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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주해 - 위대한 예행연습 (Rehearsal)]
이 장례 행렬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닙니다. 애굽의 최고위 관료들과 거대한 군대(병거와 기병)가 이스라엘 12지파와 함께 애굽을 빠져나와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거침없이 진군하는 이 웅장한 행렬은, 400년 뒤 모세의 인도 아래 이루어질 **'출애굽(Exodus)의 거대한 예언적 예행연습'**입니다.
비록 시신(야곱)을 메고 가는 행렬이지만, 이것은 죽음의 행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이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라는 부활과 귀환의 신앙을 온 천하에 시위하는 거룩한 행진이었습니다.
II. 율법의 두려움에 갇힌 자들의 한계 (50:15-18)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자, 형들의 내면에 다시 공포가 밀려옵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제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창 50:15, 18, 개역개정)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신학적 통찰 - 은혜를 믿지 못하는 자의 비극]
요셉은 이미 17년 전(창 45장)에 형들을 완벽하게 용서하고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17년 동안 요셉이 베푼 최고의 호의와 풍요를 누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한 번도 참된 평안(샬롬)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내가 지은 죄의 크기(행위)'만 묵상하고, '요셉이 베푼 용서(은혜)'를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죽자마자 그들은 또다시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목숨을 구걸합니다. 십자가의 완벽한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행위로 구원을 구걸하려는 율법주의적 신앙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III. 창세기의 결론: 섭리의 승리와 참된 용서 (50:19-21)
형들의 불신앙적이고 찌질한 구걸 앞에, 요셉은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섭리 신학(Providence Theology)'을 선포합니다!
(창 50:19-21, 개역개정)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원어 깊이 읽기: 하샤브(꾀하다/바꾸다)]
당신들은... 하였으나 하나님은... 하셨나니 (Atem chashavtem... Elohim chashavah, אַתֶּם חֲשַׁבְתֶּם... אֱלֹהִים חֲשָׁבָהּ): 20절의 이 기가 막힌 대조는 히브리어 원어로 보아야 그 맛이 살아납니다! 두 번 다 똑같은 동사 **'하샤브(생각하다, 계획하다, 직조하다)'**가 쓰였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파멸시키려고 악을 **'계획(Chashab)'**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들의 그 악한 계획마저도 실과 바늘처럼 엮고 **'직조(Chashab)'**하셔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선(Good)'으로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끔찍한 악(인신매매, 배신, 십자가 처형)조차도,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단 1mm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정수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타하트 엘로힘)]
복수(심판)는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내가 심판의 칼을 쥐는 것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교만입니다. 요셉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자신은 형들의 자녀까지 먹이고 기르는 '사랑의 통로'로만 남았습니다. 참된 용서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영적 항복입니다.
IV. 소망의 관(입관): 빈손으로 기다리는 언약 (50:22-26)
요셉이 110세를 일기로 임종을 맞이합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과 전혀 다른 유언을 남깁니다.
(창 50:24-26, 개역개정)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원어 깊이 읽기: 파코드 이프코드(반드시 돌보시리니)]
돌보시고 (Pakod yiphkod, פָּקֹד יִפְקֹד): '권고하시리니, 찾아오시리니(God will surely visit you)'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구속적 개입(출애굽)을 예고하는 확신의 단어입니다.
[신학적 절정 - 왜 애굽에 관을 남겼는가?]
야곱은 죽자마자 시신을 가나안(막벨라 굴)으로 가져가라 했지만, 요셉은 자기 시신을 애굽에 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으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참혹한 노예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절망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라고 울부짖을 때마다, 그들은 애굽 한복판에 묻히지 않고 덩그러니 놓여 있는 **'요셉의 관(Coffin in Egypt)'**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관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400년 내내 외치는 무언의 설교자였습니다. "보아라! 애굽의 최고 권력자였던 나 요셉도 애굽의 흙이 되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실(Pakod) 것이다! 그때 내 뼈를 메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 * 창세기의 마지막 단어는 **'입관하였더라(in a coffin)'**라는 차가운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것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출애굽의 영광스러운 아침을 향한 가장 벅찬 기다림과 소망'**으로 웅장하게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설교 구성을 위한 제언: "내 인생의 해골을 메고 약속의 땅으로!"]
목사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권위로 이 창세기의 위대한 결론을 강해하실 때 **<인간의 악을 선으로 덮으시는 섭리와 소망의 관>**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흐름을 제안합니다.
서론: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자들 (15-18절)
십자가의 보혈로 완전한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고난이 올 때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벌 받나?" 하며 두려워하는 율법주의 신앙을 깨뜨리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본론 1: 인간은 악을 꾀하나, 하나님은 선을 직조하신다 (19-21절)
누군가가 나를 짓밟고 모함하여 인생이 망가진 것 같습니까? "당신들은 악을 계획(Chashab)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직조(Chashab)하셨다!" 이 요셉의 위대한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심장에 꽂혀야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그물망은 결코 찢어지지 않습니다!
본론 2: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당신은 사랑하라 (19, 21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정죄의 칼을 내려놓으십시오. 원수를 향한 복수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히려 나를 찌른 자의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통로'로 남을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요셉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절망의 애굽 한복판에 '소망의 관'을 남기라 (22-26절)
비록 오늘 내 현실이 애굽의 차가운 관(죽음과 노예 생활) 속에 갇힌 것 같아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Pakod)! 우리 인생의 뼈(절망의 흔적)를 메고 마침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천국)로 진군하게 될 그 출애굽의 영광스러운 아침을 바라보며, 창세기의 믿음을 오늘 우리 삶에 완성해 낼 것을 불을 토하듯 선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