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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예수님=0>의 줄거리:
마음 빼기 예수님은 영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는 공식입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뺐는데도 여전히 마음에 이것 저것이 남이 있다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는 예수님이 전부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가져다 주는 은총과 선물은 실제로 맛조차 볼 수가 없게됩니다. 이 마음을 마리아를 통해 살펴 봅니다.
마음-예수님=0
(요12:1~1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마음-예수님=0>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예수님=0’
마음 빼기 예수님은 0이다.
여러분, 버스 정류장이나 기차, 전철역 같은 데서 혹시 그런 팸플릿을 보신 적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마음 수련이라는 제목의 브로슈어라고 해야 하나, 그 마음수련이라고 하는 것이 요즘 꽤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내용 같아요.
마음수련이라는 제목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이루고 있는 모양인데, 그야말로 마음을 수련하는 곳인가 봅니다.
근데 거기서 표방하고 있는 말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마음 빼기입니다, 마음 빼기.
마음을 바로 알자, 그래서 잘못된 허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마음에서부터 그 모든 사진 찍듯이 내 마음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집착, 과거에 대한 기억, 과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의 틀과 같은, 그런 것들을 다 빼어 내면 마음이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게 되는데, 우주의 마음처럼 우주를 포함할 수도 있는 넓은 마음이 돼서 행복해 질 수 있다.
뭐 이런 내용의 취지를 가지고 마음수련을 하는 그런 단체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 빼기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마음 빼기를 한번 해 봅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한번 빼 봅니다.
그래서 마음에 남는 것이 0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뺏는데도 내 가정이 남아 있습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뺏는데도,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믿음은 아닙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빼봤는데, 해결해야 될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빼 버리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다 빼버리고 나면, 마음에 하나도 남는 게 없는 상태가 되어야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상태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공식입니다.
마음-예수님=0
마음 빼기 예수님은 0이다, 0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고용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주님이 되어 있고, 내 삶에 주님이 들어있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무나 유명한 기름부음의 사건이 나옵니다.
유월절 8일전에 예수님께서 멀리 광야에 가서 쉬고 계시다가, 다시 예루살렘 근처 가까이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로 찾아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게 돼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한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그 잔치자리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게 됩니다.
근데 이게 문제가 되었어요.
왜 문제가 됐느냐 하면 향유가 너무 비싸고 너무 낭비였다는 겁니다.
300 데나리온에 팔 수 있는 향유입니다.
마태에도 나오고 마가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도 향유를 부은 사건이 나오지마는,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얘기하고 있고, 누가복음에 나온 얘기는, 전혀 별개의 기름부음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300데나리온이 넘는다고 얘기를 해요.
데나리온으로 말하면, 1데나리온이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품삯을 십만 원씩 만 쳐도 삼천 만원입니다.
주일을 빼고, 일 년 내내 노동자가 하루에 십만 원씩 일당을 받으면서 일한 연봉입니다.
그리고 한 근 이라 그러는데, ‘순전한 나드 한 근’은, 우리식의 도량형으로 환산을 해 보면, 한 340g 정도 됩니다.
기름이라서 물과 밀도가 다르지마는, 거의 비슷하다고 여겨서 ml로 환산을 해 보면, 콜라 캔 한 캔 정도 되는 거예,. 350ml 정도 되니까.
그걸 다 부었다는 얘기에요.
삼천 만원어치 나드, 나드라는 거는 동인도에서만 나오는 향유로서, 전량 수입으로만 가능한 그런 것인데, 콜라 한 캔 정도 분량의 나드 향유를, 그걸 한 번에 일시에 다 부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가 분개합니다.
‘어떻게 그걸 허비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사도 요한이 주석을 달아요, 이 당시에는 몰랐을 겁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그 당시는 유다가 그런 사람인줄 몰랐을 텐데, 돈궤를 맡고 있는 회계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돈을 훔쳐가고 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 거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훔쳐갈 돈궤에 들어올 돈이 없어진 걸 보고 분개한 겁니다.
속마음은 이렇지만 겉으로 드러내서 한 말, 그 말에는 타당성이 있어요.
‘왜 그걸 허비하느냐? 삼천 만원어치 향유를 한 번에 부어서 다 없애버리다니’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냐 하면 여러분, 제가 일부러 어제 말씀을 준비하면서 찾아봤어요.
샤넬 No.5 향수 있지 않습니까? 그 향수의 값이 얼마가 되는지 한번 찾아봤어요, 인터넷으로.
그랬더니 100ml 의 샤넬 No.5 향수가 얼마냐 하면 249,000원 합니다.
