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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0장 25절-31장 16절
야곱을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서 그의 두 딸과 결혼한 것과 이후 자녀를 낳은 과정을 보면 무엇 하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온통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30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임신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식을 통합적으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무지한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죄를 짓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지식을 갖추고 있어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친히 약속하신 바를 성취해 나가신다는 것이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죄를 짓는 자로 있지만, 그런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성취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필 내용은 야곱이 자신의 소유를 늘리는 것과 그것을 계기로 외삼촌 라반을 떠나게 되는 내용입니다. 우선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야곱이 고향으로 가겠다는 말을 라반에게 합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사실 야곱에게 고향은 언제라도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곳입니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야곱의 경우는 좋은 모습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도망하는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갈 수만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다보면 부모님 생각이 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측면에서도 고향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야곱이 라반과 함께 살면서 체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라반이 매우 부정직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 안에서도 나오지만 야곱의 봉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복을 받았지만 야곱을 생각해 주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기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형 에서의 마음이 진정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고자 결심하여 라반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의 출처는 어디인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빌2:13) 실제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28:15)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고향으로 가고자 하지만 잠시 지체하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꿈을 통해 고향으로 가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여기서는 직접적인 지시를 하시지만, 창세기 30장에서는 직접적인 지시기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야곱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몇몇 가지 이유에서 더 이상 라반 곁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가 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잠시 잠깐, 혹은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 야곱으로 하여금 라반 곁에 머물게 하시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라반과 같은 인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인물을 붙여주셨는가 답답한 마음을 가집니다. 라반은 어떤 인물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 야곱을 자기 곁에 두는 자입니다. 자기 이익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보다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야곱을 이용해 먹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이용해 먹는다고 생각하면 기분 좋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라반과 같은 인물을 우리 옆에 두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라반과 같은 인물을 우리 곁에 두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하고,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라반과 같은 인물이 우리 곁에 있으면 힘듭니다. 때로는 분노가 날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분노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야곱을 훈련하시기 위한 도구로 그런 사람을 곁에 두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인생은 구원의 서정으로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믿음에서 좀 더 나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원치 않지만 라반과 같은 사람을 옆에 두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옆에 라반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속에서 훈련 받으셔야 합니다. 힘들 수 있고 분이 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때로는 분을 내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훈련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떠나려고 하자 라반은 만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야곱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 주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시면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난주 살핀 내용 속에서 본래 라헬을 사랑하여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지만 레아를 아내를 맞게 된 모든 이면에서 라반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야곱이 그의 집으로 오고 난 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그 복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라반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아내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라반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 가운데 여호와란 신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라반은 야곱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바로 라반은 다시금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시면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묶어 두기 위해 지금 라반은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품삯을 정하여 준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27절에서 라반이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을 주셨다고 할 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큰 복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야곱의 대답으로 나오는데, 29절과 3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이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그렇지 많지 않았지만 야곱이 온 이후로는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습니다. 야곱이 이르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셔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라반의 부당함에 대한 질책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레아를 위해서 7년을 봉사했습니다. 라헬을 위해서도 7년을 봉사했습니다. 소위 야곱과 라반 사이에 그렇게 약속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여전히 야곱은 라반을 위해 봉사했고, 그런 봉사에 대해 라반은 야곱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1장에서 다시금 설명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속이되 열 번이나 품삯을 변경하여 자기 배만 채우기 급급하였던 것입니다(창31:7). 야곱은 아내들을 얻고 자녀들을 낳았지만 소유가 많아진 것은 라반일 뿐, 자신의 집은 전혀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은 그런 부분에 있어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29절을 통해서는 분명 인간의 수고함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고의 결과로 복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30절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말하는 방식에 익숙하냐 하면 수고의 결과로 복을 말하는 방식이 익숙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그런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의 말씀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물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심었고 물을 주었습니다. 수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있는 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말합니다. 즉 이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수고함이 있지만 수고함 때문에 결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결과가 달렸는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유효성의 주인은 하나님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착각은 수고함이 모든 결과의 원인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구일 뿐 원인이 아닙니다. 모든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고할 수 있는 마음도 주시고, 실제로 수고하도록 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수고함에 대한 결과를 얻게도 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고함에 대한 결과를 얻지 못하도록 하시기도 하십니다. 전도서에 보면 내가 수고했는데 내 뒷 사람이 누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수고함 자체가 원인이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수고함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고함 없이 주시기도 하시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수고함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주시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칭의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후자는 성화입니다. 성화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올바르게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제35문)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입니다. 값없다는 말이나 은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홀로의 사역입니다.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있는가 하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살면서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때 우리의 수고가 없는 성화란 있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의에 대하여 살도록 노력해애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면 어떤 면에서 율법폐기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수고함이 있다고 해서 신인협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수고함도 누구로부터 나오느냐?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수고함의 결과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뿐입니다. 때문에 모든 영광은 그분만이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롬11:36).
