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종하면 월악산 한수면 차부집(車部, 버스정류장)
♥. 여러해 전에
고등학교 동기로 충북 도교육청 부교육감 및 대전시 교육청 부교육감을 역임한
김근학(金謹鶴: 현재 초당대학교 교수 및 나주김씨 도유사, 청주고 33회 회장) 친구가 재직중
제천과 단양군내 출장중 청풍을 경유 할 때,
청풍 유적지 앞 관광 안내도 대형 간판에
한수면 황강리를 표시한 곳에 2층 차부집이 그림으로 표시된 것을 보고
친구(붕촌)가 살던 집인데 하고 내게 전화를 걸어 온적이 있다.
♥. 알만한 사람들은 월악산 하면 이명종의 고향을 연상한다.
나는 아직 수몰후 청풍을 다녀 온적이 없다.
전국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종합 버스 정류장이 있다.
한수면 버스 정류장이 내가 태어나 자란 집이다.
그 당시 우리집을 가리켜 차부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초.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물론
50년 이상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늘 고향을 말할 때,
월악산 아래 한수면 초등학교 앞 차부집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월악산을 말하면 이명종을 연상하는 모양이다.
-. 수몰지역은 흔적이 없다.
6. 25. 북괴의 남침으로 전란이 지나간 후에도
그리고 불(화재)과 물(수해)이 휩쓸어 간 지역도
타다남은 검은재나 수해를 당한 자리라도 그 위치의 땅만큼은 가늠 할 수있다.
그러나 충주호 수몰지역은
어디가 어디쯤인지 판단이 정확 할 수 없는 은빛 물결만이 반짝이며 넘실 댈 따름이다.
그래서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은 그 아픔이 더 클수뿐이 없다.
가 볼 수 없는 고향 한수 땅 !
우리의 소원은 남과 북의 자유통일인데,
고향을 북에 둔 이들은 통일되면 가 볼 수 있으련만
한수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설움은 무엇으로 치유 할 수 있나...,
-. 할아버지께서 1929년도에 건축
내가 태어나고 어린시절 자란 집은
한수면 한천리 85의 1번지,
충주와 단양을 왕복하는 국도변 한수초등학교 앞
주춧돌이 큰 일본식 양철지붕으로 된 2층집으로
1928년부터 1929년 사이에 할아버지께서 건축하셨다.
아래층은
가로 4칸에 세로 6칸이며 방, 마루, 부억, 다락, 우물(펌프식), 목욕탕, 지하실과
화장실은 안과 밖으로 되어있다.
2층은
열칸에 마루로 되어 있었고, 오르고 내리는 계단이 안과 밖으로 각 1개씩 있었다.
집의 문들은
4면 덧문이 쇠붙이 바퀴가 아래에 달려,
문턱에 레일이 깔린 나무로 된 미닫이 문짝이 좌우로 밀어 열고 닫고 하였다.
그리고 그 미닫이 문짝 안으로는 유리로 된 여러개의 창문이 있었고,
또 각방이나 부억 마루 등등에도 각각의 문이 있었다.
겨울은 따뜻했고 여름에는 아래층만큼은 시원한 건물이었다.
집의 남측 중앙엔 큰 대문이 밀치고 당겨서 열고 닫는 탄탄한 문이었고,
작은창이 많은 유리 창문들은 덧창문으로 건축되었다.
기둥, 마루등의 목재들은
단단하여 넓고 두께가 있어 오랜세월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 6. 25. 이후 차량의 1일 통행 회수
집의 3면이 큰길로 접해 있고
정기 버스의 정류장으로 한수면 17개리,
살미면 문화리 남벌리, 동량면, 꽃바위, 마그실 등등에서까지 이용한 차부집이다.
사시사철 오고가는 이들로 번잡하기 이를데 없어 조용한 가정집은 아니었다.
