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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주님앞에 이르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말씀으로 인한 심령의 평안과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성도로서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함께 교독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들보와 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시작의 말씀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있다고 합니까? 없다고 합니까?
만약에 시도한다면 어떻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자신들을 볼 때에 영적으로 맹인처럼 보입니까? 다 보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말하기가 힘드십니까? 본다고 말하려니까 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고 말 하려니 보는 것처럼 살아왔고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진단을 내려 주셨습니다.
계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원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저는 이곳에 주신 말씀을 다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 드리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드릴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본다는 것과 관련된 말씀이 있죠?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의 상태가 어떠하다고 합니까? 눈 멀었다.
근데 그 상태를 안다고 합니까? 모른다고 합니까?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참된 증인께서는 당신께 나아와서 보게하는 안약을 싸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체널과 함께하시는 모든 분들
다 치유케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보는 눈을 가지시고 돌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보는 눈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모든 권면들은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받자
말씀을 들을 때 또는 읽으실 때마다 남에게 주어진 권면으로 듣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받자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말씀을 들으실 때 어떻게 들으십니까?
견책의 말씀이 주어질 때 나에게 적용을 시킵니까? 아니면 다른 분에게 적용을 시킵니까?
한 집사님이 증언의 말씀을 읽다가 손뼉을 치고 탄복을 합니다.
이! 이런 말씀이 있었네, 그리고 혼자말로 김집사님이 이 말씀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 말씀은 꼭 그 집사님에게 주신 말씀이야 라고 생각하고는 말씀을 복사하여 그 집사님에게 보냅니다.
요즘은 말씀 보내기도 쉽지요? 그런데 말씀을 잘못 보내면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톡에 말씀을 올리는 것은 좋지만 개인에게는 말씀 보내는 것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생각한 그 집사님에게 말씀이 전달되면 그 집사님은 그 말씀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 나에게 주어진 귀한 말씀이구나 이렇게 받아 들이는 성도들은 진짜 성도들입니다.
그렇게 받기 보다는 에구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나에게 보냈네 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아마도 그런 분들 한분도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무엇은 생각하지 않고 무엇만 본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교독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죠?
눅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은 보지 못하고 무엇은 잘 보인다는 말씀입니까?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모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인다 그렇습니까?
들보는 무엇이고 티는 무엇입니까?
티는 보일 듯 말 듯 하는 것을 티라고 하고요.
들보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마도 모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즘 집을 짓는 일에는 대부분 들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통나무 집을 짓는 사진입니다.
위에 올려진 나무들을 가지고 다 들보라고 합니다.
그 집안에서 제일 큰 나무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마다 자신의 눈속에 무엇이 다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들보들이 다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잘 보인다고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인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눈이 그런 것 같습니까?
에이 내 눈에는 들보가 없어 하실 것입니까?
성경은 있다고 합니까? 없다고 합니까?
내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 모두의 눈에는 들보들이 다 있다고 합니다.
인정하십니까?
편견, 위선, 거짓것, 선입관, 이런 들보들 있는 것 모르셨죠?
대부분 사람들의 눈은 공간적으로는 멀리 볼 수 없고요,
시간적으로는 바로 앞의 일도 볼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일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얼마나 큰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실험을 해 볼까요?
지난번 침례식 때 찍은 사진입니다.
무엇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옵니까?
자기의 사진이 제일 먼저 들어오지 않습니까?
옆에 다른 집사님은 자기의 모습이 잘 나왔다고 이야기를 해도 건성으로 듣고요 자기는 자기 사진만 잘 보이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보이고 느껴 집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렇다고 합니다.
책을 읽어도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알고 또 좋아하는 이야기와 말씀은 눈에 속 들어 옵니다만 다른 말씀은 이 말씀을 위하여 기록된 말씀처럼 보입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렇지요?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을 생각하시고 이런 눈이 있다면 예수님께 와서 눈 수술을 받으시길 권해 드립니다.
