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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불행 샤워>의 줄거리:
원치 않는 불행은 결코 자기 스스로 내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내 삶이 불행하도록 운명지워진 것도 아닙니다. 내 삶이 지금 불행하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불행의 수도꼭지를 열고 불행을 뒤집어 쓰면서 전신을 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서 행복의 조건을 구비하려는 노력을 하자마자 우리는 불행을 뒤집어 쓰는 샤워를 시작하게 됩니다. 땅위의 축복 된 삶을 침노할 것이 아니라 땅을 떠나 천국을 침노할 때 행복샤워가 시작 됩니다.
불행 샤워
(창27:30~46)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불행 샤워>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불행 샤워’
불행은 절대로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원치 않는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우리의 삶의 여정이 하나님에 의해서 불행하도록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언제나 우리 스스로가 불행의 수도꼭지를 열고 그 불행을 뒤집어쓰면서 불행으로 샤워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샤워라는 것은 내가 수도꼭지를 틀고 수돗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샤워 자체가 다가와서 샤워를 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불행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전 영역에 대해서 내 스스로 불행을 뒤집어쓰는 거예요.
장 폴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있어요.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절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중에서도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했더라고요.
“인생은 B로 시작해서 D로 끝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C가 있다”
B로 시작할 때의 B는 Birth(출생)을 말합니다. D는 Death(죽음)입니다. 그 사이의 C는 Choice(선택)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의 생각을 한 마디로 아주 잘 나타내는 말이에요.
무슨 뜻이냐?
“내가 태어난 것, 내가 생긴 것은 다 우연이다. 나의 선택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자유롭게 나의 의지를 발동시켜서 이 땅에서 부자가 되겠다고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의 추진력은 다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쁘려면 만족해야 돼요. 그런데 무엇으로 만족할 것인가를 선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고 가난하게만 살라는 법도 없는 것이고, 부자로 태어났다고 부자로 유지되고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키 작고 얼굴이 못생긴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얼마든지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외모도 바뀔 수가 있고, 요즘 같으면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바꿀 수 있으니 선택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구조 안에서 선택하면 인생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불행 샤워의 이유라는 거예요.
장 폴 사르트르라는 탁월한 철학자께서 지금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영어의 A를 잊고 있습니다. 왜 A를 떼어버려요? 말이 안 되죠.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데 A를 떼어버렸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 영어 실력으로는 이 단어 밖에는 찾을 수가 없어요.
Arrangement, 정리 정돈 한다는 뜻입니다. 준비하고 정돈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Arrangement 된 상태에서 Birth 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태어날 때에 이미 아담이 사는 장소는 낙원이었습니다.
다 Arrangement 됐어요. 준비되고 정비되고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이미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다 Arrangement 됐어요. 다 정리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생물학적으로는 차자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집안을 이어가는 장자가 되기로 하나님에 의해서 다 Arrangement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Arrangement를 인정하고,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돈되고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택받은 선민들은 어떻게 Choice 해나간다는 것입니까?
이 땅이라는 평면상에서 Choice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 위에서 내가 돈 버는 사업가가 될 것이냐? 공부를 많이 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될 것이냐? 이런 Choice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교수를 하라는 법은 없으니 너는 사업가가 되라는 이런 Choice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Choice를 하라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태어났을 때에 내가 맞이하는 모든 상황과 삶의 조건은 다 우연이지만, 이제부터 자유를 가지고 선택해 나가면서 본질적으로 내가 누군가를 스스로 만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의 생각 속에서는 나의 본질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Arrangement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의 선택은 하늘에서 하나님에 의해 Arrangement 된 것이 이 땅에서 Achievement(성취) 되게 하는 것이 선택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Arrangement 됐으니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의해서 결정 된 것을 이 땅에서 내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선택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고, 어떤 일을 해서 보람찬 일을 할 것인가? 내가 누구보다 더 앞서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내가 복을 많이 받아서 이 땅에서 높은 자리, 남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자리에 설 것인가? 이런 선택은 선민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선민의 영역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예 세계관이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얼마나 많이 모을 것인가? 얼마나 높이 올라갈 것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한 다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Arrangement 해버려요.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 둘 중에서 야곱을 선택하시잖아요?