뭐 곳곳마다 값이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한 250,000 원 합니다.
200ml가 되면 400,000원이 훨씬 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한 근이라고 성경에 나온 이 분량대로 350ml 정도 되려고 하면 한 800,000원 이상 되는 돈을 줘야 샤넬 No.5를 사게 됩니다.
샤넬 No.5를 200ml를 400,000원 주고 샀다 그러면, 얼마나 쓸까요?
한 번씩 쭉- 쭉- 쭉-, 한 번에 쓸 때 한 세 네 번 뿌린다 그러면 1년 2년은 쓸 겁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아주 비싸고 고급스러운 스킨로션을 선물 받아 가지고, 그 스킨로션을 쓰는 걸 제가 본적이 있습니다.
뚜껑을 열고 로션을 붓는 구멍이 있지 않습니까? 근데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 가지고, 확 뒤집어서 손가락에 찍어서 바르는 거예요.
몇 번 손가락에 찍어서 발라요. 붓지 못합니다, 비싼 스킨로션이라서.
아~ 냄새가 좋더라고요.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다 그래요.
좋은 스킨이나 향수 뿌리고 엘리베이터 탄 사람이 있으면,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라, 아파트 입구 전체가 다 그 냄새로 가득 차는데, 콜라 한 캔 정도의 향유를 다 부었습니다.
여러분 겨울철에 몸이 건조해지니까 샤워하고 나서 혹시 몸에다가 오일 발라보셨습니까?
샤워 때마다 오일을 바른다 그래도, 300ml짜리 바디오일을 하나 사면은 1년 넘게 씁니다.
정~ 필요하면 손에 그 순전한 나드를 조금 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어도 될 일입니다.
왜 다 부어버립니까?
제 정신이 아닌 거지요, 삼천만원어치의 향유를.
샤넬 No.5 300ml를 깨 가지고 다 부어도 난리가 날 텐데, 삼천만원어치의 나드를 다 부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불평을 했다 그러고, 이 마리아를 나무랐다 그러고, 마가에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가롯 유다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마리아가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문제는, 그렇게 난리를 치고 야단을 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7절에 뭐라 그러시냐 하면 ‘놔둬라 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간직해두었던 것이다’
여기 번역이 좀 잘못됐어요, 번역을 제가 제대로 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라’ 끊고 ‘그 향유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해 두고 있었다’ 과거형으로 나오게 됩니다.
원래 원어대로 제대로 번역을 하면 ‘간직하게 하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옹호해 주십니다.
장례할 날을 위해 준비했던 것이라는 얘기에요.
자! 마리아로서는 장례를 모릅니다.
아직 십자가가 일어날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마리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기에 장례할 날,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정확하게 맞이하는 그런 마음가짐이겠냐 이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 바로 마리아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이 마리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자! 순전한 나드 340g은 놔두고 있다가 어떨 때 쓰느냐?
향유도 층이 여러 층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가장 비싼 거예요.
전량 수입해서 쓰는 가장 비싼 향유인데, 어떨 때 이걸 씁니까?
가장 귀하다고 생각되는 손님이 자기 집에 방문했을 때, 그 당시 유대사회의 풍습을 따라서, 조금 부어서 발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드려서, 그 주빈이 되시는 그 귀하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그 분께로부터 온 집안에 향유냄새가 퍼져 나가도록 해 주는 것이 이 유대사회의 풍습이고 예의이고 존경의 표시입니다.
조금씩 내어서 쓰면 되는 거예요.
또 이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가 이 나드를 쓴다고 하는 것은 여자로서 가장 깊은 마음의 사랑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때그때마다 VIP에 대해서 그렇게 쓰면 되는 거예요.
근데 다 부어버렸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 다시 내 인생에는, 이 나드를 쓰면서 내 마음의 사랑과 존경을 표현할 대상은 없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선언을 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말고는 내가 이제 이 나드를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날 거라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 앞으로도 만나게 될 이 예수님에 대한 자기의 마음가짐을 확 깨서 공표를 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 말고는 없습니다, 더 이상 나드 향유를 발라드리면서, 내 마음의 사랑과 존경을 표현할 내 마음의 관심을 차지할 대상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공표해 버린 겁니다.
이게 바로 나드 350g을 한꺼번에, 삼천만원어치의 향유를 다 퍼 부어버리는 마리아의 마음의 상태였어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1억을 드릴 수도 있고 10억을 드릴 수도 있었을 것이에요.