계시록 3장은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어떤 사람을 챙망하고 징계하신다고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이라고 하십니다.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히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를 하시다가 징계를 받아 들이는 자를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채찍질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무엇이 아니라고 합니까? 사생자요, 친 자식이 아니다.
사생자가 어떤 자식을 가지고 사생자라고 합니까? 정상적인 부부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을 사생자라고 하죠?
언제 보아도 언제 생각해도 꺼림직한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원래 사생자처럼 꺼림직한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친자식들로 두셨지만 우리 조상들이 아버지를 바꾸어서 우리는 법률로서 사탄의 아들과 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식이지만 자식이 아닌 꺼림직한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당신의 친 자식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회복 시켜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다시 친 자식 만들어 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견책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친자식들이 받는 징계의 아픔이 어떤지 우리 아버지께서 아들로서 그 징계를 다 당해 보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 53: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무엇 때문이라고요?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 허물과 죄악이 모두 눈으로 오는 것임을 이해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들보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미련함을 벗겨 주시기 위하여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대신 징계를 받으셨다.
우리 눈에서 들보를 제거해 주시기 위하여서요. 그런데도 들보가 좋다고 그 무거운 것을 빼버리라고 하시는데도 빼래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또 이런 말씀을 있습니다.
시소 2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당신의 받으실 만한 대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우리가 아무런 공헌도 한 바 없는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들보를 눈에 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징계를 받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서 받으실 대접을 받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예수께 나아와서 치료함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오늘 징계를 나를 위함이라고 깨닫으시는 우리 성도님들 우리 모두 눈 수술을 하시고 나를 바로 깨닫고 형제를 귀하게 여기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게하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나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내 대신 징계를 받으신 분을 좀 많이 생각하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교독한 말씀 다시 올려드립니다.
눅 6: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내 눈에 있는 들보가 문제이죠?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이고요.
대 부분 사람들은 자기 눈은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눈에는 다 들보가 있다고 믿고 있고요.
그래서 남의 눈의 티를 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깨닫아야 된다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하면 내 눈의 들보를 깨닫을 수가 있을까요?
사무엘 하 12장에 보면 다윗왕이 어느 날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봅니다.
정욕을 이기지 못한 다윗이 범죄를 하고 완전 범죄를 위해 그 남편을 전쟁터를 사용해 죽이고 모든 사람들이 속은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 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집에 어린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그 양 한 마리 뿐이고 마치 자식처럼 아끼며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집에는 재산이 아주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손님이 와서 그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자기 재산 축내지 않고 그 옆집에 있는 그 자식처럼 여기는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은 어떤 말을 하였습니까?
삼하 12: 5-6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다윗이 무엇은 보지 못하고 무엇은 보았습니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게 되었다.
근데 남의 눈에 티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기 눈에 들보였음을 깨닫았습니까?
어떻게 깨닫았습니까?
다윗의 말을 들은 나단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삼하 12:7-9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당시 다윗은 왕이고 나단은 신하였습니다. 절대 군주 국가 시대였던 그 시대는 왕의 말 한마디로 나단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받은 왕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내가 죄인입니다. 죽을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까?
나단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지적을 할 때 그는 아주 무거운 들보가 자기 눈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귀하신 성도님들 아직 여러분들의 눈에 있는 들보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입니까? 자기눈에 들보를 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벙어리들이 될 마음들 없으십니까?
전화가 참 좋은 기기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부패시키는 아주 악한 기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눈에 보는 앞에서는 이야기를 못하는 것도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온갖 이야기를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분들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끊지 못하고 들으시는 분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18: 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남의 말은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 별식과 같다.
별식도 맛없는 별식 말고요, 정말 좋아하는 별식과 같다 그래서 어디로 내려 간다고요? 뱃속 깊은데로 내려 간다.
그러니 끊지 못하고 듣는 것입니다. 왕도 좋아한다는 그림이죠?
그런데 그런 말이 별식이 아니라 구토가 나는 음식과 같다면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같은 죄를 함께 짓지 마시길 바랍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집사님 저 이제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렵니다.
