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낙성군 탄신 700주년 기념사업글 3-1에 이어지는 글
③어찌 이런 일이? 그러나 큰 전공 뒤에는 시기가 따르는 법. 전승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공민왕을 시종하고 있던 평장사平章事김용은 잽싸게 왕의 밀지密旨를 위조하여 주장主將안우에게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밀지를 받은 주장 안우와 이방실이 실행에 옮기려하자 김득배가 중국 고사를 들어가며 완강히 만류했음에도 “왕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그 후환을 어찌 하시려오?” 하면서 김용의 밀지를 강행하고 말았다. 총병관이 죽자 김용은 즉시 “안우 등이 함부로 주장을 살해했으니 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왕의 소환령을 받고 이화령을 넘어 들어오던 안우를 상주관아에서 철퇴로 때려죽였고, 계립령을 넘어 오던 이방실은 용궁관아로 유인해 참살慘殺했다. 이런 내막도 모르고 죽령을 넘어 풍기에 이른 김득배는 동료장수들의 변고소식을 듣고 수기數騎의 군사들과 산양현의 선대산막先代山幕으로 피신해 전말을 알아보기로 했다. 천하의 간신 김용은 자신의 흉계가 드러날 까봐 발 빠르게 움직였다. 김득배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자 아우 김득제를 화산花山으로 유배하는 한편, 선생의 처자와 사위 조운흘趙云仡을 용궁관아에 가두고 혹독한 문초를 가했다. 선생의 처 서흥김씨瑞興金氏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직강 조운흘이 장모를 달래 “바른대로 말해 이 고초를 면하자”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의 거처를 알아낸 김용은 수하들을 보내 곧장 산양산막을 덮쳤으나 김득배를 따르는 군사들이 있는지라 처단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주장을 상주행궁으로 소환한다고 속여 군사들을 따돌리고서야 거룻배로 낙동강 물길 따라 압송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압송 배가 병성屛城강가에 이르자 김용의 수하들이 더럭 같이 달려들어 선생을 참살하고 말았다. 한편, 산양에 처져있던 김득배의 군사들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뒤 쫒았으나 병성에 이르러 이미 주장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병사들은 주장을 보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어둠이 내릴 때 까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으니, 이 자리를 군사들이 통곡한 곳이라 하여 군명교軍鳴郊라는 지명을 남기게 되었다. 선생의 주검이 군문軍門에 걸리자 세상민심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우리들이 편히 자고 먹게 된 것은 다 세 원수의 공이다.”라면서 길거리 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굵은 눈물을 흘렸으며, 효수자리를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상주를 피바다로 만든 공민왕은 왜 유장儒將인 선생의 주검을 효수하였을까. 공민왕은 그간 김용의 잔꾀에 맛이 들려 필요하면 중용했고, 문제가 생기면 잠시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충신들의 고언苦言이 옳게 들릴 리 만무했고 김용의 변신과 표리부동은 오뉴월 잡초자라 듯 기승을 부렸다. 권귀를 쫒는 그의 전력은 어처구니를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용은 김득배와 같이 공민왕을 원나라에서 10년간 수종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김득배는 문신이었고 김용은 무신이었다. 귀국해서 김득배가 왕을 도와 정치개혁에 나서자 김용은 자신에 닥칠지도 모를 불이익에 심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또한 동료무신들과의 군총軍寵경쟁에도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자연히 공민왕을 정점으로 정치개혁을 이루려했던 문신의 입장과 왕을 보위하면서 자신들의 권세를 보장받고 싶어 했던 근위무신측근들의 입장이 충돌하는 양대 정점에 문무를 겸비한 김득배가 있었던 것이다. 한데, 홍건적 격퇴 전에서 김득배가 큰 공을 세우자 추밀樞密신분으로 전시 왕을 보좌하고 있던 김용은 차제에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세운을 비롯 안우, 이방실 등 무공경쟁자는 물론 개혁의 주체세력 김득배까지 한 번에 일망타진할 계략을 꾸며 평소 의심 많던 공민왕을 끌어들인 것이다.
