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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세계에 편입된 존재들의 숙명적 비애
-천양희, 장만호, 이수명, 김지녀, 남수우의 시
배옥주
1. 입구가 통로이며 출구인
인간은 사회의 구조적 폭력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과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단순한 삶을 살고 싶지만 치열한 경쟁 사회의 복잡한 삶 속으로 무참하게 던져진다. ‘샤를 와그너(Charles Wagner)’의 주장처럼 적자생존의 경쟁 사회에서 본질을 잃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요즘 같은 때 심플라이프와 미니멀리즘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하지만 단순한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공자孔子’가 말했듯, 현대인들은 복잡한 삶의 족쇄에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채우고 끌려다닌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불완전함을 자각할 때 자존감을 잃고 불안이 심화된다. 세계의 폭력에 내면화된 개인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힐 수 없을 때 이상 실현의 좌절로 삶의 목표를 상실한다. 이때 고통을 겪는 자아의 고뇌나 이상 징후에서 비애 의식이 표출된다. 우리는 입구가 출구이며 통로인 모순된 현실 앞에서 구체적인 삶의 지표를 설정하지 못한 채 세계의 바깥을 서성이며 숙명처럼 비애를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시에서 드러나는 비애 양상 또한 삶의 궤적과 수반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시적 주체가 외적인 현실 세계와 내면 정신세계의 교차점에 도사린 ‘불안’과 마주할 때 비애의 양상이 나타난다. ‘보들레르’는 현실 분열의 불안과 소외에 대한 비극적 세계관을 전개해나갔으며, “불안은 실로 나의 본질이다”라고 했던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실존적 불안과 삶의 비애로 열어갔다. 이처럼 불확실하고 소외된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한 심리는 작가들에게 내적 자아를 지배하는 아니마로 작용하여 시적 비애 의식을 발현한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편들에서 불안한 존재의 내면사유를 모색하는 비애의 정서는 어떻게 펼쳐질까.
2. 생, 그 한가운데
바람속의 영혼처럼
눈이 날린다
홀로 걷다 돌아보니
나홀로 청년들이 실업에 울고 있다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잠을 청한다 청해도 잠은 안 오고
짙어진 나뭇잎 속에
아슬하게 줄을 치는
거미를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저 줄에도
한 생이 걸려 있구나
나도 그것으로 한 생을 견뎠다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으면서
행복을 돌돌 말아
너에게 던져줄게
깨어진 뒤에야 완성되는 것
그 거룩을
한 줄로 써서 보내줄게
생의 한가운데는
움푹 패였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오늘도
어느 곳에선가
뜬구름 잡는 일이 일어나고
다리에 쥐가 난 사람들이 걸어가고
어느날
기러기가 V자를 그리며
낮달을 뚫고 날아간다
그래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생의 한가운데를 생각한다
아무튼
성자聖者는
시계를 가지지 않는다
- 천양희, 「생의 한가운데」(『애지』 2023년 봄)
위 시 「생의 한 가운데」는 생의 한가운데 서서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사람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 화자의 말처럼 이 세상은 한결 같은 마음들이 사라지는 디스토피아 같다.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의 여자 주인공 ‘니나’의 말처럼 인간이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 생은 끔찍해진다. 어쩌면 ‘생’은 기만과 환상에 둘러싸여 있을 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어둠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의 ‘카렌’이 춤추고 싶은 욕망 때문에 빨간 구두에 붙들린 자신의 발목을 잘라낸 후에야 참회하지만 결국 미치게 되는 것처럼. “뜬구름” 잡기에 빠져있거나 “다리에 쥐가 난 사람들”은 “깨어진 뒤에야 완성되”는 “거룩” 한 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뜬구름은 잡아도 빠져나갈 허상이며, 쥐가 난 다리로 걷는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다리를 버둥댈 뿐이다.