이제 이런 전화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 정말 믿음의 수준높은 성도님들 되었으면 합니다.
들으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더 짓도록 하는 것이 되고요 함께 멸망으로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작 때 드린 말씀처럼 우리의 눈은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반면에 가까이 있는 곳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눈에 있는 그 큰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견책의 권면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 외에는 또 다른 치료 방법이 없습니까.
저는 이 방법을 권해 드립니다.
히 1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무엇을 바라 보자고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를 예기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우리 위해 죄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길 바랍니다.
증언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산상 118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라볼 때, 이기심은 가증하고 불쾌한 성질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 버리고자 갈망하게 된다”
이기심과 가증하고 불쾌한 성질을 들보로 이해하시고 읽어도 됩니다, 들보를 넣어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라볼 때, 들보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 버리고자 갈망하게 된다”
들보가 무엇인지 아직 깨닫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더 많이 바라보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눈에 들보를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산상보훈 125쪽에는 눈속에 있는 티를 보고 들보를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다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산상 125 “그분의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몹시 안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비 그리스도적인 행동을 통해 꼴 지어지는 품성의 특성은 비판의 대상이 된 결점과 비교할 때 마치 티에 대한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무슨 말씀입니까?
들보와 티에 대한 말씀을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죠.
좀 좋지 않은 나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을 말하려고 안달하는 모습 그러한 모습을 선지자는 비 그리스도인적 행동이라고 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죄가 무엇이다 라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들이죠?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지금이 어떤 시대라는 것을 좀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나요?
지구는 정말 몸부림을 칩니다.
장로회장단이 예천 방문 사진입니다.
뒤에 보이는 장로님 부부가 박인환 장로부부입니다.
장로님은 집회 모임에 가시고 집사님 혼자 주무시는데 새벽 3시쯤일까 갑자기 집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뒷산이 무너져 토사가 안방 벽을 뚫고 집사님이 자고 있는 가슴까지 밀려 왔다고 합니다.
전기도 나가고 불 생각도 못하고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하나님의 은혜중 은혜로 빠져 나와서 생명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윳에 사셨던 집사님 부부는 돌아 가셨는데
그전에는 그런 재난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나의 일처럼 다가 왔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내년에 일요일 휴업령이 내려진다면 어떻게들 하시겠습니까?
종말에 대하여 관심만 가지지 마시고 진짜로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준비하시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되는지 안되는지는 그날 되어 보아야 알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할 수 없다면 그날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불의 고리라고 알려진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지도를 보니 우리 나라도 고리 바로 근방에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갈라질지 모르는 환경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는 폭우와 폭염이 땅 아래서는 지진이 언제 우리의 종말을 앞당길지 모르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 성도님들 오늘이 그날인 것처럼 오늘이 나의 삶에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날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들과 금전들과 시간들을 바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려도 돌아오지 않는 바쁜 시간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허물을 이야기 함으로 인하여 듣는 사람 망하고 말하는 본인도 망하고 그 대상자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주게 하는 들보와 티에 이야기는 우리 성도님들에게서 사라지게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저는 들보와 티라고 하는 제목으로 우리눈에 들보를 볼 수 있고 남의 눈에 티를 볼 수 없는 두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성경의 모든 교훈과 책망은 나에게 주신 것으로 받자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김집사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상하고 섞어가는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하여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키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다 이 문제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고 치유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그런 가운데 있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지가 회복의 첫걸움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에게 있는 들보를 깨닫는 것 엄청난 은혜와 복입니다.
그 들보를 우리 힘으로 빼내려 하지 마시고 남의 눈에 있는 티도 내가 빼내어 주려 하지 마시고 더욱 예수님을 많이 바라봄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들의 눈이 치유함을 받고 예수님의 눈들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교회를 보고요.
예수님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고요.
예수님의 눈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봄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손길로 살아가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나의 눈에 들보를 보았아오니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말게 하옵소서
날마다 우릴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바라봄으로 우리의 눈들도 변화함을 받아 예수님게서 세상을 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눈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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