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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너 기업 내 두 종류의 직원>의 줄거리:
전문 경영인 기업이 아닌 오너(owmer) 기업의 직원들은 크게 둘로 분류됩니다. 한 부류는 실제 기업의 성과를 좌우하는 직원들입니다. 이들은 업무 처리능력이 뛰어나고 자기 성취욕구가 강한 자들이지요. 또 한 부류는 주된 관심이 오너 자신인 직원들입니다. 소위 오너의 충신들이지요. 언제나 오너의 마음이 과제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오너이신 기업과 같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성취 능력자가 아니라 오직 오너 충신만을 원하십니다.
오너 기업 내 두 종류의 직원
(시편 47:1~9)
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2.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3.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5.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너 기업 내 두 종류의 직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너 기업 내 두 종류의 직원’
‘오너(owner) 기업’이란 전문경영인 기업이 아니라 오너가 직접 경영에 나서는 기업을 의미합니다. 오너 기업에는 두 부류의 직원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기업의 실제 성과를 좌우하는 직원들입니다. 이들은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고 기업을 통한 자기성취 욕구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기업 안에서 일하는 동안 얼마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능력과 함께 소신도 뚜렷하기 때문에 기업의 발전과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오너의 생각에 반하는 생각도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부류로서 오너의 충신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오너의 마음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분들은 전자에 비해 업무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기업이든 오너의 자리는 외롭고 무겁기 때문에 늘 누군가가 자신을 격려하고 위로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신뢰해주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사실상 오너가 마음을 기댈 직원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오너의 마음만을 과제로 삼는 충신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오너를 이용하려는 간신으로 분류되는 자들도 있지만 이러한 자들에 대해서는 배제하기로 합니다. 좋은 쪽으로 분류해서 긍정적으로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오직 성과와 성취가 과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계발과 자기발전을 목표로 합니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언제나 오너의 마음 자체를 과제로 삼으면서 어떻게 하면 오너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회사 자체의 발전도 오너가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지, 충신들에게는 회사의 발전보다 오너 자체가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입니다.
이 세상 전체와 그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내 평생의 삶은 임자가 분명한 오너 기업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오너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오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오너로 계시는 이 세상 전체와 그 안에 있는 ‘나’라는 특정한 기업에 대해 능력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오너를 과제로 삼는 충신을 원하십니다. 오너이신 하나님만의 능력으로도 이 세상 전체와 내 삶이라는 기업의 경영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업들은 오너의 독단과 판단오류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전체와 그 안에 있는 내 삶이라는 기업의 오너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오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이라는 기업의 오너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 생김새와 부모님 삶에서 주어진 모든 환경을 하나님이 결정하셔서 내게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너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과제를 성취하려 하는 직원은 필요치 않으시기에 달갑지도 않습니다. 오너에 신경 쓰기보다 회사 안에서 자기계발과 자기발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직원 또한 달갑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 전체의 발전과 내 삶의 전개는 오너이신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오너 충신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너이신 하나님의 바람은 우리의 관심이 이 세상의 발전이나 성취나 과제에 쏠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오너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 주어지길 바라십니다.
“충신 열 명이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간신 한 명이 나라를 패망으로 이끄는 것이 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하나님께는 간신의 영향력이 미칠 수는 없기 때문에 간신에 의해 망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간신’이란 말씀 드린 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오너를 교활하게 이용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충신들은 오너 자체를 좋아하고 오너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오너가 기뻐하는 일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다가 다윗 왕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뒤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궤는 많은 의식을 거쳐 시온 산에 있는 성막의 지성소 안에 안치되게 됩니다. 오늘 시편은 바로 법궤가 안치될 때에 불렸던 노래입니다.
법궤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존재가 선민의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궤를 지성소 안으로 모셔 들이는 사건을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 이 땅위에서 만방의 왕으로 즉위하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하는 모습을, 이스라엘 선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전체의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시고 즉위하시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으로 불린 노래가 오늘 본문입니다. 앞서 말한 오너 기업의 비유로 말해보자면 온 세상의 오너로서 하나님께서 경영을 시작하시게 되었다는 셈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순간 손뼉 치며 즐거운 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만민들아 너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너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너 충신이 되어서 계속해서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각 민족과 나라가 이제까지는 자신들의 일에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처한 삶에서 최선의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을 과제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는 이가 어느 민족과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삶을 영위하는 본래 목적은 오너 충신이 되는 것임을 떠올리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평생의 과제이고 본분이며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괴로워하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으로 박수치고 즐거운 함성으로 외치라는 것입니다.