충주에서 단양까지 운행 구간에
또는 충주에서 청풍 경유하여 제천간에 1일 통행 회수는
북괴로부터 6. 25. 남침 전에는 기억에 없지만,
1일 오전 오후 각 1대에서 매년 그 회수가 늘어나 1961년도에는 시간대별로
첫차로부터 막차에 이르기까지 오전 5~6회, 오후 5~6회 정도로 증차되었으니,
이용하는 승객의 수가 늘어난 것은
사회 발전의 변화 속도를 체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 운행한 차량의 소속은 대성여객 버스로 기억한다.
운전사, 조수 그리고 조수보좌와 여자차장까지 운행요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경기여객, 중앙여객이라는 버스회사도 점점 참여하였다.
당시 운전기사는 남들이 부러워 했고,
소요시간은 비포장이고,
정류장이 많아 충주에서 황강리까지 24Km를 1시간이나 걸렸다.
♥. 어머님의 인정어린 따뜻한 배려를 받으분들이
특히 겨울날
첫차를 이용하기 위해 자동차가 오는 시간전에 미리 오신 손님,
오다가다 차량 고장으로 주야 불문하고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 온 손님,
막차의 연착으로 한밤중에 집으로 갈 수 없는 손님...등등은
학교 정문을 옮기기 전,
그 앞집이 여관(한수초 35회 ?, 이인구(李仁九))이 있었음에도,
많은 분들이 잠시 쉬는 것, 잠을 자는 것, 간식, 식사 등등 신세를 졌다. 라고 하면서
약 10년 전까지만해도 어머님의 따뜻한 인정에 고마움을 말씀하시는 어른의 얘기를
여러곳에서 들은바 있다.
더욱이 당시 후생사업에 참여하는 젊은 군인들도
많은 신세를 지는 인연으로 결혼중매까지 성사 된 사연도 내가 아는바로 2건이 있다.
♥. 6. 25. 직후 후생사업
6. 25. 직후, 약 3~4년(?) 동안은
전장의 폐허에서 생산 할 수 있는 공장, 자재, 부품, 기술, 인력 등의 부족으로
국민이 사회활동을 편리하게 할 수있는 교통, 시설, 장비등등 각분야에 걸쳐 부족 할 수 뿐이 없었다.
나무, 곡식, 자재, 생활 필수품 등등의 물동량과 교통편의까지
군부대는 후생 사업의 명분으로 국민의 사회활동에 지원하는 체제가 있어 불편함을 덜수 있었다.
♥. 아래 사진상의 집은 구조를 변경한 것입니다.
아래 사진상의 우리집은
1961년 12. 17일 안동인 권 ??(약 47~8세) 사장에게 매도한 이후 구조를 변경한 것이다.
전면(남측면), 학교 방향 중앙에 대문이 있었고, 2층 사진관은 있었고, 경북식당은 없었다.
위 사진 설명 :
-. 햇수로 51년 전, 1962년 8. 14일 여름방학 중
대학교 같은과 친구 배철수(裵哲洙)와
대전, 유성, 황학사, 충주비료공장, 단양8경, 영월 장능 등등을
여행중에 옛날 황강리 한수초 앞, 차부 집 앞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입니다.
-. 사진상에 두사람을 초점으로 보시는것 보다 1961. 12. 17일 이후,
안동인 권?? 사장이 구입하여 집을 새로 수리하여 꾸민 황강리 공동 정류장입니다.
-. 그 집에서 태어난 이들
막내고모의
큰 아들 박기환(朴起煥 : 서울대 상과대학 1등 졸업, 코롱그룹 산하 원진레이온 사장 역임)으로부터
나를 비롯한 6남매(어릴때 죽은 여동생 종현 포함) 등이 출생한 집이다.
