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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속에서도 감사하라(1938.2018.11.18. 추수감사주일)
시138:1-8
할렐루야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옆 사람과 서로 인사--감사하는 인생이 됩시다.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추수 감사절은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찾아 극심한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면서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the Puritan)들이 그로부터 1년 후 낯설고 물 설은 개척지에서 갖은 풍토병과 각종 생활의 질고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해 농사를 수확한 후 얻은 새 땅에서의 첫 결실을 감사하여 드린 감사 기념 예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실로 눈물과 감사가 뒤범벅된 벅찬 감동의 예배를 드렸던 그들이 바로 현대 미국을 탄생시킨 선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드렸던 첫 추수 감사절의 벅찬 환희는 단순히 한 나라의 건국 일화나 한 해의 추수의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자유의 존엄성을, 그리고 개척자정신의 고귀함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서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특히 이들의 후예인 미국 교회의 선교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의 자연스런 영향으로 추수 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건국자들이 가졌던 신앙과 개척정신을 크게 상실한 미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는 이 추수 감사절을 다시금 자신의 신앙의 활력을 소생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추수감사일의 유래는 잘 알려진 대로 청교도들이 메일 플라워를 타고 믿음의 자유를 찾아온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첫 추수를 마치고 드린 감사의 예배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년간 미국교회들에서는 추수 감사절 예배에서 ‘스콴토(Squanto)를 기억하자’는 운동을 벌리고 있다 합니다. 스콴토는 인디안 청년의 이름입니다. 청교도들이 마사추세츠주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하기 약 10년전 1608년 헌트라는 이름의 함장이 이끄는 영국 무역상들이 이곳에 먼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은 무역을 위해 만나게 된 왐파나옥 인디안 족을 만나 대화하다가 그들을 체포하여 스페인에 노예로 팔 넘기게 됩니다.
그중에 스콴토라는 청년이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페인의 한 친절한 사제에게 팔려 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의 인도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것을 배우면서 세가지를 기도하게 됩니다.
첫째는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고향에 돌아가면 자기를 잡아간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백인들과 협력하여 고향 땅을 스페인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기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영국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다시 사제의 허락을 받고 영국으로 떠나 존 슬랜니(John Slaney)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하다가 슬랜니의 도움으로 드디어 미국으로 가는 배편을 수소문하여 고향에 돌아오게 됩니다.
1619년 고향 떠난 지 10년만의 귀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왔을 때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자기 고향 가족 친족들은 모두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약속한 그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소수의 남은 자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해 청교도들이 도착합니다. 스콴토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 유창한 영어로 청교도들을 환영했고 청교도들의 정착을 돕습니다.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일단의 청교도들을 인도한 지도자 브래포드(William Bradford)목사는 그의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스콴토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준비된 특별한 도구였다. 그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어떻게 심는지--낚시를 어떻게 하는지--땅을 어디에 어떻게 개간하는 지를 가르쳤다.--그는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인도했다’ 첫해가 지난 간 후 청교도들과 스콴토 그리고 그의 인디안 친구들은 사이좋게 칠면조를 잡고 식탁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수년 후 그가 열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그는 청교도 지도자 브래포드 목사에게 자기가 천국에 편히 갈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부디 이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눈을 감기 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기도를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사 합니다.이 땅을 축복 하소서’ 오늘의 미국의 기적은 스콴토의 믿음과 감사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미국 교회들이‘스콴토를 기억하자’고 운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롭게 추수 감사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는 스콴토 이전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골 교회에 많은 돼지를 기르는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이라고 하면 너무 욕심이 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어느 날 돼지 한 마리가 8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당연히 그 교회 목사님은 소식을 듣고 ‘집사님, 축하합니다. 돼지가 새끼를 8마리나 낳았다면서요? 많이도 낳았네요’라고 축하를 하면 그 여자 집사님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목사님, 8마리가 뭐가 많습니까? 옆 집의 돼지는 새끼를 12마리나 낳았다는데요’라고 말하더라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목사님이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그 집의 돼지가 새끼를 또 낳았는데, 이번에는 14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진심으로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이제는 만족하시지요? 돼지 새끼를 14마리나 낳았으니까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네요’ 그런데 그 집사님은 조금도 기쁘지 않는다는 듯이 ‘목사님, 14마리가 뭐가 그리 많습니까? 한 20마리쯤 되면 모를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님의 욕심은 돼지보다 심하네요’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속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대가 이처럼 넉넉한 조건 속에 사는데도 점점 감사를 잃어 버리고 사는 실정입니다. 