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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의 어느날 서울시민문화회관에서 "장씨대종회"가 전국장씨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당시 서울에서 고교에 재학중이던 본인은 仁同張門 영주지역대표로 오신
先親의 길안내를 핑계로 참가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기억한다.
대종회장 : 장 기 영(인동) - 한국일보사주,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국제올림픽위원회회장,국회의원
부회장 : 장 영 순(인동) -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7,8,9,10대 국회의원
모든 한국의 장씨는 모두 태사공(太史公 諱 貞弼)의 자손이니 관향같은건 따지지말고 대동단결하여
타성의 본보기가 되어 민족중흥을 이루자 뭐 그런 내용이었으며 그후 안동에 소재한 삼태사묘에 회장
장기영을 위시하여 다수의 張門이 참배하였다. 물론 그당시 유신집권을 공고히 하기위하여 유난히
단결이 강조되고 있어 어떤 이견(異見)도 있을수 없었다. 그때 진로주조 장순용 종친께서 제공한 두꺼비
소주와 포도주 합2병이든 진로기념품을 기분좋게 들고 귀가한 기억이 새롭다.
"우리 단양장가는 안동보다는 인동계로 분류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형님집안이지요
송계선생(松溪先生 - 吏部侍郞金吾衛以翰林使 諱之賢을 말함 본인은 나중에 문헌을 찾아봐서 알게되었음)
이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諱之善 - 인동장족보에는 之가 빠져있음 이도 본인이 나중에 앎)의 형님이
되시니까요... " " 아.......예........."
본인이 해운회사에 근무할때다. 거래처 젊은직원 장0문이 나에게 한소리다
나름 선조또는 족보에 대하여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한 나는 갑자기 가슴이 후끈하고 그만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못하고 대충 얼버무려버렷다. 그리고 급히 귀가하여 중숙부(仲叔父 諱志孝)께서 물려주신
대한민국 장씨상계 계보도(大韓民國張氏上系系譜圖) 를 다시꺼내 읽게되었고 우리 . 張門이 40여 貫鄕을
쓰고 있다고 알려저 있는데 그책에만 20여 문중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각자의 조상의 덕을
칭송하고 또 행적을 미화하기에 바빴으며 어거지로 上系족보를 꿰어 맟추고 있어 한마디로 정말 재미잇는
책이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한국의 성씨" 또 "성씨의 고향"등 국내에서 출간된 몇권을 구입하여 본인
나름대로 "대한민국 장씨상계 계보도(大韓民國張氏上系系譜圖) (사진참조 ) 를 작성하여 보니 얼추 그림이
갖추어 졌으며 각 문중이 주장하는바가 아주 근거없음이 이니어서 앞에 장씨대종회등에서 결의한 사항이
일고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 대회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면서 갓쓴 어느 연로한
종친의 한마디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아니 그럼 조상을 바꾸란 말이냐?........."
그후 단양장문 그와는 아주 좋은관계를 유지 하였으며 본인이 "甲"이고 그가 "乙"인 처지였지만 이미 주눅이
들고 또 그의 당당한 행동이 부러웠던 나는 그뒤 한번도 "甲" 행세를 할수없었다.
따라서 본인은 우리의 가계나 타관향 장씨 조상의 행적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하는 우리 宗門을 위하여
지금까지 본인이 수집한 내용을 바탕으로 몇자 여기에 적어보는데 물론 많은 오류와 무지가 있을 수 있어
어디까지나 참고자료정도로 활용해 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1. 한국의 장씨는 중국으로부터 왔으며 태사공이 처음이다.
고려충열왕비(高麗忠烈王妃)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를 수행하여 고려국에 들어온 아라비아인
순용(舜龍)을 起1世로한 덕수장씨(德壽張氏)와 선조(宣祖)30년에 명나라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을
따라온 해빈(海濱)을 起1世로한 절강장씨(浙江張氏) 를 제외하고는 圃蔭선생(태사공 휘 정필 또는 길)이
한국의 장씨로는처음이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볼때는 그것이 틀렸다고 딱 꼬집어 말할수는 없다고본다.
