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장례
이덕대 수필가
아직도 사진은 살아있다. 몹시 긴장한 얼굴이다. 번쩍하며 터트려지는 순간 조명이 영혼을 앗아갈지 모른다. 억지웃음에 주춤주춤 물러서려다 잡힌 모습이라니...... 찍은 것인지 찍힌 것인지 애매하다. 청춘의 얼굴이고 봄의 얼굴이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마음에만 남아있는 얼굴도 몇몇 보인다. 시간이 데려가는 것을 어찌할까.
사진 뒷면에는 아련한 마음을 담은 글도 있다. 바래버린 잉크 탓인지 글씨는 흐릿하다. 선정에 든 수도승이거나 청춘의 마음이 되어 의미를 살펴야 한다. 묵연히 바라보다 옛 가슴을 열고 추억의 실타래를 푼다. 모르겠다. 가난이 확신조차 쉬이 하지 못하게 붙들던 세월을 살아온 탓이런가. 사랑 고백인지 우정 다짐인지 알기 어렵다.
젊음의 힘으로 꾹꾹 눌러쓴 글은 힘이 있다.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놓고 부끄러움 반 용기 반으로 쓴 글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흑백으로 만들어진 글들은 사랑보다 우정에 가깝다. 어둠과 밝음으로만 만들어진 사진은 회상용 소품으로 최고다.
추억은 담백할수록 멋지게 저장된다.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은 마당 넓은 집의 오래된 우물처럼 쉽게 마르는 법이 없다. 만든 시간이 색깔을 빼앗았지만 마음 흔적은 충분히 남아있다.
오래전 어느 날 친구가 선물했던 사진첩이 수명을 다했다. 푸른 꽃잎 무늬 비닐 커버에 금색 스프링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앨범이다. 반세기도 훨씬 이전의 얼굴과 풍경을 담고 서가 한쪽을 지켜왔다. 세월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흑백 사진을 정리하는 마음은 아쉬움이다. 누렇게 변색된 사진과 종이들은 시간이 데리고 간 청춘의 모습과 꼭 닮았다. 아날로그 감성을 정리하디지털 세상으로 이장한다.
군문으로 떠나기 딱 일주일 전, 그날 밤은 유난히 추웠다. 뜨거운 우정은 차가운 이별을 어렵게 이겨냈다. 정주민의 삶이 유목민의 일상으로 바뀌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가는 길의 끝을 가늠하기엔 많은 것이 흐릿했다. 막연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미래의 길처럼 여겨지던 때다.
음력 섣달 열두째 날 휘영청 달은 밝았다. 달빛을 붙잡은 감나무 가지는 대문 앞 마당가 짚동을 휘감았다. 적당한 어둠과 어우러진 달빛은 짚동 위 커다란 멍덕 위에서 채 녹지 않은 눈을 붙들고 나부죽이 누웠다. 술을 먹을 나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었다. 헤어짐에는 노래보다 술이 더 나음을 어른들로부터 이미 배웠다. 그날 우리는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취했다.
마음은 술을 이기려 했지만 몸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꾸만 군에 가야 되냐고 가지 않으면 안 되냐는 말이 고장 난 유성기처럼 여러 번 헛돌았다. 마음이 슬퍼졌다. 떠남을 아쉬워하는 자리가 축하할 자린지 위로할 자린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위로받고 누가 위로하는지 헛갈렸다. 어깨를 부둥켜안고 서로가 등을 두드렸다.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방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자시가 지났는지 뒷집 수탉이 몇 번을 울었다. 물을 마시고 싶어 뒤척이다 창호지 구멍으로 흘러드는 달빛에 눈을 떴다. 방안은 어지럽다. 안방에서 주무시는 어머니의 잠꼬대가 들렸다. 시도 때도 모르고 한밤중 걸핏하면 우는 얼빠진 닭을 어머니는 가끔 핀잔했다. 읍내 엿장수가 엿값으로 받은 수탉을 뒷집에서 돈과 바꾼 것이라 제 맘대로 운다는 말을 보태셨다. 하는 일 없이 모이만 축내는 수탉을 왜 아직도 기르는지, 모이값으로 시계를 사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우스개 말씀도 하셨다. 큰형이 사다가 걸어둔 괘종시계가 밥만 제때 주면 새벽 수탉 홰치며 우는소리보다 정확하다고 여러 번 칭찬했다. 닭 울음소리에 어머니가 깨시기라도 할까 봐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마루로 나섰다.
북두칠성이 옆집 돌감나무를 한참 비켜선 것으로 보아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벗은 짚동 안에 몸을 숨기고 울고 있었다. 희부연 달빛 탓에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았지만 눈물 콧물 범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던 우정은 깊었고 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왜 그러고 있냐 묻지 못했다.
추운데 방으로 들어가자며 손을 잡고 끌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20리도 더 떨어진 마을에 그는 살았다. 빈속에 추운 새벽길을 가는 벗과 그렇게 헤어졌다. 남쪽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마치 여름밤 장맛비를 머금는 것처럼 깜빡였다. 어둠 속을 터득 거리며 가는 그를 말없이 배웅하며 서산에 기우는 달만 쳐다보았다.
