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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8 -(1) 2023. 06.10(토) - 06.11(일) |
6월10일(토)
이번 순례는 원래 6월 하순 예정인데 회원 중 일부가 6월 중하순에 유럽 성지순례를 가기로 되어 있어 약간 앞당겼다. 그 대신 6월 하순에는 쉰다. 그래서 6월 순례로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셈이다.
또 이번 순례가 중요한 것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광주교구와 전주교구 순례는 다 마치게 된다. 이번의 순례 일정은 전주교구의 초남이 성지, 김제 순교성지, 고창 개갑장터 순교기념성지, 광주교구의 영광 순교자 기념성당이다.
08시 10분 성당 출발. 경부고속도로 경산 휴게소에서 아침식사. 함양 휴게소에서 한번더 쉬고 대전-통영고속도로에 올려 장수(長水)에서 대전으로 북상하지 않고 서쪽으로 갈라져 익산, 전주로 간다.
12시 10분쯤 초남이 성지에 도착 예정이나 성지 인근에는 식사할 곳이 없다기에 전주를 지나면서 점심을 때우고 가기로 했다. 청담옥이라는 식당에서 야채 쌈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30분쯤 초남이 성지에 도착
초남이 성지 - 호남 천주교 발상지 |
복자 유항검의 순교 사적
초남이 성지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도로명 주소로는 이서면 초남 신기길 122-1)에 있다. 이곳은 호남에 천주교를 처음 전래한 복자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이 지역 덕망이 높은 만석꾼 부자였던 아버지 유동근(柳東根)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반적으로 부잣집에서 그러하듯 부모는 아들이 학문을 하여 입신양명으로 가문을 빛내기를 바랐지만 유항검은 벼슬길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어머니 권씨의 일족이었던 권철신, 권일신, 그리고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과 교유하여 이들로부터 천주교리를 처음 접했다. 유교 이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 그는 1784년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집에서 그를 대부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 후 고향에 돌아와서는 먼저 가족과 가속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이웃에게 암암리에 복음을 전파했다. 1786년 봄,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이존창 루도비코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지역민은 물론 외지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전교하였는데 가깝게는 전주, 김제에서부터 멀리는 고창, 영광에 이르렀으며 그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가 효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독성죄에 해당됨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이 제도가 오류임을 깨닫고 세례는 중단하였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였던 윤지충은 그의 이종사촌이고 권상연은 그의 외사촌이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제 없이 소수의 선각자에 의해 수용되고, 수용된 뒤에는 이씨, 정씨, 윤씨, 권씨 등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공동체에 의해서 조직이 공고해지고 진리가 확산된 특징이 있다. 한 사람의 진지한 구도자가 먼저 진리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긴밀한 가족 구성원의 동의를 받아 이웃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유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와도 그 방향이 일치하는 것이다.
1791년 윤지충 바오로과 외사촌인 권상연 야고보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일명 진산사건)으로 순교하자 더욱 그는 천주교에 몰입하여 여러 방면에서 조선 천주교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柳重哲, 1779-1801년)과 이윤하의 딸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1782-1802년)가 평생 동정부부로 살겠다는 것을 허락하여 루갈다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1797년 혼인 후 1801년 신유박해로 치명할 때까지 4년여 간 이곳에서 살게 하였다.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깊이 전수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이에도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리고 그의 처 신희, 큰아들 유중철 요한,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柳文碩, 1784-1801년), 동생 유관검(柳觀儉), 조카 유중성(柳重誠) 등 그의 일족들이 거의 다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었다.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집터는 파가저택’(破家瀦宅)되었다. 파가저택’(破家瀦宅)이란 국가 반역자나, 부모를 죽인 자식, 주인을 죽인 종 등 강상을 범한 중죄인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허물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그 터에서 더 이상 아무도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형벌의 일종이다. 처자까지 연좌시켜 종을 삼았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한동안 방치되다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고향인 초남이 땅에 묻지 못하고 생가에서 약 1km 떨어진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배기에 암장했다.
그후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바우배기 묘지를 돌보아 왔는데 1914년 4월 19일 바우배기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전주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새롭게 조성하기 위한 작업 도중, 유항검 가족 순교자 7명의 유해가 각각 담긴 항아리와 개인의 인적사항이 적힌 백자사발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었다.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했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성지개발 과정
초남이 성지 개발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 부지를 매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관검 가문과 사돈 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의 잔재가 남아있었던 생가 터와 약 700m 떨어진 교리당 터도 확인했다. 그리고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 바우배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2년 뒤 1987년 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 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 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 터는 유항검 순교자가 최초로 교리 공부를 개설한 곳임과 동시에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후 2000년 9월 23일 생가 터에 각종 순교자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 교리당터에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 건물, 그리고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 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5년 5월 28일 교리당 부지에 주문모 신부와 유항검과 신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했다. 2006년 10월 23일에는 파가저택지 한편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의 시복을 준비하며 생가터에 요셉성당을 마련하고, 교리당 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되었다.