이게 선택이고 이게 Arrangement 아닙니까? 정리한다는 것은 선택해야 정리가 되는 거예요.
내게 꽃병이 있다면 창문가에 놓을 것인지, 책상 위에 놓을 것인지, 탁자 위에 놓을 것인지 선택해야 Arrangement가 되는 겁니다. 책꽂이의 책도 이 책을 위 칸에 넣을지 아래 칸에 넣을지 선택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참 재밌어요.
야곱이 이제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기도를 받고 나가자마자 에서가 들어오는데 야곱과 마주치지 않고 교차합니다. 에서가 음식을 잘 만들어서 들어갑니다. 에서는 이미 헷 사람 여자들과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아마 아내들이 음식을 잘 만들어줘서 가지고 들어갔는데, 이삭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니다. 두려워 떨 정도로 놀라는 거예요.
“네가 에서냐? 내가 야곱에게 다 주어버렸는데 어떻게 하느냐?”
그러자 에서가 엉엉 웁니다. 울면서 야곱 그 나쁜 놈이 내가 배고픈 것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빼앗아가더니 아버지의 축복기도까지 다 빼앗아갔다고 합니다. 그 약삭빠른 놈이 이름대로 못된 놈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빌어줄 복이 남아있다면 빌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빌어줄 복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에서에게 사냥해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라고 했잖아요.
그 뜻은 지금 늙어서 기력이 없어요. 물론 이 사건 이후에도 38년이나 더 삽니다. 180살에 죽습니다. 오래 살겠지만 기운이 없어서 자기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137세에 배다른 형 이스마엘이 죽었으니까 아마 자기도 그 나이쯤 되어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한 것 같아요. 힘이 없으니까 맛있는 것을 먹고 기운을 차려서 전신의 힘을 다 들여서 맏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하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인줄로 알고 맛있게 먹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축복을 해버렸어요.
여러분 같으면 그 다음에 다른 축복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죠.
나중에 에서에게 기도는 해주는데 우리가 야곱의 축복기도에서 봤던 물질적인 축복의 기도도 없고, 하여간 빈약하고 형편이 없어요. 내용을 읽어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화는 나고 아버지는 가실 때가 다 된 것 같으니까 아버지가 죽기만 하면 야곱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리브가가 야곱을 800km떨어진 오빠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신시킵니다.
피신을 시키면서 리브가가 이삭에게 뭐라고 하느냐?
46절에 “에서가 헷 족속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내가 심령이 상했다. 야곱도 여기에 뒀다가 헷 족속의 여자들과 결혼하면 나는 살맛이 안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이라도 하란으로 가서 우리 집안사람들과 결혼하게 합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이 참 기가 막혀요.
읽을 때마다 놀랍지만 46절은 사실 28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 같은데 왜 46절을 27장 끝에 붙여놨느냐?
야곱이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인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Arrangement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으로 가게 될 때에는 신부를 얻으러 가게 되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섭리에 기쁨과 기대에 차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려는 아내가 누굴까에 대한 궁금증과 희망에 차서 가야 될 길이 어떻게 되었느냐?
바로 앞에서 리브가가 말하기를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피신하라고 합니다.
에서가 이렇게 분노할 일이 없었으면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하란에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 가게 될 발걸음이, 리브가와 야곱이 작당하여 남편이자 아버지를 속이면서 에서에게 갈 세상적인 장자권의 축복을 탈취하려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피신하는 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지금 야곱을 하란으로 도망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명분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뜻이었습니다.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을 시키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그러니까 기쁨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이 땅에서 장자권으로 인해 행복해지겠다는 선택과 행동의 결과로 두려움에 꽉 차서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불행을 누가 자초한 것이냐는 겁니다. 리브가와 야곱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
장 폴 사르트르의 이야기 앞에 Arrangement를 붙였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Arrangement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벌써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서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영적인 의미에서 장자권이 야곱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서를 생물학적으로 먼저 내보내셨던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과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사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장자권은 아버지의 재산을 많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것 하나예요.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이 장자권을 탈취하려고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의 결과를 자세하게 살펴보자는 겁니다.
