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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 가장 어려운 순간(2278.2024.12.1)
삼상23:15-18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일생일대에 가장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제일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엄마’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애인이라고도 하고, 짝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목사님이라고도 하고, 성도 000라고도 하고, 등등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 보고 싶은 사람을 보면 어깨가 축 쳐져있다가도 새 힘이 납니까? 정말 지치고 힘들 때 그 사람 얼굴이라도 보면,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행복하게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힘들 때에 누구를 보며 누구의 음성을 들으면 힘이나고 용기가 날까 생각 해 보시고 없으면 오늘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다윗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을 기록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알고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그일라를 포위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한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아무리 용맹한 다윗이라도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만 해도 다윗으로서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어려움에 처한 부족들을 다윗이 도와주었던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윗이 이렇게 어렵게 되었으니 전에 도와주었던 부족들이 이번에는 다윗을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다윗의 이런 기대마저 다 허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이 전국에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다윗 을 도와주는 자들이 있으면 사울 왕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사울 왕이 무서워 다윗을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삼상23:1-5절에 보면 블레셋이 그일라를 공격했습니다. 다윗은 자기도 지금 어려운 처지임에도 그일라를 도와서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큰 은혜를 입은 그일라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 왕이 무서워서 다윗을 배반합니다. 삼상23:19-26에 보면, 십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동안 다윗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윗이 자기들이 사는 곳에 있자 사울 왕이 혹시 자기들을 해칠까봐 사울 왕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일러바칩니다.
삼상25:2-17에 보면, 마온이라는 곳에서 목축업을 하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다윗 덕분에 편안하게 목축업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나발에 좀 도와달라고 하자 나발은 차갑게 거절합니다. 자칫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사울 왕이 알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삼상 21-27장에 다윗이 광야에서의 도피 생활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모두 14곳이나 옮겨 다니면서 힘들고 어려운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기브아-놉-가드-아둘람굴-유다 헤렛수풀-십광야-마온 광야-엔게디광야-시글락) 특별히 삼상 23:25절에보면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서 사울에게 사방팔방으로 포위당하여 절체절명의 죽음의 위기를 맞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였습니다. 일생일대에 가장 어려운 순간을 만났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던 다윗은 그 순간 무슨 일을 하였을까요?
시22편에 자세히 그 상황이 나옵니다. 12-22절‘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에서 나를 구하여주십시오. 저 들소의 뿔에서 나를 구하여 주십시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찬송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도 찬송으로 기도를 마감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다윗을 에워쌌던 사울의 군사들이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27절에 기록된 대로 전령이 사울 왕에게 블레셋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을 치기 위하여 급히 군대를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윗은 하나님께서 위기에서, 죽음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곳을 ‘셀라하마느곳(Sela-Hammahlekoth)’(28절)-분리의 바위, 도피의 바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 인생에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뒤돌아보면 ‘셀라하마느곳’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일생일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나마 이전에 도와주었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그 사람들마저 다윗을 배신합니다. 인생에 이 정도 어려움이 겹치고 또 겹치면 정말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다윗도 인간인데 이 순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다윗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 왕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입니다.
가장 어렵고 절망적인 순간에 누군가가 찾아와 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단이었기에 다윗에게는 더더욱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지금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아들입니다. 요나단은 평소 다윗과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입니다. 무엇보다 요나단은 자신이 다음 왕이 될 수 있었던 장본인임에도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다윗을 인정하고 다윗을 보호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배신감 속에 도망다니고 있는 다윗을 찾아와서 희망의 말을 해 주었다는 것이 다윗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본문 17절‘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의 이 말은 지금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이 말을 했다고 지금 당장 다윗에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나단이 돌아가고 다윗은 여전히 수풀에 머물렀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두려웠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절망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요나단의 희망의 말 한마디에 다윗은 용기를 얻었고, 다시 희망을 품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희망의 말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다윗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이므로 희망의 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건강 때문에 낙심하고, 인생을 고달프게 하는 일들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요나단처럼 희망의 말을 해 줄 수 있는 상주감리교회 목사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희망의 말씀을 몇 가지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 속에는 이런 희망의 말씀이 수두룩 하지만, 몇 가지만 나누면서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희망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이 말씀을 희망의 말씀으로 받아서 우리 안에 다윗처럼 다시 희망을 붙잡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우리 안에 품고 있다가 누군가 낙심하고 힘겨워할 때 이 말씀으로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상주감리교회 믿는 성도라면 희망의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명 감당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선물과 같은 위로의 말들을 때때로 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이 ‘내가 다윗이라 착각하지 마시고’,‘내가 요나단이 되어야’합니다. 때로는 누군가가 나에게 위로의 말 전해 주기도 하지만 오늘은 내가 요나단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명 잘 감당하고 있는 어떤 누군가가 생각나신다면 ‘선생님 때문에 제가 힘이 납니다. 집사님 때문에 우리가 참 참 은혜를 많이 누리고 있습니다. 장로님 때문에 힘이 납니다. 때로는 힘들겠지요. 힘 내십시오. 응원합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뜬금없지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과 같은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옆사람보고 해봅시다--먼저 목사님 때문에 힘이납니다.---000 때문에 힘이 납니다.
