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2막 12장 (6부)
가혹한 인생의 시작이었다.
홍수도 이겨낸 담장도 의미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나 어린나이에 나는 그때 일을 잊지 못한다.
학교수업을 파하고 집에 돌아 오니 집안은 풍지박살 나있었다.
아버님회사가 부도처리 되었다는 것이다.
100여대의 코로나택시를 운영하던 회사가 망했다는 것이었다.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것 같았다.
매일 현찰이 수두룩 들어오던 회사가 망하다니
이해할수가 없었다.
사실 그당시에는 보험이 발달되지 못하여 교통사고 발생시 보험제도가 없다보니 사고 발생때마다 사고합의금조로 돈을 지출해야만 하였다.
그래다 교통사고로 인한 지출이 누적되여 수입을 넘어선 것이다
"운수업"
의
"운수"는
"여객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업"이라 하나,
내가 보기에는 "운수 즉 ,사람 " 운"에 맡겨야 하는 사업인 것이다.
운이 좋은 사람만이 할수 있는 사업.
운이 없는 사람은 실패하는 사업.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알수가 없었다.
학교선생님들도 부러워하던 우리 집이 무너진 것이다.
지은지 2년 밖에 안된 집에서 우리 가족은 나와야 하였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6살의 기수,4살의 기준이,2살의 여동생 현선이를 데리고 우리가족은 집에서 나와 택시회사의 기사숙소로 이사를 가야하였다.
기사숙소는 3~40명이 기거하는 곳이라 매우 컸었다.
그러나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불결한 곳이었다.
수도물이 단수되여 국민학교5학년이던 나는 생활용수를 단돈 10원에 사서 물지게를 지어와야 하였다.
전기불이 단전 되여 호롱불을 키고 생활하게 되였다.
가족의 큰어르신으로 군림하던 아버님 주위의 일가친척과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내가 물지게를 지다니
더럽게 느껴지던 기사들 방에서 우리 가족이 기거하다니.
어린 나는 충격에서 헤아나지 못하였다.
구차한 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 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차고지가 넓은 마당처럼 느껴졌는지 즐거워 하기만 하였다.
그랬다.
이전에 어필한 "남상운", "한길태"의 우리집 방문을 꺼린 이유가 초라하게 변한 우리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내여 그 친구들을 기사방에 기거하는 집으로 데리고 온것이다.
그리고 이야기한 것이다.
"얼마전 아버님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임시로 이곳에 온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친구들은 나를 위로하여 주었다.
그당시가 왜 이리 안 잊어질까?
지금은 어디 사는지도 모를 두친구가 오늘따라 그리운 것은 왜일까?
초라하게 변한 나를 따스하게 대해주던 그친구들의손이 그리워서 그런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