그가 두고 간 사진첩을 본 것은 아침을 먹고 정신을 차린 후였다. 추억으로 갈무리하고 싶은 사진을 정리하며 며칠을 보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와 함께했던 등산 사진까지 기억나는 대로 설명 자료를 만들어가며 정성스레 붙였다. 이제 군문으로 떠나면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와 살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추억 정리를 위한 벗의 속 깊은 선물에 정리하던 손이 자주 멈추었다. 일주일이나 오리고 자르고 붙인 사진첩을 작은 사랑방 벽장에 넣어두고 집을 떠났다. 무서리가 돌담 가득 내렸다.
사진첩을 고향 집에서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결혼한 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다. 서른 번에 가까운 이사를 하면서 앨범은 늘 추억 저장고가 되어 곁에 있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사진첩을 뒤적이며 용기를 얻고 위로받았다. 청춘의 시간은 미래를 향한 삶의 추동력이다. 떠나간 벗도 사라진 이웃도 사진첩에서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흑백의 아날로그 감성은 질박하나 언제나 따스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박한 질감은 살아갈수록 오래된 우물 속 뱀고사리처럼 맑고 청신한 느낌을 준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영과 일이 통제하는 디지털 세상이다. 천연색 사진을 마음껏 촬영하고 가상의 저장 공간에 저장한 후 필요하면 언제나 꺼내 볼 수 있는 시대다. 원하면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가지붕 굴뚝에 오르는 밥 짓는 연기같이 사람 냄새 흐뭇한 흑백 감성까지 나눌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집터서리 말라버린 아주까리 대궁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서가 한쪽을 터 잡고 있던 사진첩을 정리한다. 세월이 흑백마저 용납지 않는 사진을 더 이상 보관하기가 어렵다. 앨범 첫 장에 남아있는 “친우가”라는 글을 사진으로 찍어 벗에게 보내며 아날로그 장례식을 치른다고 알린다. “50년, 긴 세월이었네” 즉시 디지털 답변이 날아온다. <끝>
이덕대 의 수필 '아날로그 장례' 서평/우병택(문학평론가)
이덕대 작가의 수필 '아날로그 장례'는 아날로그 사진첩이라는 매개를 통해 시간, 기억, 우정,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주제 및 내용 분석
이 수필의 핵심은 오래된 아날로그 사진첩을 정리하며 친구와의 추억을 반추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겪는 변화와 상실감이다.
추억의 보존과 아날로그 감성
작가는 입대 전 친구에게 받은 사진첩을 통해 오래된 우정을 되새기게 된다. 사진 속 희미해진 잉크 글씨, 바래버린 흑백 사진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기록을 넘어, '청춘의 마음'과 '사랑 고백인지 우정 다짐인지 알기 어려운' 시절의 순수하고 강렬한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첩은 힘들 때마다 용기를 주고 위로받던 '정신적 도피처'이자, 과거로 돌아가 친구를 만나는 통로였다. 작품 초반에 묘사된 친구와의 이별은 단순히 헤어짐이 아닌, 성장통이자 강한 우정의 증명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날로그 장례'의 의미
수필 제목이자 핵심 주제인 '아날로그 장례'는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고 디지털화하는 행위를 상징한다. 물리적인 사진을 스캔하고 파일로 저장하는 것은 아날로그적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디지털이라는 영원한 저장 공간으로의 이주를 뜻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세월이 흑백마저 용납지 않는 사진을 더 이상 보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오래된 사진에 대한 작별 의식을 치르게 된다.
디지털 시대와의 대비
수필은 '지금은 일과 삶이 통용되는 디지털 세상'과 '손때 묻은 아날로그 사진첩'을 대비한다. 디지털 사진은 '무한한 저장 공간'과 '언제든 공유가 가능한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작가는 아날로그 사진의'덤덤한 질감'과 희미한 흑백 감성'이 주는 울림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는 단순히 매체의 변화를 넘어, 느림과 기다림, 손으로 만지던 촉감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문체 및 표현의 특징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문체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깊이 있게 다루며, 독자들에게 정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감각적인 묘사
"번쩍하며 터트려지는 순간 조명이 영혼을 앗아갈지 모른다," "바래버린 잉크 탓인 글씨는 흐릿하다" 등 시각적, 촉각적인 묘사를 통해 아날로그 사진의 특성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흑백의 미학:
흑백 사진이 주는 '최상의 소품'이라는 표현은, 색이 없는 사진이 오히려 더 깊은 추억과 감성을 담는다는 역설적인 미학을 강조한다.
총평
'아날로그 장례'는 개인의 소중한 기억을 되짚어보는 과정을 통해, 현대인이 겪는 아날로그적 가치와 디지털적 가치 사이의 충돌과 조화를 섬세하게 다룬 수작으로 평가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영속성에 대해 사유하게 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수필은 특히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진한 향수를, 디지털 세대에게는 과거의 감성에 대한 신선한 통찰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