렘29:11절‘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믿는 우리에게서 희망의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세상은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희망을 갖고 싶지 않아서 안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들을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희망을 갖고 싶어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하는 것은 막연한 희망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방금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자신 있게 희망을 말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다윗이 예전에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도움이 될까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그들조차 다 다윗은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와서 희망을 말해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믿으니 희망을 가지라고 요나단이 말했습니다. 세상만 생각하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도 절대 희망을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 안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자신 있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건강으로 힘든 분, 물질로 힘든 분, 세상 일로 고단한 삶을 사는 분들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 희망이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외치는 말 속에 하나님께서 희망을 이루는 능력이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그 희망을 실제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2.상주감리교회 믿는 성도라면 ‘기도할께요.’라는 희망의 말이 나와야 합니다.
렘33:2-3절‘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는 다윗의 기도로 가득합니다. 만약 다윗에게 기도가 없었다면 다윗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요나단이라는 믿음의 친구가 있었다는 것은 더없이 든든함이었습니다. 다윗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함인지 다윗은 잘 압니다. 그래서 기도해주는 요나단 때문에 다윗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상주감리교회 믿는 성도라면 ‘기도할께요.’라는 희망의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낙심하고 힘겨운 인생에게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 내 가족에게 조차도 더 잘해주고 싶어도 더 잘해 줄 수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든 기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기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으면 아마 뿌듯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떤가요? 뿌듯함이 되고 보람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으셨나요? 세상의 그 어떤 선물보다 위대한 선물은 기도해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의 기도가 저의 재산이라고 늘 생각하며 목회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눈물겹도록 저의 마음에 고마움입니다.
지금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걸어가는 분들을 향해서 ‘기도할께요.’라고 희망의 말을 할 수 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께요.’라고 말하는 것만 주님께서 들으셔도 응답해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기도한다고 말해놓고 기도하지 못하면 어떡할까 걱정이 되어서 기도한다는 말조차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말했으면 별도로 기도하면 더 좋겠지만, 기도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기도할께요.’라는 희망의 말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3.상주감리교회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은 좋을 때도 함께 하셨고, 어려울 때도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삼상16:18절‘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귀신이 역사해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신하 중에 누군가가 사울 왕에게 다윗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 신하가 다윗을 추천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사람입니다. 좋을 때도 함께 하셨고, 어려울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번 일생일대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믿었던 인간들은 배신을 합니다. 어디 몸 숨길 곳도 없고, 피할 곳도 없습니다. 이런 절박한 순간에도 여전히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다윗은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상주감리교회들이 살아오신 인생여정 이야기를 듣노라면, 정말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도저히 여기까지 잘 걸어오기 어려웠을 삶이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여기까지 잘 걸어오신 우리 성도님들께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잘 걸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만 하나님 함께 하심을 믿고 잘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들을 향해서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는 희망의 말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으면 이 말로 인해서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그 사람에게 아직 믿음이 없거나 약할지라도 우리가 이 희망의 말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도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란 말이 필요가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연약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인생입니다. 그 사람이 믿든 안 믿든 우리의 믿음으로 희망의 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고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도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4.상주감리교회 믿는 성도라면 어떻게 해야 남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목사님 기도부탁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언제든지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을 이해하고 마음을 언제든지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남에게 힘을 주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을 이해하고 언제든지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재미있고 즐거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가 없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쓸쓸하고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여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친구라고 꼭 같은 또래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친구는 스승도 될 수 있고 아내나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부모나 자식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들 주변을 보면 좋은 친구들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여호수아가 좋은 친구로 등장하고, 여호수아는 갈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고,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디모데, 실라 같은 좋은 친구들이 함께 했습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우상을 섬기는 왕 앞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김영윤목사에게는 상주감리교회 훌륭한 000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친구 관계는 아마도 ‘다윗과 요나단’이라 할 것입니다. 다윗도 훌륭한 사람이고 멋있는 사람이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윗이 다윗 될 수 있었던 공로는 요나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입니다. 