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 1162~1229)은 고려에서 최초로 재상에 오른 전주최씨다. 문정공 이후 사도공계는 귀족이 되었다. 문정공도 『고려사』<열전 최보순전>이 있지만, 아버지 <최균 열전>에 첨부되어 소략(疏略)하다.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学) 박물관에 문정공 묘지석(墓誌石)이 있고, <묘지번역문>이 있으므로 함께 검토하기로 하겠다. 먼저 <열전 최보순전>을 살펴보면;
최보순은 도량과 학식이 크고 깊었다. 어려서[1]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업에 힘써 과거에 급제했다. 황주 장서기(7품)가 되어서는 다스리는데 청렴결백함을 숭상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소부감(정4품)이 되어서는 항상 왕의 제고[2]를 담당했다. 금나라 임금 즉위를 축하하는 표문[3]을 지었는데, “다섯 마리 말이 강을 건너는 것은 진나라에 새 임금이 태어났음을 드러냄이요[4], 여섯 마리 용이 하늘에 오르는 것은 『주역』에서 ‘대인을 본다.’는 말과 들어맞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금나라 임금 형제들이 임금 자리를 다투느라 서로 핍박함을 비유한 것이다. 금나라 중서성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제위에 오르신 것은, 진나라 왕조의 다섯 마리 말이 강을 건넜던 일에 비유할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런 문구를 사용했는가?”라고 꾸짖으니 최보순을 파면시켰다가 곧 다시 이부시랑(정4품) 우간의대부로 임명했다. 고종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부수상) 판이부사까지 올랐다가 죽으니 시호를 문정이라 했다. 일찍이 『명종실록』을 편찬했다. 아들은 최윤칭과 최윤개이며, 최윤칭은 봉어를 지냈다. {영인}
당시는 최씨무신정권 지배기로 문신은 실제 권력이 없었으며, 임금도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문정공 묘지석은 일본 도쿄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1229년(고종 16) 제작되었고 가로 1m, 세로 60.6cm다. 묘지석에 적힌 <최수상묘지(崔首相墓誌)>는 글자 크기 1.2cm 정도로 새겨져 있는데 지은이나 새긴이는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해석했었고, 허흥식(1984)과 김용선(2001)도 해석했다. 한림대출판부에서 2012년 1월 5일 발행한 『역주고려묘지명집성』에 수록된 김용선의 해석에서 중요 부분만 발췌해 살펴보겠다.
공의 성은 최씨고, 이름은 보순(甫淳)이며, 자는 청로(淸老)다. 전주최씨[5]다. 아버지 균(均)은 벼슬이 상서예부 낭중이다. 대정 14년 갑오(1174)에 동번[6] 20여 성이 제멋대로 날뛰자, 만사[7] 중에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왕명을 받들어 단기로 홀로 가서 화복(禍福)으로 설득하여 각기 귀순시켰다.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적에게 살해당했으니 슬프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로다. 우리 조정에서 공훈을 추록하여 사도[8]로 추봉했다.
사도는 3공(三公)의 하나로 생시(生時)에 역임한 사람은 없다. 사도로 추봉[9]되었기 때문에 사도공이라고 부른다.
명종이 재위하던 태정 22년 임인(1182)에 을제(아원)에 합격하자 이로 말미암아 천리마가 해를 쫓는 발굽을 내어 딛고 붕새가 하늘을 어루만지는 깃의 촉을 펴게 되었다. 정미년(1187)에 제안(황주)의 서기에 임명되니, 절의를 지키는 것이, 얼음보다 맑고 물보다 깨끗했다. 농사를 장려하여 우거진 풀숲을 불사르고 메마른 땅에 물을 대어 쓸모없는 땅 일천 리가 양전(良田)으로 바뀌었다. 첫해 가을에 곡식이 크게 익어 일만 호 백성들이 모두 풍족하게 되었으므로, 당시 출척사[10]가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청렴하고 공정한 수령이 백성을 편안하게 구휼하고, 이로운 것을 늘리고 해로운 것을 없앴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정에 알리자, 이 때문에 발탁되어 국학(國學)에 들어갔다.
황해도 황주에서 지방관으로 업적을 쌓아 중앙조정으로 올라온 것이다.
□□ 우승경(于承慶)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었는데, 한 번 보고는 크게 놀라서 “참으로 재상감입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바로 중서주의(中書注意)로 뛰어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감찰어사(종6품)에 임명되니, 산과 같이 꼿꼿이 서서 중심에 자리 잡고, 서리같이 맑게 세상 밖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종이 재위하던 승안 5년 경신(1200)에 비로소 봉지[11]에 들어가 좌우 정언과 사간을 두루 역임하고 기거사인(종5품)이 되었는데, 모두 지제고를 겸하였다.
