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깊이에서 시인의 위치를 파악하다- 박성민, <길 위의 집>
세월의 허벅지엔 늘 가려운 상처가 있다
주정뱅이 불빛들은 밤이 되면 흔들리고
오늘은 더 추워졌다 참이슬도 쓰러진다
지하도나 대합실 구석마다 우리는
못처럼 박혀서 아침까지 녹슬어간다
오늘자 신문지 한 장이 몸뚱이를 덮는다
추워서 구부러진 담배꽁초 허리 세우고
가슴 속 깊이 빨면 길 위의 집이 된다
눈 뜨면 젖은 눈망울이 커튼 되어 열리는 집
희고 작은 내 주먹아 창문은 어디 있나
밤마다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묻는 말에
한 번도 거만한 어둠은 답해주지 않았다
새벽까지 뜬 별들은 잠 못 이룬 것들 뿐
두 손 모은 기도는 가랑이로 모아지고
아침엔 집중사격 같은 햇살만 눈부시다
박성민 <길 위의 집> 전문
언제부턴가 지하차도의 부속물처럼 되어버린 노숙자의 그림이 선명하다. 자의든 타의든 주정뱅이 몰골을 하고 음침한 어둠처럼 인생의 한 지점에 고여있는 이들, 추워진 날이면 독한 소주 한병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묘약이 되기도 하고, 그런 묘약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몸뚱이는 가볍게 쓰러진다. 경제대국과 첨단과학을 달리고 있는 세상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오늘자 신문이어도 이들에게는 낡은 이불 한장의 역할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종이에 불과하다. 한 지점에 못박혀 팔다리와 정신마저 다 부식되는 양을 지켜보면서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 이들에게 집은 눈꺼풀에 불과하다. 눈감으면 집안이고, 눈뜨면 집 밖인. 어디에도 이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창문은 없다. 누구하나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도 없다. 몇 번이고 벌떡벌떡 일어나 창문을 찾아보지만, 새벽까지 잠 못 이루다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저항 한번 못하고 도로 쓰러진다.
박성민님의 시의 기조는 풍자와 해학이다. 골계미가 선명하다. <이순신 입원하다>, <왕새우 소금구이>, <신춘 심사평>, <외로운 날의 창세기>, <개가 짖는 이유>, <동물의 왕국> 등 몇몇 작품들만 봐도 그의 이런 특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재미있다. 읽으면서 소리내어 웃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웃는 얼굴 속에서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아픈 현실이 웃음과 익살의 뒷면에 한몸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아픔을 정확히 파악하고, 오롯이 자기 아픔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익살과 웃음으로 승화시켜 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박성민님의 시선은 늘 아픈 현실을 직시한다. 그 시선은 직선처럼 꽂히기도 하고, 봄바람처럼 살강거리기도 하고, 주위만 빙글빙글 도는 어릿광대 같기도 한다.
<길 위의 집>에 보내는 님의 시선은 따뜻하다. 금방이라도 눈물 흘러내릴 것 같고 가슴 한쪽을 손으로 움켜쥐어야 할 것 같다. 어둠에 고인 노숙자들의 군상을 몇 번이고 지켜보며 그들의 정지된 삶의 시간을 얼마나 안타까워 했을 것인가. "어느 정도 깊이 괴로워하느냐, 얼마만큼 고뇌할 수 있느냐가 인간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니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인의 위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뇌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산다는 것은 여전히 사막이다'라고 토로하는 시인의 고뇌는 도대체 어느만큼의 깊이에 가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고뇌도 해 본 사람이 그 깊이를 아는 것이다. '아직 멀었다'에는 그 만큼의 깊이에 도달해 있다는 또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렇기에 의도하지 않아도 '밤거리의 어둠이 모래알처럼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리라. 사회적 약자를 향해 열려진 그의 애정이 가슴속에 꽉 차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