④오호라 황천이시여! -정몽주의 대의- 정몽주는 김득배가 장원으로 뽑은 문생門生이다.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예문검열이라는 정직淸職에 있으면서 스승이 간웅奸雄의 모함에 희생되는 현장을 목도한 선비로서 천도天道는 밝아야한다는 신념아래 외롭고 험난한 길을 택했으니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예장禮葬해 주는 일이었다.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대의로써 논리정연하게 조목조목 아뢰면서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지줄 것을 청하자 임금도 어디 하나 흠잡지 못하고 허락하였다. 정몽주는 군왕을 탄핵이라도 하듯 피눈물로 제문과 만시輓詩를 지어 상주 남쪽 10리쯤(상주시 오갈미로 추정)에 예장하였다. 정몽주는 “오호라, 황천皇天이시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대개 복선화음福善禍淫 하는 것은 하늘이요, 상선벌악賞善罰惡하는 것은 사람이라 들었으니, …태산 같은 공로가 있는 사람의 피로 칼날을 적시게 하였는가?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 하늘에 묻는 바이다. …오호 운명이로다. 어찌 하리오, 어찌 하리오.”,
이 같은 정몽주의 피눈물 나는 제문에 앞서, 먼저 판을 벌렸던 역신逆臣조일신趙日新의 간계 또한 이참에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조일신 역시 공민왕을 원나라에서 수종한 1등 무종공신이다. 김득배와 유숙이 공민왕의 정치개혁에 나서자 조일신 자신에 닥칠 불이익을 우려한 나머지 불만을 품고 김득배와 유숙을 제거할 음모를 은밀히 꾸몄다. 마침 원나라의 막강한 재상 탈탈脫脫이 보낸 고려조정의 관리임명명단을 사신들이 들고 들어오자, 조일신이 그들을 매수해 “김득배와 유숙이 국정을 농락한다.“면서 관리임명명단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뇌물을 먹은 원나라 사신이 이 내용을 공민왕에게 요구하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워낙 막강한 탈탈의 위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개가 잘린 난계가 4년 남짓(1352-1356)깃골로 낙향해 소요하며 때론 예천의 무이리 청원정淸遠亭(경북문화재자료533호)을 지키고 있던 전원발全元發(1288-1358・菊坡)을 자주 찾아뵈었다. 이 당시 국파는 66세, 난계는 42세였으니 ‘찾아뵈었다’는 말이 더 옳은 표현일성 싶다. 일찍 부친을 잃은 난계로선 국파가 부친과 원나라에서 동방급제하고 그곳에서 오랜 관직생활을 하고 돌아온 전원발이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전원발의 모친이 상산김씨였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국파역시 후학 김득배를 ‘지친 새’에 비유하며 반겨 맞아주었다(菊坡實記).