역사상 그전에도 張을 쓰는 인물이 더러 출현하지만 그것이 꼭 성을 뜻하는지는 의문이다,(당시는 성이
없이 이름만 존재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즉 이름이 張으로 시작)
2. 인동장씨는 크게 6부류로 되어있다.
上將君 金用系
直提學 桂系
文肅公 順孫系
玉山君 延佐系 - 흥성장씨(興城張氏)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버지 려(儷)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짐
안동(安東) 수명(壽命)系
안동(安東) 용서(龍瑞)系
상기 관향중 상장군계와 직제학공계를 제외하면 아주 미미하게 가세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그중
흥성장씨계는 직제학공계와 先代를 공유하는바 이는 본인생각에 오랜시간 서로 교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사료됨.
3. 시조로 본 한국의 장씨
현재 한국에는 관향(貫鄕)을 달리하는 張門이 약 40여개로 추산되고 있는데 본인이 파악한바 안동계
6개, 인동계 15개를 수집할수 있었다. 이는 제각각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주장함에 따른
것이지만 일부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 여기에 파악되지 않은 경우는 앞으로 계속
수집에 노력하여야 할것이다.
가. 안동장씨계
-진천장씨(鎭川張氏) - 8世 몽룡(夢龍)의 3남 유(裕)
예산군(禮山君) 奉翊大夫 佐右衛 中樞院事
-청송장씨(靑松張氏) - 9世 보(補)의 2남 영민(英旼)
청송군(靑松君) 中樞院事
-예산장씨(禮山張氏) - 9世 보(補)의 3남 영위(英暐)
吏部上書 平章事
-지예장씨(知禮張氏) - 12世 양위(良位)의 장남 일성(日成)
忠武公 右儀判書
-진안장씨(鎭安張氏) - 12世 양위(良位)의 차남 원열(原烈)
判書評理
나. 인동장씨계
-전주장씨(全州張氏) - 4世 지현(之賢)의 차남 응익(應翼)
江華君 일운 全州府院君
-단양장씨(丹陽張氏) - 4世 지현(之賢)의 삼남 순익(順翼)
丹陽君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흥양장씨(興陽張氏) - 4世 지현(之賢)의 4남 선익(善翼)
初諱玄翼 興陽君
-울진장씨(蔚珍張氏) - 4世 지현(之賢)의 5남 말익(末翼)
蔚珍君 文成公
-부령장씨(扶寧張氏) - 6世 만익(萬謚)의 5남 을호(乙湖)
扶安君 密直府使
-구례장씨(求禮張氏) - 7世 을제(乙濟)의 차남 악(岳)
門下侍郞(1123 ~ )
-순천장씨(順川張氏) - 10世 연우(延佑)의 차남 천로(天老)
金紫光祿大夫
-옥구장씨(沃溝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익(木+益)
玉城君 平章事
-흥덕장씨(興德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기(機)
興山君 三重大匡 守太傳門下侍中 平章事
-옥천장씨(玉川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식(拭)
進士
-결성장씨(結成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사(木 + 思)
結成君 三重大匡 門下侍中
-여흥장씨(麗興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근(根)
麗興君
-목천장씨(木川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빈(彬)
木川君
-인동장씨(仁同張氏) - 13世 상겸(尙謙 - 中郞將 兵部尙書)의 子 계(桂)
玉山君 忠烈王 集賢殿 直提學 - 즉 인동 직제학공계
- 그 외 우리 상장군계 인동장씨
4. 여헌(旅軒)선생은 우리의 직계조상이 아니다.