우리가 되뇌이는 ‘행복하다’라는 가치는 얼만큼의 액면가로 책정되어야 감당 가능한 걸까. 감히 행복할 자격을 잃은 실업 청년들은 거미줄에 위태롭게 걸린 아슬한 생을 견디며 “울고 있”다. “한결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지만 지금 현재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은 실업 청년들의 자존감과 용기를 잃게 할뿐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청년 57.5%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으며, 이들 중 경제적 여건으로 독립할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청년은 67.7%에 달한다. 취업전쟁에서 낙오한 청년들은 캥거루족이 될 수밖에 없는 불안한 현실에 등떠밀려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
화자는 “행복을 둘둘 말”아 움푹 패인 생의 한가운데 고립된 ‘나홀로 실업 청년’들에게 던져주겠다고 선언한다. 화자는 모두가 사라질 것을 염려하며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움푹 패인 “생의 한가운데를 생각”한다. 그때 시계를 가지지 않는 성자가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받드는 성자가 시계를 가지지 않는 것은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를 급하게 따라가지 않고 시간을 초월해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중심을 끌어나가기 위함이다. 시간의 흐름에 연연하며 다급하게 쫓아다니는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성자처럼 살기는 어렵다. 무심無心으로 살다 가신 법정스님의 무소유처럼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믿으면서 화자는 바람 속에 얼굴을 묻는다. 생의 한 가운데는 얼마나 깊고 공허하게 패어 있을까를 생각하며.
3. 안 그리고 밖
미꾸라지 두부숙회라는 걸 먹고 있다.
생각하면,
나는 늘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튈 자세를 취하는 초원의 가젤영양처럼
너 나은 미래를 향해 갑시다!
선반 위의 TV를 보다
이럴 때 읽었던 공상과학소설이 생각났다.
땅속 깊숙이 사는 지저인들은
벽을 물처럼 통과한다던,
제목도 기억 안 나는 그 소설에서
사람들은 지하로 끌려가다 온몸이 터져 죽었다.
키가 2센티미터 줄었다.
미래도 생각보다 단단할 수 있다. 진보가 더딘 까닭이다.
탄탄한 장래보다는
과거가 더 소프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는
자연인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파고든 산 속에서도 무단채취는 불법이다.
산 주인이거나, 산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나오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들어가는 것이 먼저인 세계가 있다.
출가라는 말이 그렇다. 형이 그랬다.
밖이 곧 안이 되었다.
친한 선배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늘 출구 쪽을 바라본다고 한다.
형, 그건 입구를 바라본 게 아니었을까요
야,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지
너무 슬퍼지지
생각하면
나는 늘 출구 쪽을 바라보았으나 제대로 빠져나간 적,
없는 것 같다
무기력이 점점 두부처럼 밀려, 들어왔을 뿐이다.
- 장만호, 「안과 밖」(『서정시학』 2022년 겨울)
위 시는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이 알레고리 기법으로 배열되어 있다. 화자는 미꾸라지 두부숙회를 먹으며 출구와 입구를 펼쳐놓는다. 미꾸라지 두부숙회는 살아 날뛰는 미꾸라지가 끓는 물을 피해 천천히 데워지는 두부 속으로 뛰어들면 서서히 뜨거워지는 두부 속에 갇혀 익어버리는 음식이다. 두부 속에는 유순한 얼굴의 두부에게 일격을 당한 미꾸라지의 최후가 고스란히 박혀 있다. 화자는 미꾸라지 두부숙회를 먹으며, 언제든 맹수를 피해 도망갈 자세를 취하는 ‘가젤영양’처럼 출구 쪽을 바라보던 자신을 떠올린다. 미꾸라지가 생각한 출구였던 두부는 결국 무기력하게 밀려들어온 완력의 입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가 열거한 다양한 주체들은 공상과학소설에 등장하는 땅속 깊숙이 사는 지저인, 산으로 파고든 자연인, 요양병원에 입원해있는 선배의 어머니다. 지하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몸이 터져 죽었고, 대자연의 품으로 파고든 자연인도 산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나무뿌리 하나라도 채취할 수 있으니 자연과 동화되는 진정한 자연인은 아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착한 선배의 어머니”가 늘 바라본다던 ‘출구’는 요양병원을 지키는 선배의 어머니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입구’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때 선배는 자신이 생각하는 ‘출구’를, 후배인 화자가 ‘입구’로 본다는 사실에 대해 어머니께 너무나 미안하며 슬퍼진다고 고백한다. ‘요양병원’이라는 장소는 바쁜 일상 속에서 부모를 맡기는 허울 좋은 출구다. 요양병원은 자식에게는 출구지만 갇히는 부모에게는 입구로 끝나는, 죽어서야 출구가 되는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화자는 나오는 것보다 들어가는 것이 먼저인 세계를 그려낸다. 출가한 형은 집과 세속의 인연에서 출가했지만, 형의 출가는 수행에 드는 것이므로 밖은 곧 안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출구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통로를 열어주지 않는 빗장 걸린 출구의 세계에 갇혀 숨 막히게 살고 있다. 이 시에는 끓는 물에 떠밀려 미꾸라지 스스로 두부에게 뛰어들었지만, 결국 두부에 갇혀 죽는 무기력한 현대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입구이자 출구인 생과 사의 통로 앞에서 요동치는 ‘미꾸라지’와 숙연히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두부’의 관계를 통해 안의 바깥에서, 밖의 안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규정하지 못한 채 서성이는 존재들의 숙명적 비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4. 구름 한 점의 자연분해
비가 짧게 내렸다. 비가 그친 후 넓은 구름이 왔다. 우리는 구름을 거의 보지 않았다. 보았을 수도 있다. 구름 전선은 발달하고 발달하고 발달을 멈추고 북상 중이었다. 구름은 수시로 바뀌었다. 구름의 모양이 흐트러질까 근심하는 동안 구름이 사라졌다.
