한 1919년 3월 20일부터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궁금한 국내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주간으로 발행하던 것을 격일간으로 변경해서 발행하기도 하였다. |
한편, 국민회는 1922년 하와이 지방총회가 분리, 독립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이에 따라 『신한민보』도 4월 10일부터 8월 10일까지 휴간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 다시 속간되어 꾸준히 발행되어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했으며, 1937년 3월 4일자부터는 4면에 영문기사를 게재하여 미국에서 자라난 자녀들의 구독 편의를 제공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발행되어 오다가 1974년 9월 김운하가 인수하여 월간으로 발간하고 있다.
신한국보 (新韓國報. 한인합성신보, 국민보(國民報) )
*창작/발표시기 ; 1909년 2월 12일(창간호), 1913년 8월 6일
*간행/발행 ; 국민회하와이지방총회, 대한인국민회하와이지방총회
1909년 2월 12일자부터 1913년 8월 6일자까지 총 250회가 발행된 하와이 한인사회 초창기 한글신문이다. 타블로이드 배대판의 크기로 4면 6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미주한인사회는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의 결실로 결성된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의 통합으로 1909년 2월 1일 국민회를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합성협회는 국민회하와이지방총회로,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재조직 되었다. 1910년 2월 그동안 국민회 결성에 합류하지 않았던 하와이의 전흥협회와 미국 본토의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합류하면서 국민회의 명칭은 대한인국민회로 변경되었다.
『신한국보(新韓國報, The United Korean News)』는 새로 설립된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기존에 발간해오던 『한인합성신보』의 명칭을 1909년 2월 12일자로 바꾸면서 발행되었다. 이에 따라 『신한국보』는 창간일자를 『한인합성신보』의 창간일인 1907년 10월 22일자로 정했는데, 이는 『한인합성신보』를 계승한 신문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주1회 발간된 한글신문인 『신한국보』은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한 인물은 홍종표, 한재명, 이래수, 박상하, 노재호 등이다. 대한인국민회 탄생이후 발행처의 이름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바뀌었다.
내용
현재 『신한국보』는 1909년 2월 12일자 창간호부터 1911년 1월 3일자까지 발행된 신문만 남아 있다. 결본이 적지 않지만 『신한국보』를 통해 경술국치 전후 하와이 한인들이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특별히 『신한국보』는 국내를 비롯해 해외 각지에도 배포되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일제 통감부는 1909년 한 해 동안 27회에 걸쳐 1,135부나 압수하였다. 그만큼 『신한국보』의 논조는 애국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밖에 『신한국보』는 하와이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실상과 형편을 잘 보여주고 있어 이민사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이러한 『신한국보』는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설립을 계기로 1913년 8월 13일자부터 제호가 『국민보(國民報, The Korean National Herald)』로 바뀐 뒤 하와이 한인사회의 중추적인 한글신문으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