유항검 생가 터
낮 1시 30분 경 초남이 성지의 중심 유항검 생가 터에 도착했다. 호남의 곡창지대답게 들판이 아주 시원스레 넓다. 논에는 모내기가 시작되어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사작한다. ‘호남천주교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가장 먼저 순례객을 맞아주고 있다. 표지석 받침에는 여기가 1784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해에 바로 유항검이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선교를 시작했다는 말로 이곳이 호남천주교 발상지임을 밝혀주고 있다.
초남이 성지 표지석
그리고 가까이 서 있는 성지 안내표지판은 초남이 성지가 이곳 유항검 생가 터만이 아니라 교리당과 바우배기도 있음을 알려준다.
연못 주변- 파가저택’(破家瀦宅)의 흔적
확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마당 터에는 마당이 아닌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못 한편에는 성 요셉상과 성모상이 대형 십자가 밑에 서 있다. 그러고 보니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일가에 형벌을 내려 거의 멸족시키다시피 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처럼 집을 부수고 집터를 메워 못을 만들었던 것이다. 처벌이 여기서 더 나아가면 죄인의 고을을 격하시키고 지방 수령에게 벌을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 연못은 당시의 원형은 아니다. 단 성지 개발을 시작할 때 못의 일부가 웅덩이로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추정 복원한 것이다.
담장 벽에는 십자가의 길 십사처가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다.
못가에 3간 짜리 한옥 한 채가 복원되어 있다. 유항검 복자가 동정부부를 위해 지어준 집인데 동정부부가 여기서 4년간을 살았다고 한다. 행랑채라고 일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데 행랑채는 노비 등 신분이 낮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이므로 적절하지 못한 명칭이다. 한때는 성체조배실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성 요셉성당에 딸린 고백소라고 한다.
성 요셉 성당
경내에 성당도 있다. 이름하여 성 요셉 성당. 맞배지붕 목조집인데 들어가는 입구엔 작은 지붕이 붙어있어 현관 구실을 하고 있다. 내부에 들어가면 전면에는 제대와 후벽 중앙에 대형십자고상이 있고, 고상 아래 오른쪽 감실에는 불이 빛난다. 그리고 성 요셉 부자상이 서 있다. 그뿐 벽면에는 작은 유리창이 아래쪽에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흔히 있는 십사처도 없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椽燈天障)으로 매우 소박하다. 오히려 성당 후면 나무 출입문 위에 원형 성 요셉 부자상과 좌우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상이 길다란 창문에 서 있어 허전함을 없애주고 있다.
뒷 벽면에는 루갈다 편지와 신축성당 모금함이 걸렸다.
성당 참배 후 밖에 나오니 수녀님 한 분이 다가와서 성지 해설을 해주신다. 이 생가터 요셉성당에 상주하시는 두 수녀님 중의 한 분인 조 도미니까 수녀님이다. 물론 신부님도 상주하고 계신다.
수녀님은 말씀하신 초남이 성지의 의미는 첫째 호남지역에 처음으로 교리당을 열어 교리 공부를 하고 지역 선교를 시작했으며, 둘째 외국 사제 주문모 신부를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에 초청하여 첫 미사를 드리는 등 사목 방문을 했던 곳이며, 셋째 윤지충 바오로 등 세 분의 유해가 안치된 순교자 묘소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성지의 주인공 복자 유항검의 자취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점이라고 하면서 유일하다면 파가저택의 일부 흔적이라고 했다.
사실 부자나 권력가가 새로운 종교나 이념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질곡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야 현실을 타파하여 새로운 이상적 세계를 동경하게 되지만 모든 것을 가진 기득권층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꿈꾸며 가시밭길을 가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왕자 신분의 석가모니가 진리를 찾으러 고행을 택한 것은 더욱 어려운 선택이 아닐 수 없으며 그만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항검 복자의 자취가 없다고 하나 이는 유물 유적의 측면이라는 좁은 뜻으로 볼 때 그렇지 오늘날 이 지역에 복음이 전해져 천주교 신앙이 꽃이 핀 것 자체가 순교자가 남긴 위대한 자취가 아니겠는가? 대화 중 루갈다 편지를 구할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 바로 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필요한 부수만큼 가져와서 살 수 있었다.