상설 할인마트 앞에 한 노인의 조각상이 있었다. 뼈가 드러나 있는 상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조각상을 피해서 갔다. 나는 노인의 편을 들었다. 뼈가 점점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걷고 있었다. 짧은 비에 땅을 뚫고 올라온 지렁이들이 번들거렸다. 지렁이들은 비킬 줄 몰랐다. 헝클어진 지렁이들 사이를 통과하고 통과했다. 하루하루를 통과해서 하루하루의 투명한 비들이 깨어지고 우리는 걸어가면서 노인이었다. 구름 조각을 들고 서서 노인이 되었다. 구름을 놓쳤다. 노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뼈가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는 타지 않았다. 차량이 뜸해졌다. 무엇이 우리를 앞으로 떠밀고 있는지 우리는 오늘보다 앞서 있었다. 오늘은 자연분해 되고 있었다. 발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단추를 채운 것도 같았다. 어디까지 왔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도블록이 새로 깔린 곳까지 왔다. 뭘 생각하고 있니, 네가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구름 한 점에 대해서
- 이수명, 「오늘의 자연분해」(『릿터』 2023년 12-1월)
자연분해는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저절로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비와 구름과 구름 전선과 구름의 모양과 구름 조각이 자연적으로 흐르고 있다. 짧게 내린 비가 그친 후 넓은 구름이 왔으며, “구름 전선은 발달하”고, “발달을 멈추”고, 수시로 바뀌며 북상하다 사라진다. 상설 마트 앞에 있는 ‘노인의 조각상’은 “뼈가 드러나 있”고 사람들은 피해간다. 화자는 뼈가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노인의 편을 들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피해가는 마트 앞 ‘노인의 조각상’과 화자가 ‘놓친 구름’은 어느새 동일화되어 있다.
화자는 피골상접한 노인의 조각상이 바로 늙어가는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는 노인의 조각상처럼 ‘우리’는 비를 마중 나온 지렁이들을 지나 하루하루를 넘기거나 지우면서 노인이 되어 간다. 화자는 “구름조각을 들”고 노인이 되지만 “구름을 놓”치기도 한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늙어가는 노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자신 앞에 놓일 미래를 애써 외면하는 모습에서 비애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일들에 떠밀려 저절로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이 시간과 이별하며 조금씩 짧아지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언제나 반복됐듯 매년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은 새로운 보도블록으로 교체될 것이다. 구름도 오고 가고 발달하고 발달을 멈추고 순환을 되풀이 하듯, 노인이 되어가는 자연분해의 모습을 순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너’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었지만 화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자기 응시를 통해 “그냥 구름 한 점”의 자연분해가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5. 물속과 물밖
아이가 코를 막고 물속으로 얼굴을 넣는다
하나 둘
셋,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움직여
물 밖으로 나온 아이의 등뼈가 햇빛에 반짝이기도 하고
물속에서
끝까지 숨을 참다 나온 아이의 얼굴은
숨을 헐떡거리는 물고기처럼
울었다
웃는다
참을 수 있을 만큼을 뛰어넘는 사건들 속 주요인물로 지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아이는 다시 코를 막고
내게 숫자를 세라고 한다
하나 둘
셋,
물 밖에서 물을 휘젓다
나도 물속으로 얼굴을 집어넣는다
아이는 이전보다 오래 숨을 참을 줄 안다
- 김지녀, 「잠수 연습」(『신생』 2023년 봄)
매일 아침이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섬뜩하고 굵직한 사건들을 만난다. 우리는 언제든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범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살벌하고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다. 「잠수 연습」에서 화자는 아이가 물속으로 얼굴을 넣고 숨을 참는 모습을 바라본다. 잠수 중인 아이의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리고, 물속에서 숨을 참다 물 밖으로 나온 아이는 물고기 같은 모습으로 숨을 헐떡인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는 세상의 참혹한 사건들을 떠올리며 아이가 설 미래에 대해 두려워진다. 물 밖의 사회공동체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을 뛰어넘는 암울한 사건들이 날마다 발생하고 있으며, 언제든 아이들은 그 현장의 중심에 선 “주요 인물”의 가해자나 피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물 밖 세상에 던져질 아이의 앞날에 대해 염려하는 이 세상 엄마들 중 한 사람이다.
