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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율리오 2세는 호전적이었지만 또한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 같은 예술가들을 옹호하고 특히 브라만테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 베드로 대성전을 신축하기도 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성 베드로
대성전 일대. |
16번째 세계 공의회인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와
17번째 세계 공의회인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1~1445)와 관련해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공의회 우위설'입니다. 보편(세계)
공의회의 권위를 교황보다 우위에 두는 공의회 우위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서구대이교(西歐大離敎, 교황이 둘, 셋으로 나뉘어 서방 교회가 분열된
것)를 종식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는 오히려 대립 교황을 선출해 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1447)는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공의회 우위설을 용인하는 콘스탄츠 공의회 교령 '프레쿠엔스'를 무효로 선언하고 공의회
우위설을 따르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만, 그 이후에도 공의회 우위설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또 세속 군주들은 교황권을 약화시키는 데
공의회 우위설을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교황 권한을 위축시키고 약화시키는 공의회 우위설을 교황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503년 10월 16일 비오 3세가
교황 즉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선종했습니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를 통해 만장일치로 선출한 후임 교황이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였습니다.
호전적이며 예술 옹호한 율리오 2세 교황이 소집
반교황파 추기경들 소집한 피사 공의회 문제 다뤄
교황
선거에서 성직매매 금지하는 칙서 마련 지시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의 조카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출신인 그는 60살 고령이었지만 야심이 있었고 호전적이었습니다. 그는
교황에 선출되면서 2년 이내에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서약했지만 서약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황령(교황이 직접 관할하는 영토)을 회복해
교황청 재정 적자를 만회하고 교황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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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율리오
2세 |
율리오 2세 교황은 또 예술을 옹호해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같은 당대 거장들을 지원했습니다. 브라만테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 베드로 대성전도 신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오 2세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단의 추기경들이 공의회 우위설에 근거해 1511년 9월
이탈리아 북부 피사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교황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교령 '프레쿠엔스'를 무시할 뿐 아니라 2년 이내 공의회를 개최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고 교회 개혁도 더 늦출 수 없다는 것이 소집 이유였습니다.
교황과 대결을 벌이던 프랑스 왕 루이 12세도 추기경들을 지원했습니다. 예정보다 한
달 늦은 10월 1일에 시작한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은 3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파 일색이었습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피사 공의회에 맞서 교황 율리오 2세
역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율리오 2세는 피사 공의회가 열리기 전인 1511년 7월 공의회 소집 칙서를 통해 1512년 4월 19일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공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합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입니다.
18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당초 발표보다 늦은 1512년 5월 3일(혹은 5월 10일) 교황 율리오 2세 주재로 개막합니다. 개막
회의에는 추기경 15명을 비롯해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라틴 교회 총대주교들, 대주교 10명과 주교 50여 명, 그 밖에 대수도원장들과 수도회
총장 약간 명과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도시 국가들의 사절들이 참석했습니다.
1517년 3월 16일까지 거의 만 5년 가까이 전체 12회기로 진행된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전체
참석자 수는 430여 명이었으나 매 회기마다 평균 100명 안팎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했고, 그나마 절대다수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공의회는
1512년과 1513년에 각각 4차 회기를 열었고, 1514년부터 1517년까지는 매년 한 차례씩 회기를 진행했습니다.
교부들은 안건 논의를 위해 24명으로 이뤄진 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는 또 8개 소위원회로 나뉘어 활동했습니다. 피사 공의회를 소집한 반 교황파 추기경들에 대한 처리 및 교회내 평화 도모 문제,
교회 개혁 문제, 영혼 불멸에 관한 문제 등이 주요 안건이었습니다.
1512년에 열린 네 차례 회기에서는 반 교황파 추기경들이 소집한 피사 공의회 문제를 주로
다뤘습니다.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됐습니다. 영국과 아라곤의 왕 그리고 독일 황제 모두 피사 공의회를 비판하면서 라테라노 공의회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왕 루이 12세만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여전히 피사 공의회를 지원했습니다.
율리오 2세 교황은 1513년 2월 제6차 회기 때 교황 선거에서 성직 매매를 금하는 칙서를
마련토록 하라고 지시합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율리오 2세 교황의 마지막 과업이 된 이 칙서는 금전을 미끼로 또는 지위를 보장한다거나
편의를 봐주겠다는 약속 등으로 교황에 선출될 경우 그 선거는 무효이며, 뇌물을 받은 이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이 사면할 때까지 파문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리오 2세가 얼마 후 선종하고 후임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유업을 물려받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사 공의회에 대한 지원에 부담을 느끼던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던 율리오 2세 교황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자 더는 피사 공의회를 지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는 교황의 스위스 동맹군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결국 루이 12세는 1513년
말 피사 공의회를 중단시키고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합법적인 보편(세계) 공의회로 인정합니다. 피사 공의회에 참석한 일부 추기경들도 레오
10세 교황에게 돌아왔습니다.
레오 10세 교황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조반니 데 메디치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헌됐고 13살에 이미 부제 추기경이 됐습니다.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시 르네상스식 교육을 받은 그는 문학과 예술, 음악에 심취한 풍류가였습니다.
호전적인 율리오 2세 교황에게 질린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그러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38살 조반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아마 과도기 교황 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교황에게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주요 과제인 교회 개혁
안건이 넘어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