仁同 15世 16世 17世
우(俁) ------------승량(承良) ----------------준(俊) ---------------계증
남산파중시조 內禁衛 御梅每將軍 (贈)通政大夫 :
中直大夫 泗川鎭 承政院左承旨 : ---계임
兵僉節使 行縣監
18世 19世 20世 21世
계증(繼曾) -----------열(烈) --------------현광(顯光) ------------------ 응일(應一) ----
(贈)嘉善大夫 (贈)資憲大夫 大匡輔國崇祿大夫 資憲大夫
吏曺參判 吏曹判書 議政府領議政 文康公 吏曹判書 文穆公
(1491 - 1557) 묘 남산사천공옆 호 : 여헌(旅軒) 호 : 청천당(聽天堂)
묘 암포 묘 오산탑동 묘 성주 암포
계임(繼任) -----------훈(焄) -------------- 현원(顯源) -------------------형일(衡一) ----
從仕郞 嘉善大夫 通德郞
(1494-1570) 戶曹參判 (1588-1654) (1623-1682)
묘 성주암포 울진공 묘 봉화 구수곡 묘 설와평 와우형
묘 봉화 만현(늦고개)
임진왜란을 피하여 입향
22世 23世 24世 25世
(응일로부터) 구(銶) --------------- 만취(萬冣) ---------대형(大馨) -----------지목(趾睦)
通政大夫 吏曹參議 通德郞 (1702-1743) (1720-?)
묘 인동부서 대룡사 묘 인동부남 월암 묘 설와평 와우형 묘 구수곡
(형일로부터) 구(銶) -------------- 만제(萬齊) --------- 대형(大馨) --------- 지목(趾睦)
(蔭)通政大夫 安東營將
(1642-1723) (1660-1724) 상동 상동
묘 설와평 와우형 묘 목과산
26世 27世 28世
(지목으로부터) 수야(壽冶)
(1749 - ?) 묘 안정 동촌
(지목으로부터) 수익(壽益) -------------윤화(胤華) -------------- 재추(在樞)
부호군(副護軍) (1799-1820) : 부사과(副司果)
묘 신기동(솔등지) 묘 신기동 : (1826- )생부 윤덕
신기동으로 입향 : 묘 구수곡
:
윤덕(胤悳 -------------- 유추(有樞)
(1807- ) : (1828- )
묘 신기동 : 묘 부석후곤향
:
----------- 인추(隣樞)
(1830- )
묘 구수곡
윤억(胤億) --------------기추(箕樞)
(1820- ) : (1843- )
묘 부석소천노실곡 : 묘 와우형
:
--------동추(東樞)
(1851- )
묘 와우형
상기와 같이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현광(顯光)부군은 현재 봉화(奉化) 조양리(朝陽里) 구수곡(求水谷)에
영면하고 계신 우리의 조상 현원(顯源)부군과는 재종(再從 - 6寸)간이며 우리의 족보는 18世에서 24世까지
부끄럽게도 날조되어져있다. 그렇지만 이또한 우리 조상이 행하신일 그때 그당시 필히 말못할 곡절이 있었을
것이니 덮어놓고 잘잘못만 따짐은 자손된 도리는 아닐것이다. 일례로 여헌부군께서는 따님만 5분을 두셔서
백부(伯父) 휘 희(熙)의 장남 현도(顯道)의 아들 응일(應一 -청천당)으로 가계를 이었는데 14명의 증손과
47명의 고손이 족보상에 올라 있는데 과연 그중에 몇분이 진실일까 심히 의심스럽다.
5. 안동장씨가 보는 인동장씨
安東張門에서는 仁同 상장군 휘 금용(金用)부군을 太史公의 손자로 보고있다.(子 보천(寶千)의 아들
장남 금선(錦善)은 안동장씨, 차남 금용(錦用)이 (한자명도 틀리고 벼슬명도 틀리지만) 인동장씨라고...
물론 상장군계, 직제학공계 모두 부인하고 있지만.... 그러나 본인이 소집한 자료에 의하면 직제학공계
는 인정(그들의 가계도등 참작)/물론 상장군계는 아예 기록조차 없다. 그렇지만 본인이 그려본 가계도에
의하면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고 대충 그림이 이어진다..
첫째 우리 족보에는 없는 우리 先代 조상의 生年이 그들의 족보(求禮派)에는 기록되어있다.
2世 善 (麗顯宗甲子生 1024 ~ ?) 之善
3世 震 (麗文宗癸巳生 1053 ~ ?) 震翼 옥가군(玉嘉君)
4世 國伸(麗文宗辛酉生 1081~ ?)
5世 信元(麗睿宗庚寅生 1110~ ?)