지친 새 돌아오누나/ 倦鳥歸(龍宮閑居 金蘭溪得培寄詩次其韻ㆍ용궁에 한거할 때 난계 김득배가 시를 부쳐와 그 시에 차운함)
강 넓어 큰 물고기 마음 것 놀고/ 江闊脩鱗縱 숲 깊어 지친 새 돌아오누나./ 林深倦鳥歸 전원으로 돌아옴이 내 뜻이지만/ 歸田乃吾志 진작 기미를 알아서는 아니었네./ 非是早知機
이 시에서 ‘기미를 알아서[知機]’란 말은 조일신의 모함사건을 두고 한 말인데, 그만큼 사건이 갖는 사회적파장이 컸음을 의미한다. 전월발 자신이 원나라에 있을 적부터 김득배와 조일신 등 고려의 수종신들과 두루 교류한 일이 있지만, 조일신이 그 같이 엄청난 계교를 꾸며낼 줄은 미처 그 낌새조차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시대의 인물 이만인李晩寅도 이 시를 두고 “…국파가 당시의 일을 보니 근심스럽고 간신이 흉포하게 역행함을 보고는 뜻이 없어졌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이 당시 난계가 국파에게 보냈다는 시의 원문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에도 난계는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국파가 반가웠던지 소를 타고 성화천가의 청원정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말을 타고 질풍같이 전선을 누비던 장수가 어찌 소를 타고 왔을까. 여기엔 필시 자신이 지향하고자하는 바가 내포되어 있을 터인 즉 노자의 청우고사靑牛高士 모습이 아니겠는가! 노자가 청우靑牛(물소)를 타고 서역으로 가는 관문을 지서며 노자경老子經을 남겼는데, 노사사상에는 은연 중 개혁과 혁명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중국이나 유경儒經에서는 금기되다시피 하였으나 개혁주의자들은 노자경을 진경眞經으로 여겨왔으니 난계의 굽힐 줄 모르는 정치개혁의 의지를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 돌아본 바와 같이, 김득배 선생이 정치개혁과 양차에 걸친 홍건적 난을 대파하고 대공을 세우고서도 흉간兇姦김용의 집요한 모해謀害로 값진 희생을 치러낸 사건이다. 난계 선생이 이루지 못한 개혁의 꿈은 이제 그 후손들의 몫으로 남았으니 그 목마른 영혼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선생의 희생이 있은 지 30년 후인 공양왕4년(1392년)전의시승典醫寺丞방사량房士良의 건의로 선생의 무고함이 밝혀져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세조2(1456년)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양성지梁誠之의 상소로 문충공文忠公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경기도 연천의 고려숭의전高麗崇義殿과 상주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제향 되기에 이르렀다.
⑵서흥김씨의 숨결, 윤필암潤筆庵
서흥김씨瑞興金氏는 선생의 마나님이 되시고, 윤필암은 마나님이 세우신 문경의 절집이다. 마나님의 부친은 판도판서版圖判書김세구金世丘이며, 조부는 김방경의 참모로 삼별초 난 진압과 일본원정에 출정하여 공을 세운 상장군 김천록金天祿이다.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밀직사사密直司事이백년李百年의 딸이 된다. 이백년은 이천년李千年〮•이만년李萬年•이억년李億年•이조년李兆年등 동생들과 함께 고려사회를 구가하던 명문인데, 특히 이조년은 안향安珦의 문하육군자門下六君子중의 한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명 문장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김득배와 함께 홍건적 격퇴 전에 출전했던 이승경李承慶은 이천년의 조카로 서흥김씨에게는 외숙이 되며, 난계의 부친 김록과 원경元京에서 동방급제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씨에게는 두 오빠와 두 여동생이 더 있었는데,김봉경金鳳璟과 김봉환金鳳環이 오라버니가 된다. 김봉환은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해왔을 때 안동부사로 공민왕의 뒷바라지를 한 사람인데 매부 김득배가 상주에서 참화를 당하는 장면을 눈물로 지켜봐야만 했다. 하물며 부군夫君의 모진참화를 몸소 치러내야 했던 서흥김씨 부인께선 오죽했을까. 여사께선 남편의 숨은 거처를 발설하여 비극을 초래했다는 석연찮은 시선 속에 가군家君을 눈물로 떠나보낸 후,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셔도 말하실 수 없었던 숫한 애증후박愛憎厚薄의 틈바구니에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해 지내셔야만 했던 그런 회한悔恨의 세월을 온 몸으로 받아내다가, 의지해오던 뭇 인연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자 사재私財를 털어 절집 윤필암을 짓고 머리를 깎아 산승山僧이 되신 분이시다. 