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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탈출기도가 기도다>의 줄거리: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태복음과는 전혀 다르게 배치하는 누가복음의 의도가 독특합니다. 이 의도 속에 누가가 생각하는 기도의 정의가 들어 있습니다. 불교도 회교도 모두 기도를 가르칩니다.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기독교인으로서 기도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 정의하시렵니까? 기도는 탈출 기도(企圖)입니다.
탈출기도(企圖)가 기도다
(눅11:1-2a)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탈출기도(企圖)가 기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탈출기도에서의 기도는 뜻한다는 뜻의 기도(企圖) 있지 않습니까? 무엇인가를 의도해서 꾀하는 것, 프로젝트 같은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祈禱)라는 것을 한 마디로 정의 하면 뭐가 되느냐?
탈출기도(企圖)다, 탈출기도.
11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누가가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기록한 위치를 우리가 잘 살펴보면 마태복음과는 아주 특이하게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주기도문이 6장의 산상수훈 속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쭉 나오고 있는, 벗이 밤늦게 찾아왔을 때 강청하는 기도와 그리고 그 유명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권면의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강청하는 기도의 말씀은 뒤에 나와요.
그런데 이렇게 같이 묶어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기도문이 6장에 나오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7장에 나오는데, 오늘 누가복음에서는 붙여놓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누가의 의도가 특별히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주기도문까지 포함해서)을 여기에다가 배치시킨 의도를 알기 위해서 앞에서 어떤 내용이 있어왔는가를 알아야 도움이 된다는 얘깁니다.
앞에서 해온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기에 도대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여기에다 배치시켰으며, 그 다음에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귀신들려 귀먹은 사람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손이 임해서 이런 역사가 나타난다는 말씀을 붙이는 것일까?
그래서 누가의 이 본문을 배치한 의도를 잘 들여다보면 누가가 이 기도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아주 감사하고 고마운 것은, 이 누가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때 그 말씀과 기도에 상관관계가 무엇인가가 또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그 의도 속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한번 살펴봅니다.
우리 바로 이 11장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있었던 사건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그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마리아가 취하는 태도와 마르다가 취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오는 이야기가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라고 일컫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도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70인의 전도 보고 사건과 붙여버립니다.
지금 이게 다 연관이 되어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우리가 잠깐 기억을 되살려 보면, 70인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귀신들이 항복하더이다’ 하고 보고를 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귀신이 너희들에게 항복한 것이 기뻐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것은 귀신이 항복했다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 너희에게 임했다는 것인데, 하늘의 기운이 임하려면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야 된다, 그러므로 기뻐해야 될 일은 이 땅 위에서 너희가 하늘의 기운으로 일으키는 역사로 기뻐할 게 아니라, 기쁨의 출처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을 지금 기뻐하라는 얘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하늘을 기뻐해라, 지금 하늘과 맞닿아있을 수 있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그 하늘이 땅에 살고 있는 너희 마음에 기쁨과 행복의 제1 원인이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영생의 문제와 연관 지어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에서 초점은 사실 강도 만난 자에게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사람처럼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구제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에게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율법사 자기 자신은 자기가 멀쩡한 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강도 만난 자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빼앗겼느냐?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지금 연결되어서 내 마음에 기쁨과 행복감의 근원이 되어야 되는 그 천국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천국을 빼앗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면 강도 만난 자의 비유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통해서 들려줍니다.
그 다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로 강도 만나서 살고 있는 사람의 형편이 어떤 것인가? 마르다와 같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을 즐겨 하는 마리아를 향하여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좋은 편을 택했으니 그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강도 만난 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빼앗긴 자입니다.
무엇을 빼앗겼습니까?
주님과의 만남을 빼앗깁니다.
이것은 부활이후의 시점으로 가서 생각하면 천국을 빼앗긴 겁니다, 주님이 승천해 계신 그 천국을 빼앗기는 겁니다.
‘그 천국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는 지금 빼앗긴 상태입니다.
