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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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05 15:12
동인지 작품입니다.
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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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
허생원과 조선달이* 나귀를 끌고
넘나들던 봉평 고갯길에 가면
둥-싯 나, 달로 뜨고 싶다
작고 오종종한 종다리 눈을 닮은
메밀의 젖멍울들
붉은 대궁 끝을 잡고
여기저기 톡톡 팝콘 터지는 소리
구름 속을 내려와
한 방울 꿀을 따기 위해
수천 번 날갯짓을 하는 꿀벌들
실크융단 흰 늪에 흠뻑 빠져
풍덩풍덩 목욕하는 밭의 중심
늑대 같은 달의 숨소리
뭉클한 등 달빛이 혈육으로 업혀서
길 위의 삶은 모두 가벼워진다
무진장한 그리움이 벌침으로
아리게 박혀들어도
펼쳐져서 아득한 메밀밭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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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새
탑돌이 탑 아래
누가 버리고 간
장미 한 다발
몰래한 사랑 들키기나 한 듯
두 볼이 붉은 네 얼굴
열두 폭 다홍치마 하얀 말기 속
숨겨둔 생채기 같다
목이 긴 새처럼 기다리던 상현은 떠나고
막차로 돌아 온 하현
징검다리로 점점 박힌 몸의 가시들
출렁이는 체취라며 버티고 있는
잊혀진 날들의 초상 같은
마른 꽃 한 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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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물번지는 강가
고와서 서러운
진보랏빛 나팔꽃 꽃물번지는 강가
싸리꽃은 발목을 물속에
반쯤 담그고 두고 온 고향 생각하는지
먼 산을 오래 바라보고 있고
누렇게 늙어가는 풀밭 길을 걷는데
고독을 앞세운 영혼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가을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강 건너에는 하얀 억새꽃 머리에 꽂고
아흔 줄의 노부부가 산책을 나왔다
할머니는 풍 맞은 몸을 영감님께 맡기고
밧줄보다 질긴 생을 끌고 간다
오래 응시하던 목이 긴 새 한 마리 강가에서
조용히 스케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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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다는 것은
쿵, 하고 떨어졌다
모과 한 알
끝내 잡고 있던 손
가지를 놓쳐 버렸다
떨어지며 생긴 멍 자국
실직자의 인장처럼 이마위에
선명하게 찍혀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능선 너머 석양이 떨어지고
어느 가장의 밥줄이 떨어지고
일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절박이 절벽으로 보일 때
꺾어진 모가지 축 처진 어께
태양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떨어진다는 것은 내일의 기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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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에게도 날개가 있다
숨죽이며
조용히 다가가는 순간
내 발자국소리
먼저 감지한 너는
팔랑, 날아가는 이름 모를 작은 새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 속
까치발로 허공을 헤집다가
넝쿨의 가시에 할퀸 내 심장
“詩” 네가 숨어있다는 그곳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한다는데
혹여,
어느 님 의 가슴 처마 밑은 아닌지
그래, 어쩌란 말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너는 너무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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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가슴으로 태우던
아직 타액이
채 마르지 않은
어느 가장
까만 가슴으로 태우던 버려진 꽁초가
몸통과 입뿐인 몸으로
늙은 골목 길 귀퉁이를
길게 한 모금 빨고 있다
삶의 현장으로 막 떠난 주인을 오래 전송하며,
간밤 너와집 몇 채 지었다 헐었다
수없이 되풀이 하다
푸석한 얼굴로
밤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 남자
꽁초는 바람이 스칠 때 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뽑아 올리는 동그라미 구름
그 남자의 가슴 언저리에도
무지개 서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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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을 꿈꾸고 있는
적막강산이다
괜스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린다
끝내 전화 한 통 걸려오는데 없다
쥐죽은 듯 조용한 공간속
유리창 너 머 앞산 능선이
안개에 물린 채 렌즈에 잡혔다
팔장을 끼고 애꿎은 거실을 빙빙 돌다가
냉장고 속에 넣어둔 알밤 한톨 끄집어내어
치아에 힘주어 꽉 깨무는 순간
밤벌레 한 마리 아슬아슬하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방 두터운 유리벽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일탈을 꿈꾸는 내가 밤벌레 한 마리다
혹여, 누가
지구를 아작 해 주기라도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