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 김경연
소극적인 아이에서 적극적인 아이가 되었다
나는 평범한 아이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학교에 가면
첫 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과 놀다가 수업이 시작하면 조용하게 앉아서 수업을 듣고
마칠 때면 문구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거나 떡볶이를 사 먹으며 집으로 가는게 신났던 것 같다.
교실 안에서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아이도, 적극적인 아이도 아니였다.
학급위원 후보에 올라갔지만 안했다.
나는 부끄럼을 타는 아이였고 발표가 제일 싫었고 나가서 말해야 하는 것은 더 싫은 아이였다.
나는 바뀌었다. 3학년이 되고 나에게도 변화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교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발표를 하는 것이 부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는 손을 들고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발표를 하기 위해 예습을 했고 집에서도 손을 들고 내렸다를 연습했다.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연습도 했다.
막상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손을 드는 그 순간부터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가슴이 두근 두근거렸다.
발표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안 시켜도 되는데….’라는 생각도 했다.
자연스럽게 내 이름이 불리면 발표를 했고 나는 차츰 발표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타인 앞에서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나의 행동은 나의 성격까지도 활발한 아이로 만들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차츰 학교에서 진행하는 모임이나 행사에서도 반 친구들이 나를 추천해줬다.
“경연이가 잘해요.” 그때 나는 친구들 응원 덕분에 더 잘 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박수와 선생님의 칭찬은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던 것 같다.
점점 부끄럽기보다는 재미있었고 신명 나는 나의 학교생활이었다.
꿈이 자주 바뀌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기 초가 되면 장래 희망을 발표하라고 말하거나, 종이에 적어서 제출했던 경험이 있다.
내가 처음부터 사회복지사를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림을 오랫동안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화가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고 나는 화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확하게 꿈을 접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차츰 재미가 없었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만족할 정도의 수상경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봤을 때 인정하게 되었다.
장래 희망이 화가이니 의무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공으로 할 정도의 뛰어난 실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면서 나는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꿈을 접었다.
그때부터는 그림의 그리지 않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장래 희망이 작가로 바뀌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였다.
고등학교때부터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과 몇 번의 수상으로 ‘내가 이 분야에 소질이 있구나!.’라고 나 스스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국어국문학과를 가서 글을 쓰는 쪽으로 가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과 주변에서 공무원이 평생직장이라며 나에게 공무원을 추천했다.
사실 나도 안정적인 일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터라 자의든 타의든간에 나는 전공으로 법행정학과를 선택하게 했다.
학과에 들어가서 학과 생활도 장학금도 4년 동안 전액 장학금은 받지는 못했지만,
한 학기를 빼고는 다 받았으니 나름으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학과를 가지 않았는데 사회복지사가 되었으니 다들 궁금해한다.
1학년 1학기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사회복지의 이해>는 사회복지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당당하게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가 도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라며 고민 없이 사회복지를 복수전공을 하게 되었다.
꿈이 바뀌는 나에게 사회복지사는 타인의 꿈이 아닌 나의 꿈이 되었다.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한테 자격지심이였는지도 모른다.
전공했던 친구들보다는 들었던 과목이 적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4학년이 되면 여유롭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4학년 때 사회복지와 관련된 자격증 공부부터 정기적인 자원봉사도 2개나 했다.
그리고 직장체험도 했으니 4학년지만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열정적인 사회복지사에서 두려움이 많아진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운 좋게 지금 일하는 이곳에서 자원봉사도 했고 직장체험도 했다.
그리고 졸업하기 전에 취업도 했으니 나에게는 고마운 직장이 아닐 수 없다.
입사하고 나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선임 사회복지사들에게 듣고 배운 것은 현장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복지관에 선생님들은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지지와 격려를 해주셨기에
내가 장애인복지관을 지금까지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정답인 줄 알았고 업무를 집에 가져가서 하기도 했고 남아서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업을 하다 보니 주말에도 출근했다. 지금이야 시간외근무수당이나 보상 휴가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지원도 없었고 당연히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고 시간도 많으니 복지관에서 남아서 일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던 그런 나이였다.
