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미군기지 안에 너오키나와 있다.
- 엘라 -
올 해 5월 일본 오키나와로 근무지 변경소식을 전한 지인은 마음속 품고 있던 걱정을 슬쩍 드러내어 말했다.
한국인으로 주한 미군이자 미국 시민권자로 미군에 지금도 복무중인 그는 20,30대 젊음을 군대에서 보냈다. 상시 체계적이고 훈련된 생활이 몸에 익숙한 그답게 안부 또는 수다를 떨기위한 전화나 문자도 변함없는 요일이나 시간대에 걸려온다.
미 육군으로 3년의 오키나와 복무는 그다지 정신적으로 순탄치는 않겠다는 내심 깊은 고민이었다.
일본의 변방인 오키나와는 현대 일본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일하게 지상전투가 벌어져 많은 민중이 전쟁에 휘말려 희생당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전쟁의 ‘피해자’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오키나와는 일본국에 속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다. 물론 변경에 위치한 지역이 흔히 차별받고 경제적으로 뒤처지듯이, 오키나와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오키나와 경제를 지탱해주는 관광 수입과 기지 관련 수입은 오키나와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연경관이 빼어나 남국의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기념관 따위가 모두 관광 또는 방문의 명소로 둔갑해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과 패전국 일본의 상징으로 미군기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그 밑바닥에는 태평양전쟁에서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이 자리한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패전을 앞둔 일본 정부와 군부는 오키나와 전투의 목표를 ‘본토 결전’에 대비할 시간을 번다는 ‘지구전’으로 설정하고, 될 수 있으면 미군의 ‘전력’을 소진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다.
오키나와는 즉 천황이 살고 있는 본토를 지키기 위한 사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로 1945년 3월부터 무려 석 달에 걸친 공방전에서 일본군 9만 명과 민간인 15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자가 많은 원인은 한마디로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과 냉대 때문이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군은 황민화가 덜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부모가 자식을, 형이 아우를 죽이는 참상이 이어졌다. 집단자결이 아니 군의 강제성을 부각시킨 ‘집단사’의 아비규환이 동굴에서 들판에서 벌어졌다.
집단사의 가해자인 제국 일본이 항복한 뒤 곧 미군이 진주했다.
그리고 미군 단독의 직접 지배가 실시되었고,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미국은 항구적인 기지 건설에 착수함으로 또 다시 오키나와는 사석의 처지로 내팽개쳐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오키나와 직항편이 늘어 오키나와를 찾는 국내 관광객이 많이 늘어났지만, 오키나와가 처한 현실은 그리 변하지 않는 듯하다.
일본 면적의 0.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땅에 주일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밀집한 이곳, 미군기지 반환을 둘러싼 오키나와 민중 그 투쟁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진행형이다.
사실 오키나와를 처음 방문한 2014년 10월 가을,
나하 시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면의 망설임과 천진난만한 여행자로 설레임도 있었다.
곧 착륙하게 될 나하 공항에서 시가지 쪽으로 뻗은 도로 오른쪽에는 자위대 기지 철조망이, 왼쪽에는 미군 군항 철조망이 이어져있었다.
또 가는 곳마다 맑게 갠 푸른 하늘과 코발트색 아열대 바다가 뭐니 뭐니 해도 먼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유혹하는 곳이다.
매년 마다 오키나와를 방문한다.
작년과 올 해는 무슨 이유로 먼 이방인으로서 내 가슴속에만 담아 둔 애절한 곳이 되었다.
늘 일상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미군기지 확대에 반대하는 시위와 농성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들의 황망한 표정과 구부정한 등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무거운 대들보를 짊어지고 있지만, 그런 그들의 존재는 일본의 상황을 부수어 버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아름다운 햇살이 눈부시게 다가왔던 5월 얀바루에서 본 스키마 왈리치 꽃이 나비 떼처럼 환하게 핀 그날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의 평화를 구하며 이 땅을 다시 방문할 날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