6世 世林(麗仁宗丁巳生 1137~ ?)
또 그들의 족보에는 2세 善을 之善으로 3세 震을 震翼으로 표기하여 놓고있는데 한술 더 떠서
"仁同派譜無翼字以上善字上無之字"라고 써 놓았다. 또 3世 震(翼)에는 玉嘉君으로 그의 4촌 효익(孝翼 -
玉山君), 응익(應翼 - 江華君), 순익(順翼 - 丹陽君), 선익(善翼 - 興陽君), 말익(末翼 - 蔚珍君)과 함께
표기하여 놓아 혹시 우리의 족보를 꿰뚫고 있는것은 아닌지? 아니라면 선대에는 가깝게 지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왕래가 없어지고 변란등을 겪으며 아예 단절된것은 아닌지?...
또 그들의 족보에는 우리것(인동)을 고려초부터 시작하여 고려말/조선초까지만 표기하고 그후는 인동
파보에서 알아보라 하였는데 같은항렬에서 그들의 연대와 우리것이 동일하다. 일례로
안동 14세 려(儷) -花寧君 禮儀判書 門下左政丞
인동 12세 안세安世) - 忠貞公 正憲大夫 德寧府尹 高麗忠臣 杜門七十二賢 - 인동은 상계를 인정하지 않아
2대가 느림
안동 15세 사길(思吉) - 花山君 太祖開國一等功臣 大司馬大將軍 大匡補國銀紫光祿大夫 右議政
인동 13세 중양(仲陽) - 德寧君 高麗忠臣 嘉善大夫 金海府使
그렇지만 극명히 인동과 안동은 고려말/조선초에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안동은 조선개국에 적극
참여 하여 모두 일등 또는 이등공신을 획득 하였지만 인동은 불사이충의 의를 지켜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안동)의 뻥도 너무 과한데 그들의 가계표를 살펴보자
1세 장백익(張伯翼) - 2세 보고(保皐) - 3세 우(羽) - 4세 첨(籤) - 5세 원(源) - 6세 정필(貞弼)즉
태사공 휘 길 -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璧上三重大匡) 아부공신태사령(亞父功臣太師領) 충헌공(忠獻公)
호 포음(圃蔭) 으로 다시 안동장씨 起一世로 연결되고있다.
그런데 웃기는것은 그들의 비조(鼻祖) 장백익부군은 당나라 중랑장우복야(中郞將右僕射)로 중원절강성
(中原浙江省)을 근거지로 활동하신분이신데 아드님이 장보고 즉 신라 청해진대사(중국 당에서의 관직은
무령군소장(武寧軍少將)이었는데 좌정승(左政承)으로 승진(?) 시켰으며 이분이 또 태어나신곳은 서해안
이라고하며, 어릴때 이름은 궁복(弓福) 이며 천민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중원에 계셨던분의
아들인지 설명이 없다. 또 그는 신라에서 왕이보낸 자객(염장閻長)에게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어떻게
그아드님(휘 우)은 당나라 대원수 인신상(大元帥仁臣相)이며 그후 그의 후손 첨, 원, 정필등은
중국과 신라를 들락날락 하셨다는등 너무나 얼기설기 엮인 그들의 상계는 한마디로 코메디에 불과
하지만 어쨌거나 적당히 역사는 만들어 놓았다.
상기를 참고해볼때 우리 상장군계 인동장씨는 그저 상장군 휘 금용부군을 起1世로만 표기할뿐 그선대에
대하여는 일언절구 한마디도 없다. 여헌수록(旅軒手錄)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만인당(晩忍堂)
지학(趾學)의 뜻만 쫏고있는데 거기에도 태사공 포음 선생을 거론하였지만 확실한 믿음이 없다고 하시며
조상을 섬김에 있어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항은 배재 하여야 한다하였으니 그분들도 자신의 기록을
100% 신뢰하지는 않으신것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랴 그저 조상의 은덕을 칭송하고
앞으로 자손을 잘 양육하여 우리 仁同張門이 자자손손 번창할수 있게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것이다.
졸필 끝까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2011. 10. .
장 세 규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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