왜 빼앗겼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일에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여 빼앗겼다’
마음이 이 땅 위에 있는 일들에 흐트러져 버렸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지금 연결되어야 되는 천국을 빼앗겨버린 상태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의 마음속에 있는 말씀의 역할이 드러나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마르다의 상태를 일깨워줍니다, 각성시켜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처럼 말씀을 들을 때, 마르다처럼 천국을 빼앗겨서 살고 있는 상태가 일깨워진다는 얘깁니다.
그 다음에 기도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일깨워준다는 얘깁니까?마르다가 많은 일에 마음을 다 빼앗겼습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마음이 다 흐트러져서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천국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드라마폐인이라는 말을 동원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드라마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드라마에 빠져버리게 되면 실제로 내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보다도 드라마를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는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실제 삶의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될 경우, 이걸 드라마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이 실제고 더 우선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2차적인 현실인 이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삶의 일들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이게 지구폐인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열심히 날마다 열정적으로 뛰면서 이 지구 위에서 이루겠다고 살아가는데 사실은 이게 지구폐인의 상태라는 겁니다.
이 지구폐인의 상태 바깥에, 드라마 바깥에 진짜 삶이 있는 것처럼,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 삶의 형편 바깥에 진짜 현실이 있고 진짜 행복의 근원이 있고 진짜 기쁨의 원인이 있는데, 이걸 모르고 지구폐인이 된 상태로,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고 지구에서 내게 주어지고 있는 상황이 다인 줄 알고 거기서 헐떡거리며 살고 있을 때, 말씀이 주어지면서 각성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아,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열정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겠다고 발버둥 치면서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2차 현실일 뿐이고, 내가 이렇게 마음을 쏟을 대상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각성시켜주는 게 바로 마리아가 발치에 앉아서 즐겨 듣던 그 말씀이라는 얘깁니다.
예를 들면 그런 거죠.
모든 지구폐인이 된 사람들, 우린 그걸 자연인이라고 부릅니다, 불신앙인들이 다 자연인이지요, 그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서 전력질주하고 있습니다.
근데 말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돈을 벌지 않고 산다!’ 이 말을 딱 해버립니다.
이 말씀이 들어가는 자는 각성이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지금 돈을 벌면서 살고 있었구나! 지구폐인이 되어 있었구나! 돈 버는 일이 나의 우선적인 과제라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각성하게 되는 겁니다.
머릿속에 다 알고 있어도 각성이 되지 않는 것은 점점 더 지구의 일에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은 말씀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워주시는 사건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는 현장 속에서 일깨움을 받는 것과, 내가 알고 있다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일깨워지면서 우리는 우리가 폐인이 되면서 빨려들어 가버렸던 지구 바깥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되는 현실이,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는 그 나라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제부터 말씀에 의해서 각성된 사람이, 그 말씀에 의해 각성되고 말씀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내 마음이 가기 위해서 취하는 액션이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우리는 각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이 이 현실에 묶여있습니다.
이 세상의 상황이 더 앞선 현실로 더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보다 더 압도적인 현실로, 더 우선적이고 더 절대적인 현실로 내게 느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밖에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내가 지구 위에서 이루고 싶은 어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를 내 마음이 떠나서 아버지의 나라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한 탈출의 프로젝트가 바로 기도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누가가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기도의 가르침.
여러분, 저희 어머니가 여든 셋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형님 댁에 같이 계시는데, 저도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어머니도 제게 자주 전화를 하십니다.
제가 하는 제로원복음방송의 설교말씀을 듣고 계세요.
들으시면서, ‘애쓴다, 고생한다, 요즘 교회가 흘러가는 그런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설교하고 있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네 모습이 참 좋다’고 말씀하시면서, 언제나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 좋은데 설교시간마다 기도를 강조해라’ ‘설교시간마다 기도를 강조해야지 사람들은 기도하라고 강조하지 않으면 기도를 안 한다, 그러니 기도하라고 반드시 설교시간마다 이야기를 해라!’
