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 영화 ‘야구소녀’를 보다
어릴 적, 그러니까 1960, 70년대의 여자(女子)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남녀가 연애를 해도 여자만 손가락질 받았고, 더운 여름철 민소매 티셔츠나 짧은 반바지를 입으면 헤픈 여자로 구설수에 올랐다. 남자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거나 제안하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어디 여자가’ 또는 ‘여자 주제에’라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여자들이 자동차 운전하는 것도 터부시되었다. 운전하다가 끼어들기라도 잘 못하면 남자들로부터 ‘집안에서 살림이나 잘하지 어딜 나와’라고 욕설을 들어야 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여장부’라는 말도 엄밀히 말하면 여성 폄하 발언이다. 장부(丈夫)라는 말이 장정 남자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옥선이라는 여자 정치인이 있다. 내 고향인 충남 서천군을 지역구로 했던 사람이다. 김옥선은 서천군 장항읍에서 정의여·중고를 설립 운영했고, 오지였던 보령시 원산도에 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장항읍에 ‘모자원(母子院)’과 원동교회를 설립했다. 이렇게 쌓은 인지도와 사회적 영향력으로 7대, 9대,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여성정치인이었지만 김옥선은 선배들인 박순천, 임영신과 달랐다. 박순천, 임영신이 한복자락 휘날리며 정치판을 누볐다면 김옥선은 남장(양복)을 하고 국회의사당에 들어갔다. 외모도 당시 남성 정치인들처럼 상고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2:8 가르마를 탔다. 하도 오랫동안 그 스타일만 고수해서인지 나중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나장만 그를 향해 구구한 소문들도 돌았다. 진짜 남자인데 여자인척 한다는 소문부터 고무로 된 남자 성기를 달고 다닌 다는 소문 등 지금으로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김옥선의 성(性) 정체성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여성 정치인으로 당당하게 사회적 불평등과 편견을 깨려하기 보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남성중심 사회에 편입하려고 노력했던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최근 ‘야구소녀’라는 참 좋은 영화를 한 편 봤다. 극장에는 가지 못했고 방구석에 쭈그리고 않아 케이블 텔레비전으로 봤다. ‘참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느낌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 같은 관람자는 영화사적 의미나 가치, 연출기법, 촬영의 디테일 같은 건 잘 모른다. 그저 느낌 좋고, 공감되며, 감동받으면 대만족이다. 이 영화가 그랬다.
‘야구소녀’는 애써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좋아하고 재능도 있는데 낮선 길을 가려면 우선 두려움부터 생긴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유럽여행을 떠날 때처럼 말이다. 이 여성은 아직도 남자들의 고유영역으로 남아 있는 ‘야구’를 자신의 미래로 선택했다. 처음으로 그것도 미지의 세계를 자신의 미래로 선택한다는 것은 내적 갈등과 외부적 압박을 각오해야 한다. 어쩌면 도장 깨기를 하는 고수처럼 처절한 투쟁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야구소녀는 ‘여자가 왜?’, ‘여자는 안 돼’라는 우리사회의 벽을 한 칸 한 칸 무너뜨리며 초등학교 야구부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활약 했다. ‘여자니까 이정도면 잘 해’라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한 명의 야구선수로 당당하게 경쟁에서 이겼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그렇다고 그 이후의 삶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매번 남자들이 순리(順理)라고 주장하는 험로에서 의심받고 테스트 받으며 자기 세계를 만들어갔다.
실력이 출중한 고등학교 야구선수의 진로는 세 가지다. 하나는 프로구단에 입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교 야구부에 입단하는 것이다. 실력이 아주 출중하면 미국프로야구단에 지명 받을 수도 있으며 정 안되면 독립야구단에 들어갈 수도 있다. 남자선수라면 어떤 선택도 가능했겠지만 야구소녀는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불가능했다. 아니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불가능해 보였다.
헬렌 켈러처럼 고난을 극복하며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 뒤에는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야구소녀의 조력자는 고등학교 야구단 코치였다. 제자의 희망을 살리고 싶었던 코치는 백방을 뛰었다. 프로야구단 테스트만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야구소녀가 프로테스트를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코치의 헌신 덕분이었다. 하지만 테스트 현장에도 남녀의 구별은 엄격했다. 야구소녀를 한 사람의 선수가 아닌 ‘여자선수’로 보는 시각은 여전했다. 야구소녀는 남자들처럼 힘 있는 강속구를 던지지 못했지만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으며 테스트를 훌륭하게 마쳤다. 분명 돋보이는 활약이었지만 아직까지 그는 ‘여자’였다. 수천 년 지속되어온 ‘여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여성으로 ‘프로야구선수’가 된 사람은 탄생할 수 없었다. 구단도 실력은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여자선수를 스카우트할 수는 없었다. 사회적 여론도 부담스럽고 선도적으로 통념을 깨는 것도 어려웠다. 구단이 선택한 최선의 방안은 프런트 제안이었다.