결혼하러 가는 걸음에 불행이 덧입혀졌습니다. 그 결혼을 위한 사건에 불행으로 샤워를 시킨 거예요. 두려워 떨면서 가는 것이죠.
첫째, 리브가와 야곱이 작당해서 속인 결과가 전적으로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하신 장자권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장자권이 아니었어요. 실제로 이렇게 속임으로써 야곱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조차도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 야곱이 쫓겨 가잖아요. 그래서 800km 떨어진 라반의 집에서 무려 20년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이 나이든 아버지 이삭의 재산을 누가 관리하게 됩니까?
저절로 에서가 관리하게 된 거예요.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장자권이 내용적으로 실질적으로 에서에게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축복해 줄 때에 물질적인 축복에 대해서 야곱에게 많이 해준 것 같고, 에서에게는 안 해주 것 같지만, 더 읽어보면 야곱은 20년 머슴살이를 하고 나서 그 딸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데 결국 장자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가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이제 야곱이 돌아올 때에 에서가 죽이려고 마중을 나갑니다. 얍복 강가에서 기도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관계가 화해로 바뀌는데 어쨌든 그 때에 에서가 400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이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에 318명을 끌고 갔을 때보다 더 많아요. 에서가 못 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36장에 보면 화해한 뒤에 둘이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둘이 재산이 많아서 같이 머물 수 없어서 에서가 세일 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장자권을 탈취 당했다고 해서 잃은 것도 없고, 야곱이 장자권을 탈취했다고 해서 빼앗아 온 것도 없어요.
그리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이 영적인 의미가 아닌 세상적인 의미에서는, 한 때 구약성경의 역사에서 에서의 자손들이 에돔인데, 그 에돔이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 때가 잠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에는 헤롯왕이 유대를 다스리잖아요. 그 헤롯왕이 바로 에돔 사람이에요. 에서의 자손이 유대사람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라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깡그리 망해버리고 맙니다.
세상적인 의미로 본다면 리브가와 야곱은 완전히 stupid(바보짓)을 한 겁니다. 뺏은 것도 없고, 에서는 뺏긴 것도 없는데 징징 울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셔서 장자권을 허락하신 것은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결혼하러 가는 길이 공포의 길이 되고 두려움의 길이 되고 피신의 길이 됐습니다. 희망찬 모습으로 가서 예쁜 아내들을 얻는 길이 피신 길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외삼촌에게 가서 ‘제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아내를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했으면 사윗감으로 대접을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피신해서 도망을 오니까 20년을 머슴살이를 하면서 아내를 얻고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떳떳한 사윗감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된 것이에요.
셋째 결과로는 리브가가 자녀들을 원수가 되게 했지요. 사실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거든요. 아버지가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고 축복하는 기도를 해주었어도, 에서가 생각하는 장자권이란 것은 세상적인 장자권이므로 다 에서에게 간다 할지라도 야곱이 잃을 것이 없었어요. 에서도 기분 좋고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있었다면 롯에게 아브라함이 다 양보했던 것처럼 얼마든지 형에게 줘도 하나님은 야곱에게 주실 것을 다 주셨을 겁니다. 이제 원수가 되어서 죽이겠다니까 도망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리브가가 떠나는 야곱에게 몇 날 동안만 피신하라고 합니다. 리브가는 잠깐 있다가 오게 될 줄로 알았죠. 그러나 자기 여생에서 야곱을 다시는 보지 못한 채로 죽게 됩니다. 그 며느리들과 손자들을 안아보지도 못하고 리브가는 죽게 된 것이에요.
누가 그러라고 했습니까?