나옹선사로부터 받은 법명이 묘경妙煚이라 했다. 이 같은 서흥김씨의 절집창건 이야기는 이색이 쓴 『동문선』 의 「윤필암기潤筆菴記」에 나온다. 승려 각관覺寬과 함께 찬성사 김득배의 부인 김 씨가 우왕 6년(1380) ‘윤필암(문경시 산북면 대승사 부속 비구니 암자)을 조성[造成;釋覺寬與金贊成諱得培之室金氏造潤筆菴]’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같은 내용을 상주의 한문학漢文學을 집대성한『상주 한문학』에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윤필암: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17 윤필암을 조성한 우왕 6년은 김씨가 대략 63세 때 쯤으로, 남편이 원사寃死한지 18년, 공민왕이 자재위子弟衛에게 피살 된지 6년 후의 일이다. 또 이 해는 서흥김씨가 존신하고 따랐던 나옹선사가 열반한지 4년 만으로 선사의 부도비가 신륵사에 세워진 다음해가 된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의 실정을 종종나무라는 등 김득배의 죽음에 대해서도 동정적이던 홍태후洪太后(1298-1382․공민왕의 모후)가 세상을 뜬 해 이기도 하다. 이처럼 남편의 신구伸救와 왕생往生길에 실마리를 쥔 주변의 인연들이 하나 둘 다 떠나버리자, 어디 희원希願을 둘 데가 없어진 김 씨는 모든 업보를 거두어 불심에 귀의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이 지금 여주 신륵사 나옹선사懶翁禪師의 탑비塔碑인 단월질檀越秩에 남아있다. 탑비는 나옹이 양주 회암사에서 물밀 듯 밀려드는 불자행렬에 놀란 조선의 조신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밀양의 영원사로 쫓겨 가던 중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단월질은 그 참여자들 명단이다. 탑기塔記는 나옹과 가까웠던 이색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한수韓脩가 글을 썼다. 단월질에는 ‘첨의찬성사 김득배 처 동주군부인 서흥김씨 묘경僉議贊成事 金得培 妻 董州郡夫人 瑞興金氏 妙煚’라는 명문을 비롯해 시동생 낙성군의 부인 ‘김제군조씨金堤郡趙氏이름도 있다. 낙성군의 셋째아들 김균金鈞도 모친 김제조씨를 따라 나선 듯 이름이 올라있다. 그 외에 셋째 사위 조운흘趙云仡과 상락군김씨묘영上洛郡金氏妙英과 묘명妙明, 상락군묘?妙□등 낯익은이름들도 잇달았다.묘영과 묘명,묘□ 등 이 세 분도 김 씨의 딸들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서흥김씨는 시댁식구들과 자진의 가솔들을 데리고 상주에서 멀리 여주의 나옹선사 다비현장을 찾았던 것이다. 돌아보면, 그간 김 씨는 남편의 신구伸救길에는 뭇 신료들을, 찾았지만 이미 공민왕 주변의 바른 말하는 신하들이 거의 제거된 뒤라 김 씨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었고, 다만 남편의 죽음에 일말의 동정심을 갖고 있던 홍태후 만이 유일하게 왕에게 충고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일찍이 홍태후는 아들 공민왕이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내쫒는 실정을 거듭하자 문안드리러 온 왕을 눈물로 나무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정사를 신하에게 위임하시며 공로가 있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토목공사를 대규모로 진행하여 화기和氣를 손상하시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크게 기대를 가지고 왕이 임금으로 되지 못할까 근심하여 충혜왕의 무모한 짓을 원망하고 있었으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소. 그런데 왜 도리어 그때만 못하오? …” 라고하자 왕은 불쾌한 빛을 보이며 말하기를, “…어머니는 왜 그렇게도 아들의 허물을 과장하여 말씀하십니까? 사람을 많이 죽이는 죄는 제가 범하지 않았고 단지 난신亂臣을 숙청한 따름입니다.” 라고 변명하면서 이후로 태후를 원망하고 멀리하기시작 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랬던 만큼, 서흥김씨는 남편의 신원은 오직 홍태후에게 달려있다 보고, 마침 숭경윤崇敬尹(洪太后殿侍衛府使ㆍ홍태후 시종관)으로 있었던 시동생(낙성군)에게 그 길을 부탁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선치는 홍태후는 물론, 남편의 문생 정몽주와 사위 노숭盧嵩의 은문恩門이색에게도 형님 김득배의 신구에 힘써줄 것을 부탁했을 것이나, 때가 때인지라 진척이 없었고, 부인께서 평소 존신하고 따랐던 나옹마저 열반하자 선사의 탑비준공식에 다녀오고 나서 유일한 신구의 희망이었던 홍태후까지 세상을 뜨자, 김 씨는 우왕6년 윤필암을 조성하고 남편의 해원 길에 나섰다.