과거에 비하면 정말 살기 편하고 좋았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감사하는 일에 인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욕심이 분수를 넘어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만 생각하더라도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감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물에 빠져서 사경을 헤메던 사람을 건져냈더니 옷이 젖었다고 불평하는 것과 똑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2018년도 추수 감사절기를 보내면서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감사하는 인생’이 되겠다고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환란속에서도 감사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과 환난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통과 환난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환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도 환난을 겪었고 우리에게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환난도 있지만 환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중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물질의 고통, 질병의 고통, 인간관계의 고통 물론 힘들고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가장 큰 고통은 신앙으로 인한 고통일 것입니다. 내가 한번 제대로 믿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할 때에 우리에게 이상하게 고통이 먼저 찾아옵니다. 그것이 남편으로 인해 올 수 있고 아내로 인해 올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집안 식구들을 통해 찾아올 수 있고 그것이 때로 교회를 통해서 찾아올수도 있습니다. 내가 은혜받고 새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시인 다윗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본문의 다윗의 시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고 난 뒤에 쓴 시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할 때 항상 법궤가 중심이었습니다. 행군할때에 법궤가 항상 앞에 있었습니다. 법궤가 앞에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를 갔습니다. 그래서 한곳에 도착하면 법궤를 가운데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여 머무르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그 하나님은 인도하시고 우리의 중심에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행위가 분명히 신앙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개인적으로 신앙적으로 비웃고 공격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실때에 너무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자 그를 비웃는 자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왕이란 사람이 저렇게 체신없이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내 미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때 가나안의 부족신을 믿는 어떤 자들이 내부적으로 그런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윗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개인적인 환난 삶의 환난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윗은 1절‘내가 전심으로 주게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환난이 있지만 어려움의 상황이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단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공격이 있지만 자신의 신앙을 유치하고 이상하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윗은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이 오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나쁜 행위들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면서 예배드릴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기도의 자리에서 찬양의 자리에서 후퇴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였습니다. 환난이 다가올수록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더욱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이런 다윗의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편을 보면 많은 다윗의 시들이 대부분 고난 중에 환난 중에 쓰여졌습니다. 가령 시편34편 같은 경우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쓴 시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미친사람 처럼도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암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환난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의 한가운데 있습니까? 더욱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어떤 환난이 있습니까? 환난을 이기고 주 앞에 감사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주님 앞에서 이 환난 속에서도 경배와 찬양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이 다가오고 잇다면 더욱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감사가 일어나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전심으로’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 감사가 되기 위해, 하나는 ‘말로만’ 하는 감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입술로 감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만’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마음을 다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돈으로만’ 하는 감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모든 문제를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사람은 매수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매수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감사를 물질로 표현해야 하지만, 그 물질에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한 물질을 드릴 때 전심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물질로 감사할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마음을 다해서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왜 마음을 다해서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의 감사가 전심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다한 감사가 되기 위해, 우리가 마음을 다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2.환난속에서도 받은 복과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감사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영적으로 성숙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기준은 삶의 조건이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은 절대 감사, 무조건 감사, 한평생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향기가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본 시는 다윗이 인생의 후반기에 주께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 크고 고마워 전심으로 부른 감사 찬양시입니다.
