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가족모임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하루를 이탈하여 한라산을 종주했습니다.
靈山을 몇 차레 올랐었는데 이참에는 눈덮힌 한라산을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정상 백록담을 오른 다음 관음사입구쪽으로 내렸는데 장장 18키로미터를 9시간에 걸쳐 걸었답니다.
218번 버스에서 내려 청소하던 관리소직원에게 산으로 가는 입구를 물었더니 그는 대답을 짧게 하면서 '아이젠 없이는 못 갈거요'했다. 나는 “물론 가져왔지요” 짧게 답하고 길을 서둘렀다. 이른 시간대여서인지 성판악탐방지원센터에 안내자가 없어서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입구에 설치된 카운터기를 밀치고 들어갔다. 초입은 나무데크와 마직포가 까린 꽃길 같았다.
얼마쯤 갔을 때 해발900미터 표지석이 있었다. 앞으로 1000미터를 더 오를 것을 생각하니 막연하기도 하고 겁도 났다. 속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오르겠지...'라고 다짐하면서 걷다보니 등산 안내도가 다시 보였다. 들여다보니 성판악을 출발한지 20분이 지났고 한 시간을 더가면 새속대피소라고 적혀있었다. 그 무렵 한 무리 젊은이들이 나를 앞질러갔다.
더 오르자 스기나무숲이 하늘높이 위로 곧게 자라고 나무터널을 이루어서 어두침침했으나 상큼한 공기로 가득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폐 깊숙이 맑은 공기를 들어 마시며 걸었다. 오르막을 한차례 오르자 속밭대피소가 있었고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스피드를 아니까'하고 그냥 건물만 찍고 지나쳤다.
이곳에서부터는 오르막길이 나타났다가 평탄한 길이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길에는 잔설이 남아있고 돌이 젖어있어서 가끔은 미끌렸다. ‘아이젠을 신을까’하다가 속도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미루었다. 올라갈수록 잔설은 조릿대에도 키 작은 나무에도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벌써 잔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지만 나는 혼자라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얼마를 더 올라갔을 때 키 큰 나무에도 눈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눈꽃이 피어있는 나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이번에는 어떤 여자에게 부탁하여 처음으로 인증샷을 남겼다. 더 올라갈수록 눈이 많이 쌓여서 눈꽃터널을 이루었다. 그 터널을 배경으로 부산 말을 하는 젊은 여자들이 사진을 찍으며 '참말로 꿈 속 같지에... 했다.
이러한 동화 속 눈꽃터널을 한 30분 지나는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수도 없이 찍었다. 비스듬히 누운 고사목에 얹힌 눈이며 말라버린 하천의 돌맹이를 덮은 눈이며 진녹의 구상나무잎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 그리고 그 눈꽃터널 틈새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담았다. 그럴 때 살랑바람이 시샘하는지 눈꽃을 터뜨려서 은빛 눈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렇게 즐기면서 한참을 더 오르자 왼편으로는 사라오름 가는 길이 나왔지만 포기하고 직진해서 진달래대피소로 향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햇빛을 쏘이면서 담소도 나누고 쉬고 있었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화장실만 거친 다음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서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는 간식도 먹도 스마트폰 폰 충전도 더하고 아이젠도 신었다.
등산로 안내도를 보니 이곳 진달래대피소로부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멀었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다. 아닌게아니라 길은 눈발로 젖어있어서 상당히 미끄러웠고 거기다가 가팔랐다. 그래도 아이젠을 착용한 덕에 걱정보다는 나았다. 올라갈수록 키큰 나무들은 여전히 눈덩이를 이고 있었고 강열한 햇볕은 그 틈새로 파고들었다.
더 오르자 나무들은 키가 작아지고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산정상이 가까이 디가와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한달음에 가고 싶었으나 너무 힘들어서 계단에 주저앉아서 쉬었다. 내려다보니 멀리로는 흰구름들이 세상을 덮고 있었고 발 아래 구상나무들은 솜이불을 덮은 듯했다. 어떤 여자는 풍경사진을 찍다말고 '눈으로 직접 봐야한다'고 외쳤다
다시 오르니 키작은 풀들이 눈녹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쭈욱 이어진 계단으로는 사람들이 몇 십 미터나 되게 줄을 서고 있었다. 아마 '정상의 백록담기념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보였다. 나는 사진보다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어서 줄을 서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비껴서 올라붙었다. 정상에 올라서 시간을 보니 4시간 30분 걸렸었다.
사람들이 백록담기념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슬며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쉬고 있는 어떤 사나이에게 부탁하여 옆팔댕이서 기념석이 보이는 인증샷을 남겼다. 그리고 가져온 초밥을 먹고 있을 때 까마귀들이 내 주변을 서성댔다. 먹을만큼 먹고나서 '보시로 여기고' 녀석들한테 몇 덩이를 던져주었더니 녀석들이 ‘뭐라고’ 했다.
먹고 찍고 했으니 여유로워졌다. 백록담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으로 갔더니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백록담 안을 들여다보니 하안 잔설로 덮혀 있었다. 그 옛적에 왔을 때는 경사로로 내려가서 백록담 물에 손을 담구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경계대가 설치되어 먼발치서 바라만 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맨 정상을 나타내는 기념목을 배경으로 또 인증샷도 남겼다.
이어서 측후소 쪽으로 갔더니 뒤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길을 물으니 '관음사쪽에서 온다'고 했다. 그 쪽 길을 택하기로 했는데 예전에 한 번 내려가 본 적이 있기도 하고 ‘포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속설을 믿는 터였다. 출발부터 나무계단이 번듯해서 속으로 ‘역시 선택을 잘했다'고 좋아했다. 멀리 쳐다보니 제주시가지와 파란 바다가 다가와 보였다.
더 좋은 것은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었다. 발아래로는 구상나무들이 미사를 올리는 신도들처럼 흰면사포를 쓰고 머리를 맛대고 있었다. 나무계단이 쭈욱 이어졌지만 성판악코스보다는 한결 부드러웠다. 편안한 마음으로 눈꽃터널을 통과하는데 녹아내리는 눈덩이들이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음 속으로 '오늘은 세례를 받는 날인가...'했다
수백개의 계단을 타고 내리자 협곡이 있었고 용진각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니 다시 오르막길이었다. 한참을 오르자 전면으로 험상굿게 생긴 삼각봉이 길을 막아서며 있었다. 그 아래로 난 길에서 잠깐 쉬면서 온 길을 뒤돌아보니 왕관봉에 눈이 덮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하얀 망토를 쓴 수많은 군사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았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길을 걷다보니 삼각봉쉼터가 있어서 계단에 앉아 잠깐 쉬었다가 다시 출 발했다. 다리를 또 하나 건너 오르막길을 걸었는데 마치 개미등줄기를 타고 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서 ‘다왔는가 했더니...’ 아직도 관음사입구는 멀어서 수도승처럼 터벅터벅 걸었다. 드디어 관음사탐방센터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니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꼬박 4시간 30분 걸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