구단의 ‘프런트 제안’은 엄청난 파격이었다. 야구가 오랫동안 남성들의 스포츠다보니 굳이 여성프런트는 필요치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프런트 제안은 파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프로구단이니만큼 수익을 고려치 않을 수는 없다. 구단의 판단은 야구를 잘 이해하는 여성이 프런트를 하면 여성야구팬 확보나 여성 아마추어팀 결성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봐도 그것은 최대한의 배려였고 최소한의 윈윈이었다. 그런데 야구소녀는 프런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조용히 계약서를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자야구선수가 아니라 그냥 야구선수입니다.’ 참 멋있고 당당한 행동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꿈만 꾸다 사그라질 것이 뻔한 현실이 안타까웠고, 여성 프런트가 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진보인데 그걸 포기하는 것이 정말 아까웠다.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구단이 마음을 바꿔 야구소녀의 어머니께 정식 계약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같은 상황은 영화이니까 가능한 상상력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처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구단의 처사가 참 대단하고 자랑스러웠다.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1919~1972)이 있다. 그가 프로야구단에 입단할 때 미국 백인사회의 반응도 지금과 똑같았다. 미국사회는 재키 로빈슨에게 ‘너 같은 흑인이?’라는 강한 물음표를 달았다. 강한 물음표가 주는 깊은 뉘앙스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인들의 반응만큼이나 야구판에서는 상상 이상의 차별과 모욕을 당했다. 보수적인 동부지역에서는 경기를 보이콧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재키는 차별과 편견을 실력으로 극복했다. 당신들이 틀렸다는 걸, 당신들의 행동이 약자에 대한 폭력과 억압이라는 걸 당당히 자신의 몸으로 증명했다. 은퇴할 때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은 영구 결번되었다. 당연히 야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매년 4월 15일에는 미국 프로야구선수 전원이 등번호 42번을 단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한다. 이날은 재키 로빈슨이 프로야구에 데뷔한 날, ‘재키 로빈슨 데이’다. 그는 역사가 되었고, 모든 흑인들, 유색인종, 차별받는 사람들의 꿈이 되었다.
‘짐 애보트’라는 투수가 생각난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미국야구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선수다. 그는 투수로도 훌륭했지만 조막손이라는 신체장애를 가진 선수로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손이 생명인 투수가 한 손을 쓸 수 없다면 일찌감치 야구선수가 되기를 포기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 애보트가 야구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보트는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프로야구선수가 되었다. 그가 선수로 성장하기까지 누군가는 희망과 격려를 더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오래참고 기다려줬을 것이며, 누군가는 편견의 시선을 거두고 동등하게 평가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짐 애보트는 한국과의 4강전에서 완투승을 거뒀다. 경기를 마친 한국선수들은 그가 공도 빨랐지만 수비도 잘했다며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라경이라는 야구선수가 있다. 굳이 수식어를 붙인다면 ‘여자야구선수’다. 전에 한화이글스 선수였던 김병근의 여동생이다. 어릴 때 오빠가 야구하는 모습이 멋있어 초등학교 6학년 때 계룡대 리틀야구단에 입단했다. 여학생으로 정식야구선수가 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강하고 빠른 공을 던져야 하는 투수였다. 재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김라경은 중학교 3학년 때 리틀야구 역사상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쳤으며 그 해 여자야구 국가대표로 뽑혀서 여자야구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고등학교도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앞날을 캄캄했다. 당장 대학에 진학해서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고 어떤 프로야구팀도 여성인 그를 선발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막막했던 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서울대학교였다. 순수 아마추어(동아리)만으로 야구단을 운영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김라경은 훈련과 공부를 병행했다. 죽도록 힘든 일이지만 꿈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2019년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낙방했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1차, 2차 시험을 통과하고도 마지막 실기시험 때 시험장 건물을 착각하는 바람에 입장시간에 늦어 시험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차선책으로 경희대학교를 입학했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김라경은 대학을 다니며 악착같이 다시 공부해서 2020년 서울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영화에서처럼 국내 프로야구단에는 입단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본인도 국내는 포기하고 일본여자프로야구단 입단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속(110km/h)이 빨라 해외 야구팀에서도 군침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프로야구단에서 프런트 제의를 거절하고 돌아온 야구소녀에게 고등학교 야구코치는 신입선수 파일을 보여줬다. 파일 첫 장에는 어느 신입선수의 지원서가 붙어 있었다. ‘여자아이야. 이 아이는 너를 보고 꿈을 키웠데. 방안을 온통 네 사진으로 도배했다나봐.’ 남의 얘기하듯 툭 던지는 코치의 말에 축 쳐졌던 야구소녀의 눈빛이 빛났다. 아마 그날 저녁에는 프로야구단 입단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재키 로빈슨처럼, 짐 애보트처럼, 그리고 김라경선수처럼 그는 누군가의 꿈이 되었다. 길이 되었다. 세상이 되었다.(2021.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