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와 지금은 기술과 장비가 다르지만 한반도 운하계획 600년 전에도 있었다.
“하륜이 충청도 순성(蓴城)에 운하(渠)를 열고 못(池)을 파서 저수(潴水)하여 배(船)를 두어 전라도 조세(租稅)를 체운(遞運)할 것을 청하였다.
지형이 높고 낮음에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소선(小船)을 두고 둑(堤) 아래를 파서 조선(漕船)이 포구(浦口)에 닿으면 그 소선에다 옮겨 싣고 둑 아래에 이르러 다시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렇게 차례로 운반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도 조운(租運)할 수 있습니다.”
-태종실록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한반도에 운하를 건설하자는 좌정승 하륜(河崙)의 주장이다.
그 당시 조선의 중량감 있는 물류는 양곡과 소금이었다. 최근의 주장에 석탄과 시멘트가 등장하는 것과 흡사하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쌀은 남해안과 서해안 해로를 따라 강화도를 거쳐 한강에 진입하여 한양에 짐을 풀었다.
이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면 배가 뒤집혀 쌀과 선원을 잃었다. 특히 울돌목을 지나는 해로는 마의 구간이었다.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구상한 것이 하륜의 운하계획이다. 오늘날에 운위되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대운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라도와 충청도를 수로(水路)로 연결하자는 구상이다.
전라도 북단에 집하장을 만들고 경상도와 전라도 세곡을 육상을 통하여 모은 다음 선박을 이용하여 안면도로 빠져나오면 남해안과 서해안 남단을 통과하는 위험과 운송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복안이다.
운하를 이용하여 삼남의 세곡을 운송하자
지금처럼 불도저나 굴삭기도 없던 시절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공사계획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삽과 곡괭이로 산을 파고 굴을 뚫어 우마차로 실어내는 공법과 열악한 환경에서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운하공사는 대단한 도전이었고 모험이었다. 명나라의 운하 성공이 자극제가 되었지만 경제에 통달한 학자답게 철저한 경제논리였다.
중국의 운하는 BC 484년 춘추전국 시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경항운하를 들 수 있다.
1293년 제주강과 통해강의 운하가 개통되면서 해하, 장강, 전당강, 회하를 잇는 5대 수계가 연결되었다. 이것을 발판으로 명나라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한 고려말엽의 유학자다.
정도전과 함께 친명파에 속했으나 개국에는 공을 세우지 못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학문은 깊고 높았으나 정통 유학을 견지하는 정도전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견제 받았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기획한 인물이다. 조선조에서 이성계와 정도전, 세조와 한명회와 함께 태종하면 하륜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태종 등극 후 18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사람이며 조선 왕조의 경제적인 초석을 깔았던 인물이다. 특히 실물 경제에 밝았고 먼 앞날을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업적이 운하와 지폐사용이다.
태종 즉위 이듬해 사섬서(司贍署)를 두고 저화라는 지폐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사용하게 했다. 포전을 금지하는 통행법을 시행했으나 백성들은 지폐사용을 싫어했다.
그는 지폐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하며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현대의 화폐학이나 거시경제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단한 혜안이다.
하륜의 운하 계획을 보고받은 태종은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결론을 도출하라 명했다. 갑론을박 결론은 불가였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을 뚫어야 하는 난공사에 백성들의 민폐가 크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하륜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운하가 완공되었을 때 자손만대에 이로움을 줄 것이라는 경제론을 펼쳤다.
운하 건설을 위한 토목공사 전문가를 현장에 급파하다
태종은 공조판서 박자청을 현장에 급파하여 조사, 보고하라고 명했다. 박자청은 김효손을 대동하고 순제(蓴堤)를 방문했다. 왕명에 따라 조사단을 이끌고 현장을 답사한 박자청이 상세도를 그려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순제는 태안 서쪽의 산자락이다.
"사도포(沙渡浦)에서 대선(大船)에 무거운 짐을 싣고 정박(碇泊)하는 곳에 도착하려면 남쪽 방축(防築)에 이르기까지는 6천척이고, 남쪽 방축에서 제 2방축에 이르기까지는 1천 3백 92척이다. 제 2방축에서 제 3방축에 이르기까지는 1천 3백 척이고 제 3방축에서 제 4방축에 이르기까지는 1천 3백 척이다.
제 4방축에서 북쪽 방축의 낭떠러지에 이르기까지는 9백 척이고, 육지(陸地)까지는 2백 66척입니다. 북쪽 방축에서 돈의도(敦衣島)의 대선(大船)을 정박하여 세우는 곳에 이르기까지는 8,317척입니다."-태종실록
"제4방축에서 북쪽 방축의 석애(石崖)가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방축을 물린 것이 3백여 척인데 그 높이는 20척에 이르면 비록 석애(石崖)를 뚫지 않더라도 행선(行船)할 수 있습니다. 북쪽 방축에서 돈의도(敦衣島)의 대선(大船)을 정박하여 세우는 곳에 이르기까지는 평저선(平底船)으로써 보름과 그믐에 대조수(大潮水)에는 전재(轉載)할 수 있습니다.
대선(大船)이 실은 바를 평저선(平底船)으로 옮겨 싣는데, 남쪽 방축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전재(轉載)하기를 무릇 일곱 차례씩이나 한다면 그 폐단이 작지 않을 것이며, 또 북쪽 방축의 석애(石崖) 사이에는 가까스로 소선(小船) 1척만이 행선하는 까닭으로, 전라도의 조세(租稅)를 한 달 안에 조전(漕轉)하여 끝마치기가 어렵습니다."-태종실록
조정에서 공조판서 박자청의 보고서를 놓고 수차례 토론이 이어졌으나 결론은 불가였다.
“헛되이 민력(民力)만을 쓰게 될 것이다. 반드시 이용되지 못하여 조운(漕運)은 결국 불통(不通)할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이었다.
하륜은 순제 운하계획이 무산되자 용산강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마저 윤허되지 않았다.
이러한 하륜이 추동 사저에서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방원을 찾아 온 것이다. 하륜은 방원의 장인 민제의 친구다. 하륜은 방원 결혼식 때 먼발치에서 방원을 관찰했지만 방원으로서는 초면이다.
그 결혼식장에서 방원의 관상을 살피고 왕기가 서린다는 것을 직감했던 하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