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냉이 빵)
요즈음 해외 입양인 TV다큐 프로가 종종 등장한다. 굳이 프로의 제목을 붙이자면 암마찾아 삼만리다. 한국 전쟁 이후, 약 15만 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다는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입양인의 수가 한해 2~3천명에 이른다고 한다.(보건복지부, 2014)그중 약 1만 명의 가장 많은 입양아를 받아들인 나라는 프랑스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 맞춰 정부는 해외 입양인들을 위한 사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모국 방문, 이중국적 허용, 친가족 찾기와 문화 체험 등을 진행중이거나 계획중에 있다고 했다.
입양인들은 TV 화면에 조금 더 오랜 시간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도록 무척 애를 쓴다. 그때 그 순간부터 내 심장은 울렁거린다. 그들은 혹여 찾는데 걸림돌이 될지 모를까 싶어서인지 한결같이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고 있음과 친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개중에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엄마를 찾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 제천이라고 아예 그곳에 눌러 앉은 친구도 있다. 인터넷 덕분으로 프랑스와 미국에 떨어져 살던 자매 입양인이 극적으로 만나는 경우를 보았고 유전자 감식으로 엄마를 극적으로 찾은 경우도 보았다.
99.97% 라는 유전자 감식 결과물을 받아들고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니 솟구치는 눈물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용서 해 달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괜찮다는듯 엄마의 등을 두드리는 다 큰 아이. 피치 못할 사연으로 헤어진 것이겠지만 천륜을 마다한 부모가 나는 여전히 밉다.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뜻하지 않은 어느 한 여인으로 또 다른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뿌리를 찾아 오는 입양인들을 위해 숙식도 제공하고 문화체험도 시켜주는 그녀는 자원봉사자이다. 그녀가 그 일을 나선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프랑스 유학을 떠나 던 때 홀트 아동복지회 입양아를 안고 비행기에 올라 경비를 매번 줄이며 무난히 유학을 마쳤다는 것인데 그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는 것이다.
부모와의 생이별을 만드는 사람이 아마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참 문제다. 전쟁이 끝난지가 언제인데 오늘에도 고아들은 여전히 늘어만 가고 있다. 뿌리를 찾아 오고 또 뿌리 때문 해외로 입양을 하는 격이니 어느 지구촌 사람들도 이해못할 한국사회라 더 이상 말하여 무엇하리. 헐벗은 탓이겠지만 정말 그 시절엔 고아들이 많았다. 고작 2만 명도 채 안 돼는 읍내이건만 우리 동네엔 유독 고아들이 많았다. 동네에 미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아들을 돌보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고학년이 되자 한 반이 무려 칠팔십 명을 넘어섰는데 그중 대여섯 명은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었다.
기독보육원, 평화보육원, 안양보육원. 안양에는 그렇게 세 곳이 있었다. 그 애들은 거의 대부분 생년월일이나 성조차 모르고 지냈다. 우리보다 훨씬 큰 아이들이 많았으며 여드름에 턱 밑에 수염이 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애들은 당시로는 무척 큰 키들이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더 이상 자라지를 않았다. 떼로 몰려다니던 아이들은 삼하여 종종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다가도 어떤 날은 후하게 시리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나타나 미군들이 그리 하듯 아이들에게 휙 뿌리듯 던져주기도 하였다.
작은 자존심에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주워 먹지를 않았다. 나는 그 고아 아이들 중 한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 그 아이가 건네 준 노란색 연필은 무척 단단하고 야무져 잘 부러지지가 않았다. 미제가 최고야 하던 그 시절이다. 몰래 하는 양키장사는 큰 돈벌이였다. 의정부니 동두천에서 나온 물건이라 하면 모두들 탐을 내던 그때이다. 이후엔 월남에서 들여온 물건까지 한 몫을 했다. 그 시절 씨레이션이라 하는 캔에 미국제 껌이나 초콜릿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먹을 것이 귀하였기 때문이다. 봄철엔 소골 안 아이들이 돼지감자하고 칡을 가져와서는 고아원 아이들이 가져온 미제 연필이나 초콜릿과 바꿔 먹든지 아니면 나체사진을 불쑥 건네 바꿔 갖기도 하였다. 미국이 건네준 밀가루포대 악수그림이 선명하던 그 시절, 존슨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한껏 그 기대가 컸던 적도 있다.그때의 존슨탕이 그 유명한 의정부 부대찌개가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쫀드기’란 흙을 먹어본 적이 있다. 밋밋하여 별 맛도 없었던 것을 어찌 알고 채워 넣었던 것인지 의아하고 그것을 그리 먹어도 되는 것인지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다. 학교에선 점심시간에 강냉이 빵을 큰 쟁반에 담아 조각조각 나누어주었다. 고소한 맛이 괜찮아서 큰 것을 먼저 차지하려고 큰 쟁반 속에 올려진 굽은 손들이 늘 아우성이었다.
