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챙김은 인위적 조작…불교 아니다"
마인드풀니스 & 사띠 논쟁-5 법보신문 | 2009-12-30 | 인경 스님(동방 대학원 교수)
삼빠잔나는 알아차림 아닌 ‘분명한 앎’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사진>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마음챙김’을 처음 사용한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챙김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한다”며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 정신이 담긴 개념으로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라며 반박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 교수 간에 논쟁이 오고 가는 가운데 이번에는 인경 스님이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사띠와 위빠사나는 불교명상을 대표하는 용어이다. 더구나 현대 심리치료의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대중화되면서, 위빠사나보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가 불교명상을 대표하는 상징적 용어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김재성 교수(이하 김 교수로 약칭함)의 반론 글은 필자가 처음 문제제기한 심리치료적인 관점보다는 초기불교에로 초점이 이동하여 조금 아쉽다. 하지만 초기경전을 다시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것도 순간포착처럼 실제로는 감추어진 사태나 알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알아차림’의 인지적인 의미를 뜻한다. 아무튼 사띠를 꼭 붙잡음이란 의미로서 해석하는 김 교수는 경전적인 전거로 『숫타니파타』의 151게송,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는 문장을 제시한다.
그렇다 하여도 151게송이 사띠와 자애는 동일한 의미임을 제시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위의 문장은 사띠를 통해서 자애의 마음이 개발된다는 견해(Tse-fu Kuan, 2008)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만큼 많은 분들에 의해서 이미 언급되고 있다. 사띠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개별적 대상,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을 의미한다. 반면에 삼빠잔나(sampajañña)의 경우에 접두어 ‘sam’은 ‘바른’ 혹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pajañña’는 지혜[智]를 의미하는 pañña와 성스런 앎[知]을 뜻하는 ñāna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용어로 ‘이해’, ‘앎’, ‘지혜’ 등으로 번역한다.
곧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Goenka, 1999; Analāyo, 2003) 사띠와 삼빠잔나는 개별과 보편, 부분과 전체의 관계처럼 인식 대상의 범위가 서로 다르다. 삼빠잔나는 사띠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사띠와는 다르게 삶의 넓은 부분(목적, 적절성 등)에 걸쳐 관여하고(Nyanaponika, 1962), 대상의 전체적인 특성과 변화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U Sīlānanda, 2002)
한편 자애의 마음을 ‘굳게 지님’, 물건을 꼭 붙잡은 ‘챙김’과 같은 용어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동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알아차림은 변화하는 대상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안다는 인지적 관점을 가진다.
예컨대 실례를 든 일상에서 ‘서류를 챙긴다’고 할 때, 우리는 대상(서류)가 책상위에 있음을 먼저 알아채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올바른 서류인지를 분명한 앎으로 확인한 다음에, 그것을 잘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지각이라면, 챙김은 그 대상을 소유하여 가지는 행위이다. 먼저 알아차림의 인식이 있고, 나중에 챙김의 효과적인 행위가 뒤따른다.
이런 점들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표 참조>
이렇게 마음챙김의 대상은 『염처경』에서 말하는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챙김은 별도의 다른 마음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지금 여기 몸과 마음의 경험에서 떠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에 기초한 간화선에서는 “이것은 몸도 아니요, 느낌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법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것은 『염처경』에 기반한 간화선의 방식, 화두참구법이 아닌가?
오히려 <호흡(느낌, 마음,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나 <그는 숨을 알아차리면서 들이쉬고, 숨을 알아차리면서 내쉰다>(심준보, 2004; 최종남, 2006)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야 숨이 길면 길다고, 숨이 짧으면 짧다고 하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호흡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앎으로,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남으로 번역한 ‘paccupatthita’는 나타남, 현전을 의미하는 과거분사형이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저절로 드러남(조준호, 2001)’을 의미한다. 사띠는 굳게 지님이나 마음챙김과 같은 용어가 함축하는 ‘대단히 능동적인 활동(조준호의 논문에 대한 김재성의 논평글, 2001)’이 아니다. 사띠는 판단이나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질 않는다. 노력 없는 노력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