지금 생각으로
어느 만삭의 여자분이 차를 타러 나왔다가 우리집에서 갑자기 분만한 일도 있는데,
어느곳에서 살았던 뉘집 자부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강 건너에 살던분(?)인듯 한데...,
저 집에서 할아버지 20년, 할머니 14년,
아버지 31년, 어머니 21년,
그리고 내가 19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 집 주인은 아버지로부터 안동 사람 권? 사장, 그리고 안공보(安公保) 님
1961. 12. 17일 대전으로 이사 할 때,
경북 안동 사람으로 당시 나이 40대 중반의 권(權) ? 선생이 매입하여 3년여 살았다.
이후(1965년 ?),
황강리 거주하시던 안공보님(安公保 : 충주시 안귀현 이비인후과병원 원장의 부친)이 매입하여
수리후 사셨는데,
1972년 8. 19일 수해에 거센 흙탕물이 온 마을의 집들을 다 휩쓸어 갔어도 이 집만은 살아 남았다.
1982년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담수됨으로 철거되어
지금은 수몰로 물속에 이름모를 고기떼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수몰이 안되었더라면 일제시대 건축물로서 문화재로 보존 될만한 건물이었는데...'
2012. 1. 17(화). 대전시 보문산 아래 청록실에서 붕촌 이명종
첫댓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역시 저 차부집을 여러번 드나들었었기에 더 흥미로웠던것 같습니다..저도 함암나루터를 통해 충주를 오갈때면 늘 차를 기다리던 곳이었으니까요..그 시골에서 그 당시 2층집에 사셨던걸 보면 정말 브르조아셨습니다~~^^
jangmi 님 !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을 기원합니다.
위 사진은
수몰된 제천군 한수면의 '내고향 한수' 카페
'고향 사진방'에 빼 놓을 수 없는
사진 중의 하나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수몰 전,
한수인들의 정류장으로 누구나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요 ?
장형우 : 12.01.19. 22:42 학교 다닐때 포탄리에서 배타고 건너와서 매일 이 차부집 앞을 지나서 학교로 가곤 하였지요
제가 학교를 다닐때는 안공보님이 이 차부집에 사실때가 되는것같습니다 ^^
명천 : 12.01.17. 20:04 붕촌님~
옛날 학교다닐때 생각이 납니다..붕촌님이 대전으로 이사갈때가1961년도군요.
안공보도 생각이나고등등이........하여튼 감사하구요..잘읽고갑니다
지영이아빠(김천회) : 12.01.17. 23:56 수몰이 안되엇다면 당시의 건축물 로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엇을 텐데 안타깝네요..
신상철 : 12.01.18. 10:55 선배님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저도 그곳 차부집에서 짜장면도 먹엇던 생각이 나네요 2층집은 생각 나는데 옆집이 가물 가물 하네요 저는 북노리라 장차도 많이 타고 다녔는데요 그때는 막 뛰어가면 차도 탈수 있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 니린것 같아요 선배님 북노리에 들어가면 가족 사진이 있는데 그곳이 황학사 절터 입니다. 91번
포탄(강희원) : 12.01.19. 00:35 선배님 글을 읽고 사진을 보니 국민학교 입학식날부터.
중학교 졸업까지의 학창시절이 그리워지내요...
차부집이 저는 어재까지는 충주에서 이비인후과 지하에서.
떳다노래방을 하는 안기혁 친구내 집인줄 알았는데.
처음부터는 아니였군요 제가두살때 이사를 하셨으니 알수가 업었지요.
학교 정문이 제가 다닐때의 정문은 옴겨진 정문 이었군요.
제가 다닐때의 정문앞에는 설탕을 녹여서 소.중.대.막대 사탕을 만들어.
회전시켜 선태하여 사서 먹을수 있는 가계집이 있었 는데.
선배님 좋은글과 사진 잘 감상하고 갑니다.선배님 내일도 행복한날 되세요...
jangmi : 12.01.19. 16:18 와~~ 정말 감개무량하네요~~ 함암나루터를 가려면 항상 차부집을 꺾어 들어가야 했는데... 그 차부집이 선생님 집이었다니...신기합니다...그곳에서 충주에서 고등학교 다닐때 서운리 집에 오갈때 버스도 여러번 기다렸었고...
