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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주체들의 이론적 배경: 당시 미 연준과 후버 행정부, 그리고 이어진 루스벨트 행정부의 초기 관료들은 케인즈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전통적인 재정 건전성이나 금본위제적 사고에 갇혀 있었거나, 혹은 실무적인 필요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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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의 본래 입장 (초기): 사실 케인즈는 1930년 작 《화폐론(Treatise on Money)》 등에서 중앙은행이 장기 국채를 직접 사들여 금리를 낮추어야 한다는 유사한 아이디어를 피력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 연준이 당시 실행한 정책에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가 독자적으로 고안한 통화론적 주장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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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의 후기 입장 (대공황 심화 이후): 막상 대공황이 극도로 심화되자(유동성 함정 상황), 케인즈는 오히려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금리를 낮추는 통화정책 방식에 대해 "마치 굵은 벨트를 사서 허리에 두르는 것처럼 실효성이 없다(말에게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노릇)"며 강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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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1930년대 미국이 실행한 양적완화의 원형(1932년 국채 대량 매입 등)은 케인즈가 주창해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미 연준이 파국을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시행했던 독자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시장 개입이었습니다. 케인즈가 일관되게 주장한 처방은 통화 조절이 아니라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 지출(공공사업 확대)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유동성 공급 조치들은 케인즈의 철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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