앞으로 왕권을 이어갈 수도 있는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요나단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 편에서 자신의 왕권에만 눈이 멀었다면 아버지의 실수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다윗과 적이 되어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좋은 친구를 다윗의 인생에 붙여주심으로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하시고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나단은 생명을 걸고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야 남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의 주인공 요나단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요나단은 사람을 위로 할 줄 아는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요나단은 사울에게 쫓겨 도망을 치는 다윗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로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한마디로 요나단은 남에게 위로와 평안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하루하루 불안과 공포에서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남들이 와서 말하면 아무 소용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말하는 위로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 할 때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남에게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그리고 인생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말만이라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친구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퇴근한 남편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아내, 힘들게 공부하는 자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부모, 수고하는 목회자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성도, 그 힘은 매우 큰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기를 버릴 줄 아는 자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자 곧 왕권을 넘겨받을 아들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의 왕권을 이어갈 수도 있는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포기합니다. 왜요? 자신과 다윗을 비교해 볼 때 왕으로서 재목은 자신보다는 다윗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과감히 그 왕권을 양보합니다. 17절‘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자기 아버지 사울도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권을 양보합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가장 멋있는 사람은 오늘 본문의 요나단입니다.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인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에는 요나단 같은 이인자 리더십이 필요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요나단이 다윗이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할 수 있었나?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윗을 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골리앗과의 전투에서도 그랬고 곳곳에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기 뜻과 욕심을 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까? 그러면 속히 여러분의 생각과 계획을 접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 뜻을 내보이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성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그냥 순종하며 엄청난 복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왜 순종이 안 될까요?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경험, 내 방법, 내 생각, 내 형편을 이해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있습니까? 아마도 극히 드물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칠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치 마세요. 우리에게는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좋으시고 사랑이 넘치는 참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떤 허물도 감싸시고 사랑으로 덮으시는 분입니다. 그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치도 않으시고 부자냐, 가난한자냐 따지며 소유로 사람을 박대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선물이며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은 참된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누구십니까? 다 같이 외쳐봅시다.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영원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5:15절‘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요나단처럼,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신 분이 계십니다. 다윗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요나단처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다윗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위로하고 격려한 요나단처럼,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며,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격려해주십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우리 곁에 늘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항상 두 개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발자국,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발자국, 그러나 정말로 내가 어렵고 힘겨운 걸음을 걸어갈 때, 우리 인생의 발자국은 하나로 바뀝니다. 주님이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쓰러진 나를 주님이 들춰 업고 걸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힘들 때 가장 필요한 음성이 바로 이 음성입니다. 어떤 음성입니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할 때 대충 의지하지 말고 힘 있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또 다른 믿음을 낳습니다. 그런 믿음의 파급효과를 계속 경험하다 보면 보편적으로 믿음이 체질화된 사람이 됩니다. 그런 믿음이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행복의 요건인지 모릅니다. 믿음이 있는 곳은 천국이 되고, 믿음이 없는 곳은 지옥이 됩니다.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의 다음 부분을 보면 다윗은 도피 행로 중에서 가장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즉 십 거민들의 고자질로 사울의 손에 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위급한 순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다윗 쫓기를 그치고 블레셋을 치러 갔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셀라 하마느곳’이라고 불렀습니다(28절).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지켜주시는 ‘셀라 하마느곳’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주감리교회 성도에게는 항상 위로 향한 직통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서남북 ‘사방’만을 바라보지만 성도들에게는 방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입니다. 성도의 삶은 ‘사방 플러스 원’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3차원의 세계에 살지만 성도들은 사차원의 세계에 삽니다. 행복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세상을 살면서 새삼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한 가지 허물만 나오면 그걸로 완전히 그 사람을 매장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아흔 아홉 가지의 착한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때문에 그 사람을 완전히 매장시키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사람은 참 무섭습니다. 아흔 아홉 가지의 장점이 있어도 한 가지가 잘못되면 그걸로 끝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흔 아홉 가지의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 가지 장점을 보시고 아흔 아홉 가지의 실수를 덮어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가지 실수가 있어도 아흔 아홉 가지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나는 누구로부터 버림을 당할지라도 먼저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배신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더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더 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행복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행복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적으로 무엇을 잃어버려도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그 상황을 극복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무엇인가 일이 안 풀리고 큰 고통을 당하면 마음은 힘들고 상실감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을 가진 내 소중한 생명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더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상주감리교회 모든 성도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내일의 희망이 없다’고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도 자기의 미래를 절망해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이란 항상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낙심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이 잘 될 수 있고, 어떤 때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일이 더 실망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고, 어떤 경우에도 안전을 확신하고, 내일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이 있어도 어려움 후에는 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항상 주님 중심적으로 더욱 충성하며 사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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