그리고 하고 싶은 사업이 있을 때는 할 수 있는 패기와 용기도 있었던 20대였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사이동은 수시 때때로 발생했다.
복지관에서 모든 팀에서 근무한 전력은 나에게 다양한 업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해줬던 반면
깊이 있게 배우고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다.
누구는 나에게 만능이라고 말해주지만 나는 항상 그 말에 아쉬움이 남았고 더 해보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많다.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으면서 차츰 성격이 바뀌었다.
돌아와서 적응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육아휴직을 하고 돌아오고 나서 몇 달은 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성격도 바뀌었다. 복지관 직원인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직원들과 일하는 사업보다는
외부로 나가는 업무가 더 편했던 것 같다.
많은 직원과 대면하는 것은 외부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도 더 떨릴까?. ‘왜 그렇게 적응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무엇인가를 할 때 고민이 많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눈치도 많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사업과 내가 해야 할 사업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줄 알았지만 아직도 긴장하며 나의 일들을 진행한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 수 있으니 긴장되지만 내가 하는 이 일이
지역사회가 장애인복지관을 지역사회 안으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 되기를 희망한다.
16년 차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올해는 기관에서 직제개편이 되었고 팀도 업무도 바뀌었다.
내가 하고 싶은 사업과 내가 해야 사업이 항상 같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 이다.
내가 해야 하는 사업에서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잘 스며들 수 있도록 고민 중이다. 아직은 바뀐 업무에 정신이 없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업무이기 때문에 금방 적응 할 줄 알았지만 신입직원이 된 기분이다.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고 감사하며 나는 나의 일에서 사회사업가 답게 나답게 하고 있다. 나는 이내 잘 적응하리라 믿어본다.
다만, 나는 어느 일에서든 내가 만나는 당사자가 지역사회 안에서 지역주민으로 함께 했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 지역주민들이 장애인복지관에 놀러 왔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 주민들과 무엇인가를 함께 하면 좋겠다.
나의 동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동료의 일에, 동료의 고민에 나 또한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형식적이더라도 내 동료의 사업에 더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내 동료가 내 사업을 할 때 해줬던 응원 한마디가 힘이 되었고,
더 잘하고 싶었던 소중한 경험은 내가 하는 일에 큰 힘이 되었던 원천이였다.
복지관에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복지관은 혼자서 열심히 하는 개인 업무도 있지만 협업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
동료와 지역사회 그리고 가족들까지도 내가 하는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왔고 관계했다.
귀한 사람들 덕분에 내가 하는 일이 다 귀하게 느껴졌다. 고마웠다.
나는 앞으로 나는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을 통해 배우고 성찰하며 계속 고민하고 답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첫댓글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어린시절을 보내셨고, 작가를 꿈꾸셨고, 두 아이를 낳고 잠시 단절을 겪으셨던 부분들이 저와 겹쳐서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저 또한 부산의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그것 또한 반갑습니다. 앞으로의 날들을 응원합니다^^
공경숙 선생님, 답글 고맙습니다.
김경연 선생님과 비슷한 모습이 많네요.
심지어 그런 삶이 이어져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고, 그것도 '부경' 지역이네요.
두 분 만나면 무척 반갑겠어요.
멀리 마산에서 서울 마포까지, 꾸준히 오가며
길 위에서 글 쓰는 김경연 선생님, 고맙습니다.
김경연 선생님~
저랑 여러 비슷한 면이 있어서 글을 읽으며 폭풍 공감했어요.
"복지관에서 모든 팀에서 근무한 전력은 나에게 다양한 업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해줬던 반면 깊이 있게 배우고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다."
저도 한 기관에서 계속 근무하며 여러 업무를 맡다보니 늘 깊이있게 배우지 못하는건 아닐까 걱정해요. 선생님 글 읽으며 마치 제 얘기 같았어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산에서 서울까지 긴 여정을 묵묵히 걸어나가는 김경연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들의 응원글이 큰 힘이 됩니다.
아직도 글쓰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
하지만 글을 쓰면서 제 모습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글을 한번 두번 쓰기 시작하니 용기가 생깁니다.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선생님이 계신다면 응원하고 싶습니다.
저도 글을 쓰고 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