고학년에 올라와선 등치가 큰 밀가루 빵으로 바뀌었는데 난로에 올려서 데운 우유와 먹었지만 퍽퍽하기만 할 뿐 강냉이 빵엔 비교도 안될 만큼 맛이 덜했다. 결국 그것도 어느 날부터 정해진 애들만 주더니만 졸업할 때쯤엔 끝내 사라졌다. 당시의 겨울 교실은 참으로 고달팠다. 조개탄이 모자라 솔방울을 준비했고 주번은 꼭 두 명이 했는데 이른 아침 빠께쓰를 들고 학교 뒷 편 걸상 부서진 흔적이 수북한 창고 쪽으로 쭉 모였다.
전 학년 주번반장이 주번선생님한테 보고를 하고, 학교 뒤편으로 가서 땔감을 받아 날랐다. 그렇게 피운 난로불은 점심은커녕 수업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꺼졌다. 그러기에 아침엔 난로 옆에 앉으려고 서로 밀쳤으며 쉬는 시간 점심쯤엔 자연 창가로 몰려들었다. 이 때문 당시는 일주일마다 줄 전체가 한 칸 씩 이동을 해야 했다. 그래도 씩씩한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 양지바른 곳에서 구슬치기를 하든지 고무줄을 했었다.
그런 아이들 손등은 언제나 갈라져 있었다. 쥐 잡는 날이 따로 있었던 시절 우린 봄철엔 송충이를 잡으러 단체로 산을 올랐고, 파리를 성냥 곽에 담아 가져갔으며 늦가을엔 솔방울을 따러 산에 올라야 했다. 송충이 잡을 때는 깡통을 준비해서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넣어 산에서 내려 올 적 검사를 일일이 받았는데 정말이지 엄청 송충이가 많았다.
수리산은 원래 갈참나무가 제일 많고 깊숙이 들어가면 물 흐르는 기슭 언저리엔 소나무하고 참나무가 무성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산은 황폐해져서 거기에 의존해 사는 사람만큼 가난해지고 말았다. 가난하여 혹독하게 추웠던 그 겨울, 할아버지(교장선생님)를 만나는 조회시간은 엄청 고역이었다. 구멍 뚫린 양말 생각도 안 해주고 뭐 그리 하실 말씀이 많으셨는지.
차디찬 운동장 대신 화장실에 몰래 숨었다가 벌을 선 적이 있다. 지난번 산행 길에 오대산에 들려 마신 진노랑 옥수수 술! 난 문득 양지 녘에 쪼그리고 앉아 강냉이 빵 알갱이를 한 올 한 올 생선에 달라붙은 살점 발라먹듯 떼어 먹던 고아출신 그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엄마를 찾았다며 서울로 전학을 갔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하고 살까. 이제는 세월 따라 다 지나간 가난한 그 시절일 뿐이다.
첫댓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셨습니다.
1960년 대에는 지역마다 고아원이 있었지요. 중학생 시절인 저희 반에도 고아들이 있었습니다. 졸업하면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라는 분들이 후원자였다는 사실을 늦게 알았지요.
난로, 도시락, 송충이, 분유배급, 강냉이 죽,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지난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이런글을 쓰지않으면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모를것이라고 말하는이들이 있습니다.
그랬었구나 하는사람이 몇만돼도 이어나갈거지만, 지금애들은 시대변화인지 깊이생각하지않고 그냥 넘겨버립니다.
들어주거나 말거나 끈임없이 옛날 삶을 적어야됩니다. 잘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