우리들은 약속을 믿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2절과 4절로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의 권위를 이 세상의 어떤 이름보다 높게 두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요, 능력이요 권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실 때, 그것은 곧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믿음으로 찬양과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완전하고 신실한 보호에 전심으로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열왕들이 나를 공격하고 내가 비록 환난 중에 있어도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이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창조의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할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세상에서 승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환난을 통과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로 과정 과정 고생이 있고 어려워도 마지막에 승리할 것을 알고 믿는다면 과정의 어려움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날에 이길 승리의 확신이 없으면 우리 인생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의 최후는 승리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절‘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주께서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좋을 때도 기도했지만 좋지 않을 때 더 많이 기도했어요. 그가 시편에 쓴 기도 시는 대부분 고난과 시련 중에 나온 기도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기 전에도 기도했고 임금이 되고 나서는 더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피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면 일반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다윗은 왕인 내가 하나님께 이토록 의지하는데 일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환난과 고난과 같은 상황을 그냥 두시고 우리의 마음에 응답을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한 내적인 능력을 주시어서 그 환경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기도하면서 예배드리면서도 먼저 우리의 눈 앞에 환경을 바라보면서 절망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기도 했는데 왜 예배드렸는데 그냥 환난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의 환경 고난의 상황을 허용하시면서 우리를 섭리하여 가십니다.
다윗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했습니다. 그가 감사로 예배를 드린 이유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주셨고 그를 강하게 해주셨습니다. 받은 은혜가 있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은 다윗이 응답받을 만한 자격이 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다윗에게 응답하실 때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강하게 하는 줄 믿습니다.
4-5절‘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마다 다 감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입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노예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출애굽 하여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밤낮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신발이 닳지 않았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죄많은 세상에서 구주 예수믿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기도할 때 도우시고 천국을 상속으로 받고 사는 성도입니다. 거기다가 오곡백과 풍성한 가을 추수까지 거두게 하셨으니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으면, 은혜 많이 받았으면, 복을 많이 받았으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내 인생의 장래도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강건케 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내 영혼을 장려해주시는 것입니다. 장려해 주신다는 말씀은 ‘권하여 좋은 일에 힘쓰도록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상에도 장려상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장려상은 지금 당장은 성적이나 실적보다는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바라보고 힘과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하여 주는 상입니다. 본문에서 장려해주신다는 말씀도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면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내 영혼을 만족케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감히 누가 나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이 땅에서 내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내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므로 내 영혼을 만지실수 있고, 위로해 주실 수 있으며, 격려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내 영혼을 만족시켜 줄자가 없습니다. 이 땅의 사는 모든 사람들의 피곤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육체만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정신적으로 더 피곤합니다. 이른바 영적인 피곤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피곤함보다는 영적인 피곤함에 지쳐있습니다. 육체적 피곤은 잘 쉬면 금방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피곤함은 그리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때로는 침체라는 것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예수 이름으로 영적침체야 물러가라 명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다 됩니다. 예수 이름을 많이 사용하여 여러분의 영이 강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 ‘마음’, ‘정신’을 말하고, ‘장려하여’라는 히브리어 ‘타르히베니’는 ‘용기를 북돋아 주다’라는 뜻이며, ‘강하게’는 ‘담대하게’라는 의미입니다.
연약함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타력이 와야 하고,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장려해 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마음과 정신에 용기를 북돋아 주심은 우리를 강한자로 만드시고자 하심입니다. 영, 마음, 정신이 강해지면 삶 자체가 강해지고, 삶의 모든 약함에서 풀어 줍니다.
내 인생은 내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고, 내 하나님은 내 인생을 좌우 하십니다. 신앙은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실천 되어지는 구체적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장려해 주시면 우리는 삶의 전역을 점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고, 역경을 정복하며 살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한 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이 강해야 하고, 영혼이 강해짐이 소원이어야 합니다. 허나 내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는 아니 됩니다. 내 영혼의 강함은 내가 나를 쥐어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장려해 주셔야만이 됩니다.
세상에서 오는 것들은 나를 약하게 만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는 나를 강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이 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타인에게 군림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한 믿음의 선한 능력을 갖고자 함입니다. 욥이 처절하고도 비참하게 자녀, 건강, 재산, 아내를 잃었으나 전보다 더 크게, 복되게, 갑절로 회복됨은 그의 영혼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시42:5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엡6;10절‘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했습니다.
