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에 운수암이 있다.
조선시대인 1750년(영조 26)에 장씨 부인이 창건하였다고하는 운수암.
일설에는 청상과부가 부처를 모시려고 무양산성 밖에 터를 닦았는데, 꿈에 노승이
나타나 성 안에 절을 지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서 쓰러진 풀과 나무를
치우고 보니 절터로 적합하여 이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절.
이 절터에는 난을 잘치었으며, 글씨를 잘썻고, 풍수지리에 밝은
흥선 대원군이 시주하여 중건된 요사채가 있다,
현재 요사채에 걸린 현판은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이 운수암이라고 쓴
친필을 하사하였다고하는 글씨이며,
그 자신이 1년 정도 머물렀다고 하는 절이 운수암다.
언젠가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에서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는
잘 알지도 못 할 뿐더러 선입관을 가지고 보아서 그런지 별로 였었다.
그러나 이번에 구름 머무는 운수암에서는 달리보였다
옛 건물에는 흰바탕에 파란글씨로 쓴 "雲水庵"현판이 걸려있다.
현판 우측 상부에 수인 1과와
좌측에 “석파(石坡)”, “대원군장(大院君章)”이라는 도서 2과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며 예서를 미화하여 쓴 담백한 대원군의 글씨다.
그가 대원군으로서 행하였던 행적에 대한 일들은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 나 자신도 혼란스럽지만.....
글씨는 좋아 보여서 여러 방법으로 찍어 보며 한참을 머물렀다.
운수암 글씨
운
수
암
수인
낙관 2 과
석파 & 대원군장
<<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
석파 이하응(1820-1898)은 영조대왕의 현손으로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아버지이다. 그는 1843년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여러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감시 당하며 늘 움츠린 생활을 하였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익종비 조대비의 후원으로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세우고 섭정을 하였지만 서원철폐, 원납전 징수 등의 실정으로 인해 1873년 하야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울 화계사의 만인으로부터 충남 예산 가야사의 터가 “왕손이 나올 곳”이라는 말을 듣고 절을 불태워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썼는데, 훗날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왕위에 오르자 그 보답의 뜻으로 가야사와 가까운 곳에 보덕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쇄국정책으로 조선에 기회 손실을 입혀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되는시발점이 되기도 한다.즉 1866년(고종 3)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나, 조세개혁을 통한 양반들의
기득권을 줄여서 공평과세를 하기도 하였으며, 난을 잘치는 그의 재주와 글씨에 대한 수준은 현재에도 여러 사람들이 알아주고 있다.
그는 서울 화계사 <명부전>·<화계사>, 서울 흥천사 <흥천사>(해서, 예서)·<옥정루>·<서선실>, 남양주 흥국사 <흥국사>·<영산전>, 양산 통도사 <통도사>·<영축산통사>·<금강계단>·<대방광전>·<원통방>, 예천 보문사 <극락보전>, 안성<운수암> 편액 등 많은 사찰들에 그의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첫댓글 흥선대원군의 예서체 일품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