맨날 듣는데도 그게 안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니까 참 재밌어요.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던 모양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을 알고 예수님에게 간청을 합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저희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기도를 주님께서 제자들이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가르쳐주셨어야지요.
예수님 당신은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저도 기도를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이 갖고 오신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총은 기도할 때에 내 것이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침마다 전하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모든 은혜의 약속은 듣는 분들이 기도할 때라야 내 것이 됩니다.
그러면 저희 어머니 말씀대로 왜 매일 기도를 강조하지 않습니까?
또, 주님도 당신께서는 이렇게 늘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잠잘 때 몰래 일어나서 새벽미명에 이슬 맞으면서 기도하시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까지 왜 기도를 가르쳐주지 않고 계셨느냐?
기도라는 것은 하라, 하라고 가르쳐서 될 일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물론 강조함으로써 일깨워주므로 어느 정도까지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각성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근본적으로 기도라는 것은 마치 이것과도 같은 것이에요.
소개를 시켜주었더니 두 젊은 남녀가 아주 좋아죽고 못 삽니다.
그 사람들에게 ‘데이트해라, 데이트해라!’ 하는 권면과 똑같은 것이에요.
필요가 없습니다, 말 하지 않아도 회사 근무 때문에 애인을 못 만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고, 결혼 안 해서 각자 떨어져서 잠을 자야 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이들이 스물 네 시간 원하는 게 데이트입니다.
만나서 같이 있는 거예요.
기도라는 게 바로 하나님과의 데이트입니다.
이것은 권면해서 될 일이 아닌 거라서 그냥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되어지고, 이 지구 바깥에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계시 받은 자, 주님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그 말씀을 듣고 내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지구 바깥에 세상이 있고, 지구 바깥에 천국이 있고, 그 천국에 내 아버지가 계시고 승천하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각성된 자라면 기도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쪽으로 가고 싶어서, 이 지구에 묶여있는 마음, 지구폐인의 상태로부터 탈출해서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을 수가 없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자가 해야 될 중요한 포인트는 기도를 하라고 강조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기도를 하라고 그러니까 기껏 뭐하는가 하면, 지구폐인이 된 상태에서 전부들 이 지구 위에서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겠다고 기도하는 거예요.
내일 다룰 주기도문 다음에 나오는 간청하는 기도도 전부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사업 잘 되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하면 들어주신다, 이렇게 이해해버리고 맙니다.
그게 아니고 설교하는 자의 포인트는 기도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이 지구를 탈출해서 내가 가야될 목표를 계시하면 그 목표지점,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는 그 천국에 지금 내가 갈 수 있다고 설득시키고, 그곳을 가고 싶어 하게끔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갈 수 있는 방법은 기도밖에는 없는 거니까, 기도밖에는.
기도를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은 데이트하고 싶어서 미치겠는 두 남녀에게 데이트하라고 권면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하늘을 드러내주는 것이고, 지금 내가 지구에 폐인이 되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각성시켜주는 것이고, 그러면 그 말씀으로 각성되어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이 지구의 상황을 탈출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탈출기도(企圖)가 기도(祈禱)입니다.
탈출 프로젝트를 마음에 먹게 하려면, 지금 내가 지구폐인이 되어있는 상태, 지구의 일에 너무 몰두되어 있어서 마치 지구가 제1현실이요, 절대적인 현실로 생각하고 살고 있지마는 지구의 현실은 제2, 제3의 부차적인 현실이고, 절대적인 현실은 지구에 접해 있는 하늘나라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라는 걸 각성시켜 주고, 각성된 상태에서 그곳으로 가기 위하여 지구를 탈출하려는 시도가 바로 진정한 기도라는 것을 말하려고, 누가가 이 지점에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구폐인의 상태로부터 말씀에 의해 각성되어서, 지구 바깥에 접해있는 천국과 그곳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탈출하는 프로젝트로서의 기도를 날마다 드림으로써 그 하늘을 갖고, 하늘로부터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