성당 옆에는 최근에 세운 유항검과 동정부부 동상이 있었다. 수녀님과 기념촬영을 끝으로 생가 터 성지 순례를 끝내고 교리당으로 향했다.
교리당과 그 주변
유항검 가족의 원 묘지터인 바우배기는 길이 좁아 차로 가기가 어렵다고 하여 다시 오던 방향으로 돌아나와 교리당으로 향했다. 거리가 700m에 불과하여 금방 도착. 교리당 표지석과 안내도가 나온다.
교리당 - 조선 천주교 최초의 교리 장소
먼저 찾아 간 곳은 이곳의 중심인 교리당인데 안내도에는 ‘교리당(순교자 묘소)’라고 나타나 있고 교리당 앞에 가니 문 좌우에 두 개의 안내판이 서 있는데 왼쪽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묘소’, 오른쪽은 ‘교리당’ 안내였다. 말하자면 이 교리당 건물 안에 순교자 묘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 묘소도 일반적인 묘지가 아니라 유해를 보관하는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음 내용은 두 안내판을 중심으로 한 교리당과 순교자 묘소 설명이다.
교리당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생 유관검이 박해시대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논한 곳이다. 교리당에 대한 기록적 근거는 신유박해에 대한 정부의 기록를 수집하여 정리한 사학징의(邪學懲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01년 3월 28일 유관검의 사돈 이우집의 신문 기록에 따르면 “정사년(1797년) 동짓달에 마침 유관검의 집에 갔는데 그가 외진 곳에 사랑채를 새로이 만들어 천주학을 사람을 여기에서 영접한다고 했다“고 했다.
1784년 세레를 받고 고향에 온 유항검은 먼저 가족과 가속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숙식을 제공하면서까지 직접 교리를 가르쳤으며 세례를 베풀었다.
김제의 순교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와 자기 집의 노비였던 순교복자 김천애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받아 입교한 것으로 보아 이곳 교리당은 당시 천주교 신앙 교습의 장으로 볼 수 있다.
초남이 초대신부인 김환철 신부는 당시 호남교회사연구소장 김진소 신부를 통해 교리당 터를 확인 고증하여 2002년에 한옥의 교리당을 세워 교리당이라 명명하였으며 지금은 건물을 포함한 이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순교자 묘소 - 세 분 복자의 유해 전시
이 교리당 안에는 한국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복자 권상연 아고보(1751-1791), 그리고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64-1801)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래서 순교자의 묘소라고 한 것이다.
복자 유항검은 진산사건(1791)으로 순교한 자신의 이종사촌 동생 윤지충과 외사촌 형 권상연이 풍남문 밖에서 순교하자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땅인 바우배기에 안장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백자사발 지석에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유해와 함께 묻었다. 그리고 10년 후 신유박해 때 가속들에 의에 자신도 6명의 가족과 함께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묻혔다.
유항검 가족들의 유해는 1914년 발굴되어 치명사산에 이장되었지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는 묘소가 당시에 밝혀지지 않아 거두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2021년 3월 11일 묘지 정리 중 무명자 묘역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와 백자사발 묘지석과 함께 윤지충의 동생 복자 윤지헌의 유해도 발굴이 되었다. 실로 220-230년 만의 일이었다. 윤지헌은 1801년 이종사촌 형 유항검과 함께 처형된 순교자다.
당시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이들의 유해 발견 이후 훈령을 통해 유해의 실체를 확인하는 절차를 이행하게 하였다. 다양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유해의 실체가 확인되자 2021년 9월 1일, 교령을 통해 이를 공표하였다. 전주교구는 발견된 순교자들의 유해의 보존과 공경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여 동년 9월 16일에 이곳 교리당에 봉헌했다.
참고로 세 복자의 유해는 2022년 12월 8일 전주 전동성당과 얼마 전인 2023년 5월27일 순교자의 생가가 있는 진산성지에도 나누어 안치되었다.
교리당 내부에 들어가니 순교자 유해 성광은 교리당 맨 앞 제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3개의 관이 놓여 있는 높은 단 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사진 촬영을 엄격 금지하고 있어 하는 수 없이 다른 기존의 자료를 통해 소개한다.