죽게 될 날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었겠죠.
그러면 그 동안 야곱이 에서와 사이가 좋게 되고, 야곱의 마음속에 이 세상의 축복된 삶을 침노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침노하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이 있었다면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얻어 와서 살았을 것이고, 리브가가 보는 앞에서 손자들이 태어나서 그 많은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브가가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에서만 남은 집안에서 다 늙어가는 남편을 남겨두고 리브가가 외롭게 죽어가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선택을 잘못 한 거예요.
내 마음에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이 땅 위에서 얻으려고 야곱과 일을 벌인 바람에 이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내 인생의 삶은 다 Arrangement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운명이 아닙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선택하든지 무조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운명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 Arrangement 해 놓으신 것은, 내가 마음의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을 선택할 때에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이 Arrangement했던 복된 계획들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예레미야서 29:1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의 장래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니 하나님의 나를 향한 모든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강인 거예요.
그런데 왜 내 마음에는 평강이 없고 불행하고 불안합니까?
장 폴 사르트르의 말대로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이에요.
이 땅 위에서 복을 많이 끌어들임으로 잘 살겠다는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 땅 위에서 성공하고 형통해야 기쁠 것이라고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선택하면 이 땅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Arrangement하신 대로 다 진행이 되면서 그저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 내 스스로가 불행의 수도꼭지를 열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의 모든 과정을 다 불행으로 샤워시키고 있는 거예요.
똑같이 일어나야 될 일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겠다는 선택을 했다면, 다 복 된 일이고 평강의 일이고 하나님의 Arrangement 대로 되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의 여정일 수 있었지만, 이 땅 위에서 내가 이것을 얻고 성공하고 이루어서 만족하겠다는 이 선택을 하고 땅 위에서 축복 된 삶을 침노해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불행을 뒤집어쓰는 불행 샤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본문 아닙니까?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도 다시 볼 필요가 있어요.
아버지들의 축복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거예요.
지금 이삭이 놀란 이유가 뭡니까?
리브가가 꿈에서 야곱이 장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계시 받고 이삭에게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워낙 야곱을 사랑하니까 꾼 꿈이 그랬나 봐요.
그랬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축복한 것이 야곱이라는 것을 압니다. 야곱의 속임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는 거예요. 정말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축복한 것이 야곱이라니, 이게 하나님의 섭리였나 하고 깨닫는 거예요.
이렇게 아들의 미래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아버지가 하는 축복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Arrangement한 이상으로 축복을 줄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Arrangement한 것이 이루어지면 아버지가 저주를 해도 축복이 됩니다.
예를 들어 다윗 같은 경우에는 여덟 명의 아들이 이새에게 있었는데, 아버지 이새와 형제들의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다윗입니다. 그 이새에게 축복을 하라고 했으면 다윗에게 왕이 될 축복을 해줄 수가 없는 거예요. 알지를 못하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태어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려고 이미 다 생각을 Arrangement 해놓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누가 나를 축복하더라도 대단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고마워할 것도 없어요. 고마워하지 않을 필요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누가 나를 저주한다고 해도 내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안 이루어질 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내 인생의 행과 불행에 사실 관계가 없어요. 내가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이 땅에서 일어날 내 인생의 여정에 영향을 끼칠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축복을 바라는 거예요?
‘기도 부탁드립니다.’라는 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내가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으면 기도를 부탁하겠지만,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왜 기도 부탁을 해요?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되지.
그러나 부탁하건 안 하건 내가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해 줄 수는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 선(善)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의존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축복?
별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Arrangement 해 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최고십니다.
불행 샤워는 선택에 달려 있어요. 그리고 B와 D 사이에 C가 있는데, 우리는 그 앞에 A가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땅에서의 축복 된 삶을 침노하느라 하나님께서 미리 Arrangement 해 놓으신 모든 섭리가 땅에서 이루어질 때에, 기쁨과 감사대신에 공포와 두려움으로 피신하며 그 길을 가지 않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