미래가 될 아이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선택받아야 하며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아이들이 성장해 홀로 서기에는 주어진 현실의 여건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제 아이는 숨 쉬기 힘든 물속의 불합리한 현실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사건들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모순투성이의 현실에서 발현되는 실존적 불안을 통해 삶의 비애를 경험하게 될 아이가 화자는 못내 걱정스럽다. 하지만 아이는 물 밖 세상과 대적하기 위한 잠수 연습을 통해 물속 세상에서 점점 더 오래 숨을 참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아이의 물속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해 화자도 아이와 함께 물속으로 얼굴을 집어넣고 아이가 바라보는 물속 세상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 아이가 삶의 지표를 단단하게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 부모와 함께 바로 서는 연습, 길게 숨을 참는 연습을 이어간다. 위 시에서는 조금씩 오래 숨을 참을 줄 알게 되는 내성을 키워가며 아이가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엄마의 진솔한 마음이 드러나 있다. 몰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은 모녀의 뒷모습이 눈부시다. 그녀들을 위해 숫자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에서 한 숨 두 숨 더 길게 ‘넷 다섯......백’까지.
6. 녹아 사라지는 저녁
녹아 사라질 걸 알면서도 우리는 눈을 뭉쳤다 잠긴 문을 부러 흔들어 보기를 관두고 몰두할 일을 찾아 나선 겨울이었다 내가 꺾어 온 겨울 나뭇가지들로 너는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 이야기를 읽었다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약속의 나무를 찾아 내내 숲을 헤매던 2월은 잠긴 문을 흔들어 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키 큰 나무들이 가리키는 사방팔방을 쫓았다
올려다보면 빈 가지들로 깨진 유리 같은 저녁 네가 물어뜯던 손톱을 닮은 빛이 그곳에 걸려 있곤 했다 우리는 읽은 적 있다 마을의 시간에 비해 어린 신의 시간은 한없이 늘어져서 지구의 저녁을 들여다보는 뚜껑을 여닫는 데만 보름과 보름이 걸린다는 이야기
어린 신이 사는 나라의 빛 아래를 지나고 또 지났다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돌아간다고 했는데 철거 현장에 쌓인 나무 파편들은 더 이상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이 아니게 되었다 인부의 시간은 마을의 시간보다 언제나 앞이었다
이름 모를 거대한 중장비들을 지나 우리는 무너진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뭉쳐 둔 눈을 찾아 뒤적거리며 빈손이 되어가고 있었다 부서진 울타리 너머로 다음 숲이 보였다
우리는 너머로 갔다 빈 가지들을 지날 때마다 머리 위에서 얼음을 깨문 빛이 쏟아져 내렸다 철제문 흔드는 소리와 웃음 맞은편 도로가에선 우리가 눈을 뭉치고 있었다 녹아 사라지는 줄 모르고 빛 아래 흩어진 저녁 중 하나라고 네가 말했다
- 남수우, 「저녁과 후렴」(『애지』 2023년 봄)
후렴은 가사와 곡조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절이다. 「저녁과 후렴」에서는 녹아사라질 줄 뻔히 알면서도 부질없이 눈을 뭉치는 행위가 반복된다. 왜 녹아 사라질 눈을 계속 뭉치고 있는 것인가. 어차피 빈손이 될 것은 자명한데 화자는 눈을 뭉치고, 뭉쳐둔 눈을 찾아 뒤적거리고, 다시 눈을 뭉친다. 녹아 사라지기 전까지는 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후렴처럼 눈을 뭉치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어린 신이 사는 나라”에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을 만들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형상화되어 있다. 어차피 문은 잠겨 있다. 열리지 않을 문이므로 “부러 흔들어 보”는 일을 관두고 다른 몰두할 일을 찾아 나선 겨울. ‘우리’는 당연히 녹아 사라지는 줄 알고 있는 눈을 뭉친다. 눈을 뭉치고 나서 꺾어온 나뭇가지들로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을 짓지만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 이야기처럼 “약속의 나무”는 “사방팔방을 쫓”아 헤매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깨진 유리 같”은 차갑고 날카로운 저녁에는 “네가 물어뜯던 손톱을 닮은 빛이 걸”려 있곤 했다. 손톱을 물어뜯는 ‘너’는 무엇이 그토록 불안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신의 시간”은 한없이 늘어진다. 그런데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은 철거되어 나무 파편으로 쌓여 있으니 나무 집은 녹아서 사라지는 눈처럼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철거 현장의 인부들은 늘 마을의 시간보다 앞서 집을 철거한다. 거대한 중장비를 지나면 부서진 울타리 너머로 숲이 보이고 뭉쳐진 눈을 찾아 뒤적이는 ‘우리’는 빈손이 되어간다. 철제문은 흔들어 봐도 아직 잠겨 있다. 이미 철거된 현장의 집과 울타리와 그늘은 다 무너져 있으니 열릴 리가 없다.
