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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신,
웬일인지 내 맘이 평화로워. 황혼이 저토록 고운 때문일까,
소나기가 지나고 간 여름 언덕에 곱게 핀 달맞이꽃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신을 그리워하다.
편지를 쓰리라. 유치환시인처럼. 나의 신, 이젠 안녕. 설령 부끄러움이 산란하여도 괘념치 않으리라. 다만 심장이 바쁘도록 행복하리라.
나는 네 안에 빠지고 싶다
하늘이 못 물 속에 잠기어 있듯이
눈은 눈으로 살은 살 속으로
더불어 흐르면 목숨은 타는 불
홀로 있을 때도 너는 나의
가장 깊은 안에 숨쉬고 있구나
(박희진의 戀歌)
너무나도 사랑하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저 무수한 물방울들이 하늘과 땅에 하나뿐인 진실을 위하여 찢어지는 고통만으로 부서져갔음을. 내 목숨은 향기로운 너의 꿈과 미움없는 사랑을 위하여 쉬지 않고 흩어져갔음을 너는 아직 모른다. 속절없이 보내야 했던 한없는 미움이여. 너무나도 사랑하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열망의 넋 분수... 분수만이 알고 있다(습작 「분수」).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를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부인 듯 한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밤마다 미끌어 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박용철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신, 사랑하는 나의 신, 그리운 신, 나의 신, 보고 싶은 신, 사랑스러운 신, 정겨운 신, 내 마음의 신, 그리고 사랑하는 신, 나는 신의 이름 앞에 각각 다른 단어 한 개씩을 써서 여덟 번째로 이 편지를 띄운다. 단지 꾸미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오직...내가 선택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불러본 이름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말하리라. 아무것도 헛됨은 없노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괴로움을 당했던 것. 아무것도 헛됨은 없노라. (1978. 7. 30.)
그랬다. 우리는 이렇게, 말로 형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편지에 담으며 서로를 갈망하였고, 이 시기에 평생동안 다 하여도 모자랄만한 이야기들을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처럼 토해냈다. 지금 읽어보면 때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고 민망한 표현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서로 무슨 말을 하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자신의 감정과 언어에 충실했고, 그것이 서로에 대한 순결한 마음의 고백임을 믿었다.
결국 이 시도 그런 군 시절에 쓴 것이었다. 나의 시집에 평설을 적어준 조명제 시인께서는 앞선 시 「해바라기」와 함께 「달맞이꽃」도 “간곡한 삶의 의지와 실존적 헌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셨지만 나로서는 그 시절 꽃이라는 존재 하나를 대할 때에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생(生)의 의지가 섬세하게 투영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또한 내가 선택한, 한 지고지순한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한없는 연민과 사랑의 응축과정이었다.
달맞이꽃(원시
차라리 혼자이고 싶어
그대 부드러운 눈길이
사뭇 그리운 이런 밤에는
나는 한사코 기다리겠어
그대가 올 때까지
설레임으로 가슴을 열며
이슬을 닮은 눈동자로
그대 푸른 달그림자
내 얼굴을 비칠 때 까지
마침내 그대 오면
나는 다만 숨죽이며
쳐다만 보겠네
하얀 새벽을 지나
서늘한 이마 위에
그대 황홀한 눈빛이
나를 사로잡을 때까지
나는 다만 쳐다만 보겠네
나는 이 시를 원시(原詩) 그대로 대부분 살렸고, 몇 군데만 다듬어서 가곡 「달맞이꽃」을 만들었다.
달맞이꽃
차라리 혼자이고 싶어 그대 부드러운 눈길이
사뭇 그리운 이런 밤에는 나는 한사코 기다리겠어.
그대가 올 때까지 설레임으로 가슴을 열며
이슬을 닮은 눈동자로 그대 푸른 달그림자
내 얼굴을 비칠 때까지
(간주)
마침내 그대가 오면 나는 다만 숨죽이며
그대를 바라만 보겠네 하얀 새벽을 지나
내 서늘한 이마 위에 그대 황홀한 눈빛
나를 사로잡을 때까지 나는 다만 바라만 보겠네
바라만 보겠네.
그리하여 이 가곡은 2023. 12. 17. 그 멜로디와 곡조가 완성되었고, 2024. 1. 26. 구광일 작곡가를 만나 채보를 하였으며, 2024. 8. 26. 편곡을 끝내고 2024. 12. 10. 장충신세계레코딩스튜딩에서 소프라노 신승아의 가창으로 녹음되었다.
https://youtu.be/c16WfXfFKMY?si=UEkcXmsUEiNEYYoo
첫댓글
오늘도 귀한 인생의 한 편을
그려주신 작품에
강추를 드립니다
김성만작곡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