시편 127편 1절과 2절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세우는 자의 수고가 없게 아닙니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깨어 있지 않으면 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없다면 다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을 수 있고 물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그 모든 것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유일한 원인자인가? 누가 유효성의 주인인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 야곱의 말에서 우리는 이런 깊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라반의 행동에 대하여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라반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라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 야곱은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31절과 32절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간단히 말하면 양 중 아롱진 것과 검은 것, 염소 중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만 내 소유가 되게 해 주면 좋겠다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33절에 보시면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한 마디로 거짓 없이 정직하게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라반이 동의하게 됩니다. 34절을 보시면 “라반이 이르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라반이 동의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에게는 유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라반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31장 1절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그런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35절 이하 43절입니다.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굳이 이 부분을 다시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야곱이 라반의 양과 염소를 칠 때는 아롱진 것과 검은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구분해 놓은 상태입니다. 구분하여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라반의 소유에 대해서만 야곱이 치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 나눌 때는 라반의 소유가 훨씬 많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야곱은 자신의 소유를 늘리게 될 뿐만 아니라, 튼튼한 것은 자기 소유가 되게 하고 약한 것은 라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그런 방법을 취하는데, 놀라운 것은 야곱이 취한 방법이 이렇게만 하면 야곱처럼 된다는 증명을 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야곱이 취한 방법으로 하면 야곱처럼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런 방법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가 없다면 이런 방법 자체는 미신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얼토당토아니한 그런 방법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1장으로 넘어가시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번성케 하기 위하여 친히 역사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이와 같은 방법을 말씀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자기를 파렴치하게 기만했던 라반에게 교묘한 속임수를 마음껏 구사한 것은 제 스스로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방도를 따랐으므로 정당한 범위 안에서 자제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어떤 자가 억울한 피해를 입을 때 하나님께서 복수자로 개입하는 것보다 더 적당한 일은 없으며 이보다 그의 공의에 일치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의 한 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이런 방법이어야 했는가? 왜냐하면 이런 방법 자체가 양으로 하여금 아롱진 것과 검은 것, 염소로 하여금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만들어 냈다는 것으로 미신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야곱의 소유가 될 양과 염소를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 더 좋은 모습이 아닌가란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놓은 방법에 대하여 왈가불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섭리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능력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야곱의 수고와 근면에다 자기 은혜를 결부시키고자 하셨다. 이것은 오랫동안 기만당해 왔던 품삯을 공공연하게 야곱에게 되돌려 주시려는 의도에서이다.” 즉 수고함 없이도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수고와 노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통해 그것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앞서 29절과 30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수고함이 있다 할지라도 수고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결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수고와 노력도 헛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얼토당토아니한 방법인데도 괜찮은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미신적인 방법도 괜찮다고 여긴다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분별해야 합니다. 왜 이런 방법을 행하는가? 그 스스로의 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이 없는데도 이것 저것 행할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다 행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만 유효한 방식이 있는가 하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서 가르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 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것도 라반으로부터 속은 일이 많기 때문에 억울한 마음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바를 새겨야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그러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야곱의 행동은 외삼촌 라반에게 복수하는 내용이 아니라,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라반을 징계하심과 동시에 그동안 라반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야곱을 복 주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창세기 31장을 통해 나타나는데, 우선 1절과 2절에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시간이 흘렀는데, 30장에서 라반과 품삯을 정할 때만 해도 분명 라반의 소유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31장에서는 역전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은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야곱이 정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빼앗은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아무 것도 안한 것이 아닙니다. 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방법이 저들에게 자기 소유를 만들어 보라고 해 보십시오. 똑같이 되지 않습니다. 