①청산은 말없이 살라하고 –서흥김씨의 입산- 남편의 신원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태후가 아니던가. 18년의 공덕이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후사後嗣도 없이 딸 만 다섯을 둔 김 씨로서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고, 새삼 나옹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돌아보면, 김 씨는 석연찮게 남편을 떠나보낸 후 그 죽음을 나옹선사에게 물어오는 등 오랜 불정佛情을 쌓아온바 있는데, 선사와 남편과의 인연역시 여사만큼이나 남달랐었다. 남편이 원나라에 머물고 있는 왕기王祺(훗날 공민왕)의 의전을 맡아보는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있으면서 왕자에게 공양드리러 오는 선사와 가까이 지낸 적이 있는데다가, 선사가 공민왕恭愍王 7년 (1358)귀국하고 부터는 왕사王師로서 공민왕을 위해 자주 예불을 올리려 궁궐을 찾았을 때도 왕명출납을 맡아보고 있던 추밀원樞密院의 김득배의 손길을 빌렸고, 이때마다 홍태후도 후한 보시를 선사에게 내리곤 했다. 또 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으로 몽진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적이 마침 선사가 머물고 있는 해주 신광사神光寺까지 넘보려 들었으나, 김득배의 유군遊軍에 발이 묶여 나옹이 무사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김 씨는 남편이나, 선사나, 홍태후 같은 뭇 인연들과 회자정리會者定離를 하면서 여생을 나옹의「청산혜靑山兮」처럼 사랑도 미움도 훌훌 다 벋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아가며 불심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김 씨는 말없이 살려고 머리를 깎아 청산에 들었고, 티 없이 창공을 벗 삼으려고 불심을 두드렸다. 부군의 해원을 위한 마지막 도리가 오직 이 길 뿐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김 씨의 행적을 줄 곳 보아온 이색이 마침 각관스님이 김 씨와 더불어 절집을 짓고 사찰 창건기를 부탁해오자, 이색이 윤필암기를 남기게 되었다. 김 씨는 뜻하지 않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 의분과 자책, 그리고 그믐밤 같은 절망 앞에 갖은 책망을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 작은 가슴으로 받아내며 스스로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해오다가, 끝내 산승山僧의 몸으로 남편의 그 외로운 영혼 끌어안고 눈을 감으신 분입니다. 김 씨로선 죽는 날 까지 앉고 가야할 앙금이었지요. 그때의 남편참화사건이 누군가가 속죄양이 더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비켜설 수도, 거역할 수도, 항변 할 수도, 둘러댈 곳도 없는 그러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속죄양말이지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돌아서서 김 씨에게 원망의 시선을 흘리곤 하나봅니다. 아마도 그건 남편의 극단적인 죽음을 맞게 한 빌미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김 씨의 입장에 서보지 않고서는 무슨 구실로도 그녀를 성토할 자격이 없습니다. 돌아서서 남몰래 흘렸을 그녀의 참회의 눈물을 상상이나 해 보셨는지요. 김 씨 역시 남편 못지않은 희생자요 피해자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묘약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까지 지루할 정도의 긴 글로 서흥김씨를 재조명 하고 나선 것도 조금이나마 묘경스님의 심경으로 다가서보고자 함에서입니다. 이 내용은 2008년 1월 22일 20시 45분 안동불교방송에서 대담형식으로 자세히 보도를 한바 있습니다.