지제고(知制誥)는 국왕의 명령문을 저술하는 직책으로 대개 학문이 뛰어난 신하가 겸직하였다.
임오년(1222) 겨울에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수문전 대학사에 임명되자, 덕을 여유롭게 베풀면서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다스리고, 넓고 후덕한 마음으로 임시로 합당하게 다스렸다. 갑신년(1224) 겨울에 수대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다가 수대부 감수국사 주국을 더했다.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는 정2품 벼슬로 부수상(副首相)이다. 수상(首相)인 문하시중이 종1품이므로 조선 시대 품계(品階)보다는 한 등급씩 낮다.
무자년(1228) 겨울에 삼한벽상 정(正) □□□□□□□이부사(吏部事)가 되고, □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그해 4월(夏初) 밤에 중서성에 숙직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었다. 임금이 놀라 상방의(上方醫)에게 명하여 만금(萬金)의 양약(良藥)으로 치료하게 하니, 잠시 뒤에 바로 나았다. 그러나 때때로 다시 발병하니, 곧 글(表)을 갖추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은 대신이 자리를 비우면 정사를 돌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어 간곡하게 타이르며 떠나지 말도록 만류하였다. 공은 할 수 없이 나와서 업무를 보았으나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12월(冬末)에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가 관리의 인사에 관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물러나 쉬다가, 이듬해 기축년(1229) 정월 2일 새벽에 시각을 묻고는 벽을 향해 누웠는데 잠을 자듯이 돌아가시니 향년 68세다.
공은 모두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두 번 헌대[12]에 들어가고, 네 번 간액[13]에 올랐으며, 한 번 납언[14]이 되었다. □□복야(정2품)가 되어 상(장관)으로 재임한 것이 10년이고, 2재[15]로 있었던 것이 6년이며, 총재(재상)가 된 것은 2년이었다. 이때 달단[16] 우가(于加)가 서북에서, 만노[17]가 동쪽에서, 일본이 남쪽에 있으면서 호랑이가 침 흘리듯 우리나라를 엿보았으나, 끝내 삼키지 못한 것은, 공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즉 음공(陰功)과 은덕(隱德)으로 삼한을 안정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부인은 용구현부인진씨(龍駒秦氏)로 합문지후 중기(仲基)의 딸이다. 아들이 둘인데, 장남(윤칭)은 내시 합문지후이고, 막내(윤개)는 국자박사 겸직한림원이다.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예부 원예랑 최씨에게 시집갔고, 두 명 역시 벼슬아치의 아내가 되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 도구를 갖추게 하고 부의를 더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책명[18]하고, 시호를 문정공(文定公)이라 하였다.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여 그해 2월 7일 백구산(白駒山) 기슭에 장사지내니 예법에 따른 것이다.
문정공이 높은 벼슬에 오른 것에 아버지 사도공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는 없겠으나, 사도공 역시 사후(死後)에 상서좌복야로 추증(追贈)되었으나 문정공이 정2품 평장사에 오름으로 인해 더 높은 사도로 추증되어 사도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정공이 1222년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르므로 인해 고려가 멸망하는 1392년까지 대략 180년간 사도공계 가문은 귀족으로 이어오게 되었다.
* 각주 ------------------
[1] 1162년 출생으로 13세 때(1174)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 制誥. 고위 관원을 임명할 때 그 사실을 기록하던 문서 양식.
[3] 表文.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 중국 황제에게 보내던 외교 문서.
[4] 진나라(晉)가 황자들 황위 쟁탈전(8왕의난)으로 멸망한 사실을 인용했다.
[5] 원문에는 流化府라 했으나 김용선은 유화부가 전주라고 주석하였다.
[6] 東藩. 동쪽 변방의 여러 고을.
[7] 萬死. 아무리 해도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없음.
[8] 司徒. 삼공(三公) 중 하나. 정1품.
[9] 追封. 죽은 후에 작위(爵位)를 받음.
[10] 黜陟使. 지방 관리의 치적을 살펴 평가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 안렴사.
[11] 鳳池. 중서문하성. 고려 조정의 최고 정치기구.
[12] 憲臺. 사헌부와 사간원. 언관으로 청요직(淸要職)이다.
[13] 諫掖. 언관(言官)의 직무.
[14] 納言.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백성의 뜻을 임금에게 상주하는 벼슬.
[15] 二宰. 두 번째 재상, 즉 부수상.
[16] 達旦. 몽골족의 한 부류. Tatar.
[17] 萬奴. 중국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浦鮮萬奴)
[18] 冊命. 책봉하는 임금의 명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