그런데 마리아의 처지에서 삼천만원어치의 향유를 다 부어버렸다는 것은, 10억을 현찰로 예수님께 드린 것과 질이 다른 겁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10억을 드린 것은, 더 많은 돈을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 10억 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마리아의 이 향유부음의 사건은, 더 이상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과 관심의 대상으로서,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공표한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이 마리아의 마음의 상태에서 예수님을 빼 봅니다.
마리아의 상태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빼고 난 나머지의 마음상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제로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어야 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건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이 마리아의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얘기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왜 이렇게 받아들여야만 됩니까?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눈바 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 시킨다고 결의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를 알고 있는, 천국이 지금도 살아서 첫 번째 현실로서 마음에서 움직이고 있는 예수님에게는, 이들의 추방의도가 탈출사건으로 전환되어 버립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했던 것처럼, 십자가 사건은 출 세상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내 마음이 연합한다는 것은, 그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출 세상의 각오를 가지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렇게 출 세상 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일 때,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붙잡고 있는 부분들이 있으면, 결코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할 수가 없고, 출 세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합니까? 분명히 아세요.
출 세상 하려고 연합합니다.
천국으로 내 마음이 가려고 하는 겁니다, 아버지께로 가려고 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왜 죄 사함의 사건이 주님의 보혈에 의해서 일어나야 됩니까?
아버지께로 가야 되기 때문에 깨끗해져야 됩니다.
출 세상의 사건이라는 거예요.
출 세상해서 아버지께로 갈 때, 복음이 약속된 모든 은총과 모든 복락이 실제 내 것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가끔 탈옥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보게 됩니다.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감옥에서 자기가 머물고 있던 감옥의 그 상태를, 평상시 그대~로 쓰던 물건, 예를 들어 감옥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죄수였다 그러면, 그림을 그리던 스케치북과 붓과 이런 것들을 그대로 나둡니다.
그래야 간수가 방을 체크할 때에 비어 있어도, 그러니까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도 시키고 그러잖아요, 죄수들을.
그런 시간을 이용해서 도망갈 때, 늦게 알아차리게 되니까 그대로 나두고 떠납니다.
몸만 떠납니다, 탈옥을 할 때.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런 문제 있고 저런 문제 있습니다.
자식문제, 건강문제, 돈 문제, 내 마음이 붙들려서 매어 있을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내 마음으로 모셔 들여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출 세상 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다 나두고, 그대로 나두고 떠나는 거예요.
내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바꿔놓고, 내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개선시켜 놓고, 내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돌파구를 만들어 놓고.
이런 거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그대로, 문제가 주어져 있는 그 상태 그대로 나두고, 출 세상 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으면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신기하게도 이 세상을 출 세상 해 버리는 겁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빼어버리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야 출 세상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아직도 이 문제에 매어 있고, 저 문제에 매어 있고, 이 사람 좋아서, 저거 좋아서, 이룰 꿈이 있어서.
이 세상에 매어 있어 갖고는, 예수님 빼고도 마음에 남는 것이 여전히 있어 갖고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을 수도 없고, 연합할 수도 없고, 출세상이 불가능해 집니다.
하나님 나라로 마음이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리아가 향유를 다 부어버립니다, 삼천 만원어치를 다 부어버립니다.
콜라 캔 하나만큼의 양을 다 부어버립니다.
다시는 내 마음의 관심의 대상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을 해 버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그 모습에 가장 합당한 마음가짐이라고 주님께서 도장을 찍어버리십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 마음에서 예수님 빼서 제로가 되는 그런 마음이 될 때에, 그래서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출 세상을 해 버릴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삶의 현장으로 와 닿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닿는 곳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능력과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삶의 문제들을 다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탈옥하는 죄수들이 그냥 평소에 자기의 탈옥, 그 수감생활을 하고 있던 감옥 방 안에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몸만 빠져 나가듯이, 그대로 다 나두고 마음만 주님과 함께 빠져 나가는 겁니다.
어떻게 마음이 예수님을 빼면 제로 상태가 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죽게 해 주세요,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죽은 자 입니다, 2000년 전에 주님께서 죽으실 때에 나는 오늘 2000년 뒤에 만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죽은 겁니다, 이 사실에 대해 죽은 겁니다.’
큰 문제에서부터 작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 십자가를 통하여 죽어서, 예수님 빼고 나면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될 때, 우리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편에 계신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감각을 통하여 하늘나라를 느끼며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고, 이 세상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제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날마다 이 마음에서 예수님 빼보는 공식을 반복함으로써 내 마음을 살펴보게 하시고, 예수님을 뺏는데도 남는 모~든 사람, 모~든 문제, 모~든 사물에 대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하여 말끔히 지워버려서, 예수님과 함께 출 세상 하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