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산 김석진 선생님
– 주역과의 인연 –
실업계 고등학교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퇴근 후에 컴퓨터 학원에 들러서 컴퓨터를 배우게 되어 BASIC, Fortran, Cobol, C++ 등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였는데, 특히 C++ 언어가 어렵기도 하고 기능도 다양한 것 같이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하였다. 고려 수지침을 공부할 때 오윤육기(五運六氣)라고 하여 생년월일로 사람의 오행(五行) 체질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를 프로그램하기로 생각하고 몇 달 동안 자나 깨나 몰두하여 프로그램을 완성하였고, 학교에서 컴퓨터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사무실에 윤모라는 사람이 들어오더니 대뜸 ‘류종열 선생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라고 대답을 하니 자기는 주역(周易)을 공부한 사람인데 주역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설시(揲蓍, 주역에서 점을 치는 방법 중의 하나)를 하여 괘효를 입력하면 효사(爻辭)가 즉시 나타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데, 수소문하다보니 누군가가 대전상업고등학교의 류종열 선생을 찾아서 상의해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몇 개를 공부했지만 세월이 지나 새로 나온 비주얼(Visual) 계통의 프로그래밍 도구는 배우지 않아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컴퓨터에 조예가 깊은 유능한 제자인 정무영 군에게 상의하니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설계와 한문(漢文) 입력은 내가 맡고 프로그램은 정무영군이 맡아 제작하였다. 의뢰인은 해석문을 영문으로 입력하여 달라고 하여 별도의 용역을 주었으나, 내가 사용하기 위하여 한글을 입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허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서점에서 주역책을 세 권을 사다가 읽고 내 생각으로 가장 비슷해 보이는 것으로 입력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주역과의 첫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에 길을 가다가 ‘대산 주역 강의(大山 周易 講義)’가 시작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되어 강의 장소를 찾아가서 대산 김석진(金碩鎭)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왜소하고 수척한 체격이었지만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비상함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이로부터 20년 넘게 지속된 선생님과의 사제 관계가 시작되었다.
주역을 2독(처음부터 두 번을 배움)을 하였는데 1독을 마칠 즈음에 선생님께서 ‘문산(文山)’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호송시에 이르기를
錦繡江山文在中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학문이 있으니
自然之妙古今同 자연의 묘한 이치는 고금과 같도다
學經種德承先烈 경서를 배우고 덕을 심어 선열을 이으니
其號其名永不窮 그 호와 이름이 영원히 끝이 없으리라
이름자인 종(種), 열(烈), 호에 들어있는 문(文), 산(山)을 넣어 지은 시이다. 자랑스러워서 액자에 넣어 서재에 걸어놓고 매일 보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한문과 해석문을 입력할 때 구입한 세 권의 책에는 분명히 한글로 번역되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무척 많았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그 많던 의문점들이 환히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특히 강의 끝에 독경(讀經, 책을 소리내어 읽음)을 하실 때는 그 청아한 목소리에 가슴이 울리는 것 같아 따라 읽으면서 큰 희열 느꼈다. 매주 금요일마다 유성도서관에 가서 흥미있고 유익한 강의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다. 주역 2독을 마친 후에 한시(漢詩) 강의를 듣고 나서 제대로 된 한시를 짓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약 20년에 걸쳐서 시경, 서경, 중용, 주역전의 등을 두루 공부하였으나 하나를 외우면 둘을 잊어버리는 부실한 기억력으로 학문적인 성취는 이루지 못하고 괜히 대산 선생님 제자라는 이름만 자랑하고 다닌 것 같다. 강의 중에 수많은 경서를 인용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그 높은 학문과 비상한 기억력에 감탄을 하면서 게으른 제자가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대전에서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이던 ‘주역전의’ 강의를 마치면서 유성관광호텔에서 성대한 종강식이 거행되었는데,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이를 기념하는 시를 두 수를 지어 종강식장에서 발표하였다.
讚大山先生(대산 선생님을 기리며)
大山碩老杏壇行 대산 선생님께서 배움의 터를 마련하시니
雲集同人講習精 운집한 동인들이 배우고 익힘에 정진하네
休命能成天意順 휴명이 능히 이뤄짐은 천의에 순응함이니
艮方易道結花榮 이 나라에 주역의 도가 활짝 꽃을 맺었네
謝大山先生(대산 선생님께 감사하며)
昏迷塵世獨孤行 혼미한 티끌세상 홀로 외로이 살아오다
景福從師學問精 큰복으로 스승을 따라 학문에 정진했네
恩似大山何可報 큰산과 같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리오
僅盟文道繼承榮 겨우 문도를 계승한다고 다짐할 뿐이네
선생님께서 주재하시던 신명행사(神明行事)에 매년 참여하였고, 매년 음력 1월 2일에 선생님 댁에 가서 세배를 드리고 동도(同徒)들과 나누는 덕담과 대화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한시대회에 나아가 괜찮은 상(賞)을 받아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면 기뻐하시면서 ‘글월문자가 들어있는 문산(文山)’이라는 호(號)답게 활약한다고 칭찬하여 주셨다. 특히 서울특별시에서 개최한 조선왕조과거대전에서 ‘을과 급제’한 것을 보고드렸더니 선생님의 일처럼 크게 기뻐하셔서 조금이나마 제자의 도리를 하였다고 위안을 삼기도 하였다.
2022년 10월 그동안 써왔던 수필, 기행문, 한시, 서예 작품을 모아 고희기념문집으로 ‘세월따라 마음따라’라는 책을 발간하고 가장 먼저 선생님께 보내드렸더니 받아 보신 바로 다음 날 전화를 주셨다. ‘책의 내용도 좋고 표지도 잘 만들어서 문산이란 호를 빛내주어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목소리가 전보다 맑지 않으셨다. ‘선생님 건강하시지요?’하고 여쭈었더니 ‘나이가 90이 훨씬 넘었는데 건강할 리가 있나?’하시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맑은 목소리로 ‘그럼 건강하지’하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95세의 나이이니 건강이 쇠약해지셨는가 보다 생각하며 빨리 건강이 좋아지시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뇌리에는 불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몇 달 뒤인 23년 2월 15일에 같이 공부한 동학으로부터 대산 선생님께서 작고하셨다는 짤막한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향년 96세이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더 오래 사셔서 이 나라의 유도(儒道)를 더욱 선양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사라지게 되었다. 슬픔과 애도를 미뤄 둔 채, 준비하였던 만시(輓詩, 선생님의 작고를 애도하는 시) 10수를 이상학(李相學) 동문의 글씨로 족자에 써서 서울아산병원에 대전 태우회 회원들과 같이 참석하여 조문을 하고 빈소에 걸어두었다. 빈소에 만시를 거는 것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몇몇 회의적인 의견도 있었으나 천하의 대학자가 돌아가셨는데 제자들의 만시가 없으면 되겠는가?
조문을 마치며 돌아오면서 방명록에 ‘불원복(不遠復)’이라고 쓰고 돌아왔다. 주역 24번째 지뢰복(地雷復)괘 초구(初九, 첫째 효)에 나와 있는 ‘멀지 않아 돌아오리라’라는 뜻이다. 비록 지금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멀지 않아 다시 오셔서 이 땅에 못다 펴신 ‘주역의 도’를 다시 펴 주십사하는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