위기 앞에서도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은 하나님께로부터만이 와집니다. ‘내 영혼을 장려하시어 나를 강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이 잘되면 범사가 잘됩니다. 강건함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오늘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자꾸 예배에 대해서 강조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라도 하라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의 영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영을 장려하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예배 참석해라, 은혜를 사모하라, 기도하라고 여러분의 영을 장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힘이 나서 펄펄하게 될 것입니다.
7절‘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일생이었습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도 받았지만, 환난이나 핍박, 인간적인 배신 등을 다 겪어본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영욕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을 한번도 배신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고 보장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향해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7절을 다시 보십시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한마디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소성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은 많은 환란, 고난 가운데 놓여있고, 누구도 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피할 길이 있고,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약속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시23:4절‘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했습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나를 소성케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환난 중에’라는 히브리어 ‘베케레브 차라’는 ‘환난의 가운데’ ‘고통의 심장에’라는 뜻이며, ‘소성케’라는 히브리어 ‘테하예니’는 ‘싱그럽게’ ‘윤기 있게’ ‘번성케’라는 의미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소성’을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 ‘큰 병을 앓고 난 뒤에 다시 회복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장려한다’는 의미가 위로와 격려, 소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차원이라면, ‘소성한다’는 의미는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주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시골에서 보리농사를 지을 때 거들어 보았습니다. 보리농사를 지을 때, 가을에 파종하여 추운 겨울을 어떻게 넘길까 걱정이 듭니다. 하지만 파종하면 조금 지나 파란 보리 싹이 납니다. 그리고 파란 보리 싹이 겨울을 지납니다.
추운 겨울에 파란 보리 싹이 눈에 덮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얼지 말라고 보리 싹을 밟아줍니다. 이것이 보리밭 밟기입니다. 보리밭을 밟는 것이 장려입니다. 죽으라고 밟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보리가 자라나서 거둘 때가 됩니다. 보리를 수확합니다. 이것이 소성입니다. 한마디로 장려가 호전시킨다는 의미라며, 소성은 장려보다 한 단계 진보된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도와주는 것이 장려라면, 산소 호흡기를 떼고도 살 수 있는 단계가 소성입니다. 장려가 호전을 의미한다면, 소성은 반전 혹은 역전을 의미합니다.
인간으로서는 환란을 피할 수 없기에 환란 속에서 시들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애를 쓰고 공을 들어서 이제는 안정될만한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서 한순간에 다 무너트리고 맘니다. 그리고는 공튼탑이 무너졌다라고 한숨을 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있으라 하시면 있어집니다. 없으라 하시면 없어집니다.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는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라도 나를 소성케 해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돈과 명예가 없는 자가 아닙니다. 건강이 무너진 자가 아닙니다. 학벌이나 배경이 없는 자도 아닙니다. 자기 영혼을 소성시켜 줄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내 영혼을 소성시켜 주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애가1:16절‘나를 위로하여 내 영혼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니라’그래서 자기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른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 영혼을 소성시켜 주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행복합니다.
8절‘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우리 인생은 사람, 물질, 환경, 사물,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삶은 관계형성입니다. 헌데 이것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우며, 불완전하고, 잘못되어 있으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비뚤어지고, 어긋난 관계를 완전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작하신 일을 완성시키시기까지 섭리를 멈추시거나 변경치 않으시고 계속 자신을 지키시고 보존하심을 믿었습니다. 환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세상인들이 ‘잘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막연한 위로요 희망사항일 뿐, 잘됨을 보장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허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과의 관계가 완전케 됨의 보장이요, 잘 됨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면 이 땅에서 우리와 관계되는 모든 것들은 자동적으로 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주안에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믿으십니까? 더 이상 이제 나약한 성도로 살지 마십시오. 세상 것으로 근심이나 걱정, 염려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승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내 영혼을 장려해 주시고, 소성케 하시며,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해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강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들은 정말 중심에, 얼굴에, 말에, 행동에 감사가 담겨 있어야 하지만, 이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감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변함없는 감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추수감사절에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감사를 말하며,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를 가르치며 범사에 감사하는 행복한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 세상에서 감사하며 살다 왔습니다’라는 보고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구나. 범사에 감사하며 살다 왔구나’라며 기쁨으로 맞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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