빈 가지와 빈손과 빈터의 맞은편 도로가에서 ‘우리’는 녹아 사라지는 줄 모르고 또 눈을 뭉친다. 뭉쳐진 그 눈을 보고 ‘너’는 “빛 아래 흩어진 저녁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맞는 저녁은 결국은 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존재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양들이 사는 나무 집’과 ‘내’가 꺾어 온 나뭇가지로 지은 ‘양들이 찾아오는 나무 집’은 어차피 들어갈 수 없는 환상 속의 집이듯. 이야기 속의 나무 집이나 철거된 나무 집은 아무리 뭉쳐도 녹아 사라지고 말 환상과 같다. 이 두 집은 상상적 동일시로 현실의 암울함을 대변해 보여준다. 눈이 녹기 전과 눈이 녹은 후의 경계에서 안주할 수 없는 저녁이 빛 아래 흩어지고 있다. 금세 녹아 사라질 미래처럼.
7. 숙명적 비애
우리는 입구와 출구의 경계에서 현실의 불합리성을 지각하며 살아간다.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경계에서 상실이나 좌절의 고통을 경험할 때 비애 의식에 젖게 된다. 시에서는 부정적 현실과 자유로운 시정신의 대립을 통해 냉소와 조롱의 감정이 등장하거나, 자신을 타자화하는 불확정성의 언어를 지향하기도 한다.
상실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생의 한 가운데 고립된 실업 청년들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거미줄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고단한 생을 견디고 있다(「생의 한 가운데」). 생과 죽음의 통로 앞에서 요동치는 ‘미꾸라지’와 끓는 물에 담겨진 상황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두부’는 안과 밖의 경계를 규정하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에서 서성이는 존재들의 비애를 보여준다(「안과 밖」). 「오늘의 자연분해」에서는 오늘의 안과 밖에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자연 분해’라는 순리를 통해 순환을 되풀이하는 자연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잠수연습」에서는 아이와 엄마의 물놀이를 통해 불온한 시대적 상황에서 삶의 비애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엄마는 아이와 함께 물속에서 숨을 참는 잠수연습을 하며 아이가 더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단단하게 성장하기를 염원한다. 「저녁과 후렴」에서는 이야기 속의 나무 집이나 철거된 나무 집은 양들이 찾아와도 살 수 없는 나무 파편으로 쌓여간다. 화자가 꺾어 온 나뭇가지로 지은 ‘나무 집’은 아무리 뭉쳐도 녹아 사라지고 말 ‘눈’과 같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부재의 환상 공간을 보여준다. 이 두 집은 결국은 사라지고 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미래를 대변하고 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이 시대는 생과 사, 안과 밖, 무의식과 의식, 입구와 출구의 경계에서 휘청거리는 심리적 고립이 심화된다. 인간 소외를 부추기는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이 설 자리를 뺏어가고, 5차 산업혁명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앞세운 채 '인간 중심'이라는 키워드를 들썩인다. 그러나 우리는 복잡 다변화되는 미래에 반쪽의 몸만 걸친 채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다. 삶의 비애를 극복하기 위한 입구와 출구를 찾아.
약력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으로 시 등단
2022년 《애지》로 평론 등단
<부경대학교> 문학박사
시집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 공간』
평론집 『언어의 가면』
<요산창작지원금> 수혜, <김민부 문학상>, <두레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