장자봉코바위 : 12.02.15. 11:25 저어렸을때도 이집이 있었던것 같은데요 뒤에 초가집은 후에 문구와 뽑기 하던집같은데요
한수 : 12.02.26. 16:02 옆 집이 27회 변현창이내가 살지 않았나요?
저의 옆집은
코보네 권희청(한수초 33회)의 집이고,
그 옆집이 3형제분이신
변현승(충주 거주), 변현창(미국 거주), 변현봉(한수초 33회)의 댁입니다
위 댓글 세번째부터
장형우님, 명천님, 지영이아빠(김천회)님, 신상철님, jangami님, 장자봉코바위님, 한수님의
댓글은 본 카페 '붕촌(이명종)서재실'
159번에 올린 내용을 (펌)한 것입니다.
붕촌고문님의 집 "그리운 고향의 추억" 차부집을 다시 한번 회상합니다.
그때는 이 차부집을 통하지 않고서는 충주이든 제천이던지 갈수가 없엇지요.
충주에서 차를 타고 들어와서 포탄리 집으로 갈려면 차부에서 버스를 내려서 한천리 나루터로
나가서 다시 배를 타고 함암리을 거처 포탄리 집으로 가곤 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지금은 기억이 잘! 현창이 현승현님은 생각이 나는대 동생은 기억이 없네요! 현창이는 엇그제 미국에서 전화를 했던대
한수(황강) 선배님 !
을미년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한수초등학교 앞
변씨댁은 3형제입니다.
막내가
저와 한수초 33회 동기인 변현봉이지요.
위 사진상에
변씨댁 상점도 끝부분에 조금 보이는군요.
그 집과 집 사이에
작은 골목길이 있었지요.
그 골목길을 나가면
칭칭이 할머니댁이 있었고
건편에는 박한선(박동옥 조카) 선배댁과
방앗간(권순중 부 권희진씨 운영)이 있었지요.
선배님 댓글까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요 몇일전에 현창이 전화왔기에 인터넷 내고향한수를 좀 보라고 했는대. 그친구는 인터넷을 안보나봐요.
한선이네는 건너편이지요!
정말 귀한 사진이군요. 변현승 .현창.현봉 아저씨는 저에 친척이십니다.안공보씨는 저와는 보통 인연이 않입니다.안공보씨는 저에 다리를 치료 하셨던 분이지요.당시 여름에 국민학교6학년이였던 제가 동리 퇴비경연 대회때 제가 서창국교 총 회장이기에 풀을 베다가 다리 뒷금치가 친구 낫에 인데가 끝어져 교장선생님(민우식) 과 나에 아버지와 같이 ㅇ안곰보(당시나에 생각이름)
시에게 치료을 받았음(아마도 군에서 위생병으로 군복무하시여 취득한 경험으로 의사로 면민 들에게 봉사 차원이셨던 같아요) 지금은 큰일날 일이지요. 무면허이셨을거예요.그러나 지난 일이지요. 생존해계시면 기억 나실겁니다.저는 지금 잘 지내고 있읍니다
묵상님 !
지난 초6년 때의 사연 상세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리고 고인이 되신 안공보(安公保)님에 대한 얘기도 잘 알고 계시네요.
안공보 형님은 집안에 어른이 계셨는데
정월 초하룻날도 땔감 한짐을 해오지 않고는 떡국을 먹지 않았을 정도로
엄친하에 젊은 시절 얘깃거리...등등이 있으며
자나깨나 근면하시고 성실하신 성품의 소유자로
한자를 익히거나
일반적인 공부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상하신 면도 두드러졌지요.
여동생 안공분이
나와 한수초 33회 동기이고
본 카페 '고향 사진방'에 소개되어 있는
불쌍한 권희청(33회)의 처지에
그와
대화도 많이 나누곤 했던 인정도 많은분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