■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1320~1376)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모신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석비도 세웠 다. 비는 3단의 받침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 부 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몸체의 양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 으며, 지붕들은 목조 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우왕 5)에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 된 비의 형식이 잘 드러난다.
■ 여주보제존자 석종비 음기普濟尊者 石鐘碑 陰記에 실린 상산김씨명단 1. 김제군 조씨金堤郡趙氏: 낙성군洛城君김선치金先致의 부인. 2. 전낭장 김균前郞將 金鈞: 낙성군洛城君의 셋째 아들. 3. 첨의찬성사 김득배처 동주군부인 김씨묘경僉議贊成事 金得培妻 董州郡夫人 金氏妙㷡: 문충공文忠公김득배金得培의 부인. 4. 판전교시사 조운흘判典校寺事 趙云仡:문충공 김득배의 셋째 사위. 5. 상락군 김씨묘영上洛君 金氏妙英:문충공 김득배의 딸. 6. 상락군 김씨묘명上洛君 金氏妙明:문충공 김득배의 딸. 7. 상락군 낌씨 묘?上洛君 金氏妙?:문충공 김득배의 딸.
여주 신륵사 내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 비문에 문충공의 마나님 서흥김씨를 비롯 그 일가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보물 제229호.
○상산군 김득제의 생애
상산군은 부친 김록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충숙왕2년(1315)에 문경 흥덕동 깃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정당문학 난계 김득배의 3년 터울동생이고, 낙성군 김선치의 3년 터울 형이다. 충목왕1년(1345)4월에 30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끊임없는 전쟁으로 얼룩진 고려사회의 특성상 주로 무관으로 활약 하게 되었다. 공민왕10년(1361)20만의 홍건적이 물밀듯 개경을 함락시키자, 공민왕은 황급히 안동으로 피난길에 나서면서 추밀원 직학사 김득제에게 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주어 왕의 어가를 호종하게 하였다. 마침 어가가 경기도 광주에 이르렀을 때 상주판관 조진이 1,400명의 정병을 인솔하고 올라오자 김득제로 하여금 통솔케 하였다. 다음해에 판각문사判閣門事로 형님 김득배를 따라 개경수복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추충분의안사좌명공推忠奮義安社佐命功臣중대광삼사우사重大匡三司右使도형벽상일등공신圖形壁上一等功臣에 올랐다. 그러나 간웅 김용 흉계로 큰 고초에 든 형님에 연좌되어 화산花山으로 유배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 2년 뒤 김용이 간계가 들어나 처형되자, 다시 관직을 받고 홍건적을 격퇴한 전공으로 일등공신으로 녹훈 되었다. 우왕2년(1376)9월에 의주 원수義州元帥가 되었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가 영주寧州와 아주牙州에 침입하자, 왕안덕王安德과 목충睦忠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다. 우왕4년(1378년)에 또 왜구가 해주海州와 평주平州로 재침하자, 최영, 이희필李希泌,양백연楊伯淵등과 함께 왜적을 격퇴하였다. 그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으며, 거듭 왜구가 밀양과 영산寧山에 침입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가되어 이성계李成桂,·이림李琳, 유만수柳曼殊등과 함께 우인열禹仁烈을 도와 이를 격퇴하였으며, 이 전공으로 상산군商山君에 피봉되었다. 1381년에 왜구가 다시 진포鎭浦와 한주韓州에 침입하자, 왕안덕의 구원요청을 받고 출전하여 왜구를 잇 따라 격퇴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산양현 영강가로 하거하여 절조를 지켰고. 태종 때 이르러 다시 상산군에 봉해졌다. 실전 된 묘소를 순조28년(1828)후손 우종禹鍾과 술조述祖등이 문경시 산양면 영강가 백영동白英洞에 설단하고 묘표를 예조참판 강세륜姜世綸이 지었는데, 그 후 후손 군수 기환基煥이 단비를 다시 세워 썼다. 상산군은 용인의 정암서원正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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