앞서 오너 기업 내에는 두 가지 부류의 직원 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기업의 성과와 자기성취를 도모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고, 이 세상의 삶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경영은 오너의 능력만으로 충분하기에 오직 오너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충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이라고 하였습니다. 온 땅에 살고 있는 만민들이 평생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가까이 있는 권력자가 아닙니다. 또는 불행이나 재난 같은 것들도 아닙니다. 오직 세상의 오너 되신 여호와 한 분만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온 땅의 큰 왕이 되심이로다’라고 한 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도 이 세상 오너이신 하나님 밑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큰 왕’이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공의회의 사람들에게 넘겨져,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공의회를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빌라도의 법정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위에 큰 왕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가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예의 신분이 되었어도 자신의 신분에 충실하게 행동하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죄수생활을 할 때에도 그것이 마치 본래 신분인 것처럼 충실한 죄수로 행동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보이며 결국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총리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지하경제를 담당하던 이스라엘의 250만 명의 노예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할 때에도 애굽의 왕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에서 배우자가 무섭게 해도 그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구박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장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나가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회사에서 내보내려 하시는 것이지 사장의 뜻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하나님 외에는 세상에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를 때리시고 해칠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로또에 당첨되어 십억을 받은 사람이 돈을 찾아오면서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을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놓치면 다 놓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너 회사에서 충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너의 신뢰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든지 오너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오너의 충신으로서 그 마음을 낙심하지 않도록 두려워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전부 능력자가 되기를 바라고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내기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너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장은 나라의 우두머리를 두려워하고 돈 벌리는 현장을 제재하려는 세법을 두려워합니다. 사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또 그러한 사장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세우셨습니다.
3~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발밑에 모든 만민을 노예계급으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오너로서 경영하심이 선민들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민과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소유인데 그 중에 하나님께 신경 쓰려는 오너 충신들이 없습니다. 전부 자기 삶에만 신경 쓰며 성공을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너 충신이 될 자들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사용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들만이라도 오너 충신이 된다면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한 경영을 실천해나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 나갈 때에 그곳에는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이가 사장을 두려워하고 승진 못하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감봉을 두려워하고 회사에 적자를 두려워할지언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애굽 땅에 요셉을 보내셔서 총리가 되게 하신 것처럼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오너 되신 하나님의 충신이 됨으로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오직 하나님 마음에 벗어나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노라면 그렇게 오너 충신이 된 나를 통해서 회사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경영이 나타날 것입니다.
내가 있는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사장도 아니고 뛰어난 능력자들의 수완도 아닙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것 같고 나는 그들의 회의에 끼어있지조차 못하지만, 실제로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오너 충신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있기 때문에 회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오너쉽이 나타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나라들을 우리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라는 말씀은 내가 남들의 상전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삼성도 이재용 씨나 이건희 씨의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것이고 LG도 구 씨 가문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오너 충신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지성소에 법궤를 들여놓으며 이 노래를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성소에 법궤를 들여놓듯이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오너 충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가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오너쉽을 나를 통해서 발휘하실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간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말까지 통제하시고 다스리시는 오너쉽을 발휘하십니다.
지성소 안에 법궤를 들여놓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성소의 모양은 곧 우리 마음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 들어옵니다.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존재의 이름이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곧 지성소는 믿음의 대상의 이름을 붙잡는 곳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담으면 지성소 휘장 바깥에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분향단은 추구함 바람 찾음 두드림을 뜻하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무엇을 두드리고 찾고 추구해야 할까요? 마음의 지성소에 들여놓은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이름을 지성소에 들여 놓았다면 우리는 분향단이 뜻하는 바대로 기도로 추구하여 실제로 돈을 갖기를 원합니다. 추구하는 이유는 떡상이 뜻하는 바대로 마음의 배부름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등대가 뜻하는 바대로 밝음인데 선악을 판단하면서 만족을 향해 달려갑니다.
돈을 들여놓았다면 돈을 벌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이고 돈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악이 됩니다. 권력을 들여놓았다면 권력을 쟁취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들을 내편으로 여기고, 나와 권력을 두고 다투는 자들은 대적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마음이 그대로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이 성소의 구조입니다. 법궤에는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은 곧 인격을 뜻합니다. 돈이나 명품은 인격체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신 자라면 등대가 뜻하는 판단도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오는 판단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러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내 마음의 지성소에 붙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의 존재는 하늘에 계시기에 이 세상에는 이름만을 허락하셨습니다. 지성소에 법궤가 들어가듯이 그 이름을 마음이 붙잡으면 하나님의 이름은 마치 엘리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내 마음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해보자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경영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발로 뛰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중에 올라가신다’라는 것은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마음으로 붙잡을 때에, 그 이름이 우리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감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서 지금도 얼마든지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이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올라가신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떤 해석을 보면 오늘 본문을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표 하는 말씀으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습니다만 본문 그대로 논리적 맥락에 의해서 해석하자면 선민들이 하나님의 오너 충신이 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너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이름이 가리키시는 존재가 있는 하늘로 선민의 마음이 올라가게 됩니다. 육신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버린 마음의 빈자리에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방법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선민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방식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다.’라는 것은 곧 마음의 지성소에 돈이든 건강이든 세상의 가치가 들어온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고 수단화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끌고 올라가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상번제이며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세상을 향한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이름에 대한 생각과 관심을 가진 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붙잡을 때에, 부활 승천하신 길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올려 보내진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오너쉽이 내려오셔서 펼쳐 나가시게 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 성취하고 성과를 나타내려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오너 충신으로서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이 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이 땅의 오너로서의 계획을 펼쳐나가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음으로서 그 이름이 엘리베이터가 되어서 내 마음을 하늘로 올려주시고 그러한 오너 충신의 삶의 과제가 진행되는 동안에 하나님의 오너쉽이 이 땅에 펼쳐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