즉 이 일은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을 번성케 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야곱에 대하여 라반이나 라반의 아들들은 마치 그가 자기의 것을 도둑질 해 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창세기 30장 27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라반의 실상은 야곱의 몫을 주지 않고 자기가 다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지만, 라반은 거짓과 속임과 도둑질로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갔던 겁니다. 그런 죄에 대하여 징계하고 계신데, 라반이나 그의 아들들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오로지 야곱 탓을 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말씀하십니다. 3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의 마음에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뜻 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라반의 소유보다 자신의 소유가 더 많아진 상태이고, 라반의 안색이 이전과 같이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고 아내를 불러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주 보게 될 내용 속에서 보면 라반에게 인사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게 되는데, 이런 면은 라반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에게 힘과 위로와 결단할 수 있기까지 하는 것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연약함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러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면 다시금 낙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지만 세상을 바라보면 다시금 걱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을 가지지만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믿음이 흔들리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행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놓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 주어져도 점과 흠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점과 흠을 내놓는 우리를 인도하여 자신이 목적하신 바를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신다는 믿음의 내용에 근거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말씀이 주어지지만 여전히 점과 흠을 내놓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라반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걱정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힘과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고, 또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더욱 소망을 두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말씀이 진실로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인 줄 알고 그 말씀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에 대하여 이겨내도록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난 뒤 고향으로 갈 결심을 하는데, 우선 자기의 아내 라헬과 레아를 불러 자초지정을 설명합니다. 4절 이하 13절이 그 내용입니다.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야곱은 라반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6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힘을 다하여 라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야곱에게 돌아오는 것은 라반의 속임이었습니다. 라헬을 얻는 과정 속에서도 언니 레아를 먼저 주는 속임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보면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30장에서 품삯을 정하라고 해서 정했지만 자기 유익이 되는 쪽으로 자꾸 바꿔 가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막으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9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라반의 가축을 빼앗아 야곱 자신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행했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3)
이런 야곱의 말에 라헬과 레아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14절에서 16절입니다.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비록 육신의 아버지로 있지만 아버지로부터 분깃이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 딸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신 바를 다 준행하면 우리는 그대로 따라가겠다고 답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저들의 생각이 어떤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세상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의 자식의 것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얼핏 보면 틀리지 않는 말처럼 보이지만 14절과 15절을 근거로 해서 보자면 그렇게 순전한 신앙 의식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속되고 일상적인 태도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저들을 야곱과 함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은 세상적인 시각에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을 얻을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야곱이 받게 될 분깃이나 유산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라반에 대하여는 분명 라헬과 레아가 외국인처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늘에 있는 한 성을 예비해 두심으로 그 성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분명 야곱으로 하여금 번성케 하신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것도 외적이고 물질적인 면에서 번성함을 보여줍니다. 고향으로 가라고 할 때 가나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바가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가나안 땅도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외적이고 물질적인 번성함도 우리의 진성한 소유는 아닙니다. 그것을 약속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고자 하시는 영원한 복락만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변치 않는 복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야곱도 복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복을 주시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까 자신의 수고함이 있지만 그 수고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복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9-10,15-16) 하늘에 있는 성! 약속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고 또한 외적인 번성함도 주셨지만, 구약은 그런 외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을 내다보도록 하시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구약 자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이 그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내용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