2021년 3월, 윤지충의 묘에서 나온 사발에는 “成均生員 尹公之墓 俗名持忠 聖名保祿 字禹庸 己卯生 本海南”이라는 명문이 밑바닥에 있었다. 뜻은 “성균관 생원 윤공의 묘. 속명은 지충, 성명(聖名)은 보록(바오로), 자는 우용, 기묘생으로 본관은 해남)”이다. 세례명을 ‘성명(聖名)’이라 한 것이 독특하다. ‘보록(保祿)’은 ‘바오로’이다. 그리고는 사발 안쪽 측면에 “權公墓在左(권공의 묘가 왼쪽에 있음)”라 하여 바로 왼편의 무덤이 권상연의 묘임을 밝힌 것도 인상적이다. 역시 안쪽 그릇 하단 측면에는 돌아가며 “乾隆(건륭) 五十七年 壬子 十月十二日”이라고 날짜를 밝혀 놓았다. 건륭 임자년은 1792년이다. 곧 죽은 지 약 1년 뒤에 무덤을 조성한 것이다.
권상연의 묘에서 나온 사발에 적힌 글은 이렇다. “學生 權公之墓 諱尙然 字景參 辛未生 本安東” (학생 권공의 묘. 이름은 상연, 자는 경삼, 신미생, 본관은 안동). 윤지충과 달리 야고보(雅各伯)란 세례명은 쓰지 않았다. 역시 사발 측면에 “尹公墓在右”(윤공의 묘가 오른쪽에 있음)라고 쓴 것은 훗날 두 무덤 중 어느 하나가 발견되었을 때 두 사람이 나란히 묻혀 있음을 알려주려 한 표지로 보인다. 또 이곳이 유항검 집안 선산이었기에 후대에 무덤이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과 정지 샴
십자가의 길 14처는 제주 성 이시돌 목장 14처를 조각한 박창훈(요한 세례자) 작가의 작품이다. 등신대(等身大, 실제 사람의 크기)로 제작된 14처는 전부 동(銅)으로 제작됐다. 못자국이 선명한 예수님의 고난상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마음이 떨리는 것 같았다.
정지 샴은 유항검 당대부터 있었던 우물이다. 건물을 지어 복원도 했었으나 지금은 허물고 십자가의 길 제 12처 아래에 조성해 놓았다.
유항검 나눔의 집
2017년 3월 준공한 ‘유항검 나눔의 집’은 대지 5233㎡에 건축면적 436.13㎡의 철골조 단층 건물로 식당과 주방, 성물방, 화장실 등이 갖춰져 있다.
마르띠르 카페
시간이 없어 들어가진 못했지만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나는 휴식처다. 입구 문에는 성지 순례에 참고가 될 만한 요지가 게시되어 있는데 이 중 어느 한 단계도 이행하지 못한 터에 부끄러움만 느낀다.
성지 순례 4단계
1.성지를 알아라!
2.성지에 머물러라!
3.희생을 바쳐라!
4.본받아 살아라!
초남이 성지는 지금도 계속하여 정비 복원 중이었다. 지난날 설치하여 수명이 다한 기존 시설이나 조각상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여 깔끔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좀더 감동적으로 신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리당 안내도에서와 같이 앞으로 순교자 기념성전이 들어설 터가 마련되어 있고 성전의 조감도도 세워져 있다. 순교자 기념성전이 조감도처럼 완공이 되면 얼마나 장엄할 것인가? 이처럼 새롭게 발굴된 성과와 연구 결과를 성지 개발에 반영하여 순교자 공경을 더욱 깊게 해 나갈 필요가 있다.
꽃길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을 택한 복자 유항검과 여러 순교자가 하루 빨리 시성 시복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면서 초남이 성지 순례를 마치고 2시 45분경 김제 순교성지로 향했다.
김제 순교성지 - 순교의 보관을 쓰고 금의환향하다 |
전북 김제시의 김제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이 순교 · 치명한 곳이다. 그러나 그 남은 흔적은 순교자가 국문을 받았던 김제 관아의 동헌과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던 당시 김제 장터의 형장터로 추정된 곳에 서있는 한정음 순교터 표지석 뿐이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고 안내하는 요촌성당에도 순교비가 있다.
■요촌 성당
일단 3시 30분 경 요촌성당에 도착. 관리실에 가서 김제 관아와 한정음 순교터의 위치를 물으니 걸어가도 10여분이면 갈 수 있다기에 걷기로 하였다. 출발 전 요촌성당 경내를 둘러보았다.
널찍한 잔디밭과 저 편에 한정흠 순교비가 바위 제단 뒤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고 안내판도 해설자의 역할을 한다.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또는 스타니슬라우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뒷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덕분이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열심히 실천해 나갔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그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인 신자 전주의 김천애 안드레아와 무장의 최여겸 마티아를 알게 되었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와 이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한정흠은 김제로 이송되어 옥에 갇혀 있다가 전시 효과를 최대로 높일 수 있는 우시장 장터에서 1801년 8월 26일 45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처럼 죄수를 고향에 보내어 처형하는 것은 고향 주민들에게 특별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1801년 형조에서 시행한 이 법을 해읍정법(該邑正法)이라고 한다.
순교비 주변 담장에는 십자가의 길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순교자의 높은 뜻이 심어져 거목으로 자란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한정흠 순교터
요촌 성당을 둘러본후 한정흠 순교처를 찾아 나섰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이외로 다들 잘 몰랐다. 포기할 뻔하다가 계속 행인에게 묻고 몇 종류의 휴대폰 사이버 맵과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끝내 옛날 김제 장터 형장터에 세워진 순교비를 찾았다. 4시경에 출발하여 약 30-40분을 찾아 헤맨 결과였다.
신유박해 시 조정의 기록물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형조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한정흠은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천당에 일찍 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한탄하였다. 그는 죽음을 삶처럼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를 유혹하였다. 그러니 죽음을 면할 수 없는데도 그는 ‘예전부터 이단을 배척한다고 형벌을 가하거나 죽이면서까지 금지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방자하게 발악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가난한 선비로 부잣집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끝내 부잣집 주인과 아들과 같은 순교 반열에 올라 천국복락을 받았으니 나름 그의 생애는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향에서 순교의 영광을 안게 되었으니 진정 금의환향이 아니겠는가?
■김제 관아 및 동헌
한정음 순교터와 달리 김제 관아는 웬만한 행인에게 물어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가끔씩 뿌려 순례에 지장을 주었다.
김제는 삼국 시대 때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시대에는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에 이르도록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郡)으로써 고을의 격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었으며, 현존하는 김제 관아와 인접한 김제 향교 건물들이 그에 따른 위상을 보여 주고 있어 신앙적으로만이 아니라 역사적·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현재 김제 관아에 남아있는 건물은 동헌, 내아, 피금정, 관리사이다. 이들을 통해 조선시대 건물의 형태를 알 수 있기에 건축학적 가치가 충분하다.
김제 동헌(東軒) (전북유형문화재 제60호)
동헌은 고을 수령이 행정업무를 보는 건물이다. 김제 동헌은 16세기 중반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현종 8년(1667)에 군수로 부임한 민도가 근민헌(近民軒)이라고 명명하였다. 근민헌이란 백성을 가까이 하는 관청을 뜻하며, 숙종 25년(1699)에 사칠헌(事七軒)으로 고쳐 불렀다. 이는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의 7가지 업무를 일삼는다는 뜻이다. 지금 건물은 1881년 고종 때 중건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이래 1960년대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어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김제 동헌은 관아의 중심 건물로 사용한 재료나 꾸밈에 있어서 품격을 갖추려는 의도가 많이 보인다. 건물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고 왼편에는 1984년에 복원한 온돌방이 있다.
마당에는 각종 형구가 놓여 있어 죄인을 국문하는 장소임을 말해준다. 아마도 한정흠 등 김제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이곳에서 모진 국문과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경주의 동헌은 경주 문화원 동쪽 KTG 자리에 있었는데 그 건물이 현재 대능원 후문 건너 있는 법장사 대웅전이다.
김재 내아(內衙) (보물)
조선시대 지방관의 가족이 살았던 살림집이다. 김제 내아는 1749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2개의 온돌방과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는 다락이 딸린 부엌과 온돌방 1개가 있다. 김제 내아는 동헌의 바로 뒤편에 함께 남아 있어 조선시대 관아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2022년 11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됐다. 참고로 경주 관아의 내아는 현재 경주문화원 향토자료 전시관이다.
피금각(披襟閣)
김제 동헌 왼편에 있는 정자이다. 피금(披襟)이란 ‘흉금을 털어 놓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옷깃을 풀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뜻을 갖고 있다. 1633년 건립되었으며,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로 재직할 때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지은 휴식 공간이자 손님맞이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김제 관아를 다 돌아보고 나니 비가 많이 뿌린다. 그래도 관아에 인접한 김제 향교를 보지 않을 수가 없어 비를 무릅쓰고 기본적인 건물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 왔다. 여기서는 생략한다. 오후 5시 경 개갑장터로 떠나면서 한정흠 순교자를 두고 말한 “죽음을 삶처럼 보았고 천당에 일찍 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한탄하였다.”는 구절을 새삼 떠올렸다.
개갑장터로 가는 중 휴게소 한 곳을 들렀는데 부안 고려청자 휴게소. 전남 강진에 만 고려창자 가마가 있는 줄 알았는데 조선시대 청자가마터가 부안에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출토된 청자 파편은 그 기법이 다양하고 제작기술이 매우 우수했다고 소개 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 작가가 제작한 청자 작품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런 것이 휴게소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