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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제9코스
교동도 다울새길 14.5Km
일시: 2019년1월26일 토요일 맑음
동행: 윤은병 이성우 이일순 조용원
코스
월선포선착장-2.9Km-교동향교-0.5Km-화개사-1.1Km-화개산정상-2.5Km-
대룡시장-3.1Km-남산포-1.0Km-교동읍성-0.5Km-동진포-3.0Km-월선포선
착장
개요
월선포를 출발하여 발길이 닿지 않던 숲길을 따라 가면 국내 최초로 공자상
을 봉안한 교동향교의 고풍스런 솟을삼문이 맞이한 다 목은 이색이 머물렀
던 화개사를 지나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교동섬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고 북
녘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선사시대부터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화
개산을 거쳐 대룡시장을 둘러보면 시간이 멈춘 듯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어제 철원의 한탄강 어름길 트레킹을 하고 쉬지 않고 배낭을 멘다하니 할멈
의 성화로 “쉬라 쉬어라” 했지만 토산회 산행에 지난번에 불참했으니 이번
에는 참가하기로 작정을 했으니 동참하다가 힘들면 도중에 포기하지 하고 5
호선 마포역에서 승차하고 여의도역에서 환승하러 가는데 등 뒤에서 윤 대
감이 불렀다 하여 동행으로 양천향교역 1번 출구로 빠져나기니 이 대장의
愛馬가 보였고 이 대감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정경부인도 웃는
모습을 보였다
월선포구에 도착하니 강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다 행여라도 燕山作風은 아
닌가 의구심이 드는데 월선포구의 사나운 바람은 연산군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 월선포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하정면 창후리 선착장에서 교동을 오가는
배를 타던 교동도의 관문이었다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 다울새길이 시작점
으로 월산포에서 바라보는 교동대교와 강화본도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 燕山作風
연산군이 만든 바람. 조선왕조 최고의 패륜아로 우리에게 알려진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권좌에서 밀려난 후 강화도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의문
스럽게 죽었는데(아마도 누군가가 시해했을 것 이다) 강화도 양사면 창후리
에서 喬棟島(교동도) 호두포로 가는 뱃길 은 약 20여 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뱃길이 몹시 험하다고 한다. 이 뱃길에 부는 바람을 일
컫는 말인데, 이 바람은 교동에서 죽은 연산군이 섬에 오는 사람을 해치고자
일으키는 바람이라고 하여 생겨난 말이다. 뱃전을 때리는 파도는 난간을 뛰
어넘어 갑판 을 적시고, 그때마다 배가 심하게 기우뚱거릴 정도로 바람이 심
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동도에는 연산군을 위해 그가 죽었던 곳에 그의 넋
을 위로하기 위하여 扶芹堂(부근당)이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
다. 지금도 이곳에는 바람이 심하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긴 하나 어찌 죽은
연산군이 바람을 만들어 그곳에 불게 하겠는가. 그곳의 지형이 원래 바람이
불어오는 지형이겠지(출처: 백과사전)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는 교동도에 있고 오늘은 9코스 다을새길을 걷는
데 “다을새”는-
• 다을새
“교동의 명산 화개산에서 바라보는 교동의 모습이 마치 구름위에 뜬 섬
같으며 하늘을 나는 새가 마치 하늘에 닿을 듯 하다.”는 뜻으로 상고시대 교
동의 명칭인 대운도, 達乙新에서 비롯된 달을신의 소리음인 “다을새”로
2009년 강화군 관광개발사업소와 교동사랑회가 교동 나들길 개설계획을 협
의, 계획안을 마련하면서부터이며, '다을새길'이란 명칭이 붙었다
※ 교동부(지금의 인천 강화군 교동면)의 백제시대 이름.→ 교동부
월포리에서 9코스는 좌. 우로 원점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측방
향을 선택하고 교동향교 방향으로 걸었다 실제로 토산회에서는 교동도 나들
이가 두 번째로 첫 번째 때는 좌측방향으로 바닷가를 걸으면서 억새와 환담
을 하였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확틀어서 직진으로 진향하면 산자락으로 들어서고 다시
도로와 접속하였다가 입산하면 완만한 숲속 길로 이어지면서 중간 크기의
소나무들이 빽빽하니 폭신한 낙엽을 밟으면서 20분 정도 도란도란 걸으면
휴식하기 좋은 안양사지가 나왔고 휴식의자도 있어서 물 한 모금씩 나누었
다
• 安養寺址
안양사지는 화개사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될 정도로 그 연혁이 있으
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사역 전체의 규모는 동서 21m, 남북 17m로 사찰
지는 동쪽을 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쪽에는1m 정도의 토탄 축대와 당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샘터와 수풀사이의 낮은 석축이 남아 있다고 강화나들길 안내판에 적혀 있다.
다시 교동향교 방향으로 걸으면 裸木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이 대장이 향
교에다 愛馬를 주차시키고 반대 방향에서 와서 우리와 합류한 다 걷는 길에
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울긋불긋한 나무기둥이 하나 서 있고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어 숲속으로 들어가서 확인하니 공동묘지 설치를 하겠다는 팻말이다
교동향교에 도착하고 향교를 둘러 봤다
• 교동향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위치: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공자상을 모신 최초의 향교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
※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만큼 지금도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유림들 이 모여서 분향을 한다.
공자의 신주와유헌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 유생들이 배움을 익히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등이 있다
• 安珦(1243∼1306)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초명은 裕 본관은 順興 자는 士蘊 호는 晦軒
이다.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를 공부하고 돌아와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널리 제자를 양성하여 그 이후 우리나라에 유학이 크
게 성행하였다.
※ 곡성 도동묘 안향 영정은 소수서원에 모셔진 안향 영정(국보 제111호)을
1660년에 이모한 작품이다.
有感- 安珦
곳곳마다 향과 등불 켜고 모두들 부처에게 기도하고
집집마다 풍물 잡히고 다투어 귀신에게 제사지내네.
오직 몇 칸 집의 공자 사당이 있기는 하지만
뜰에 가득한 가을 풀 쓸쓸하고 사람 그림자 없네.
原文
香燈處處皆祈佛 絲管家家競祀神 惟有數間夫子廟 滿庭秋草寂無人
(大東詩選 卷1)
안향은 영주가 낳은 유학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존경을 받는 다 향교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화개사로 진행한 다 이정목을 살펴보니 월선포구에서 향교까지는 3.9Km 그리고 화개사 까지는 600m로 되어 있다 숲속을 벗어나
절로 통하는 일차선 포장도로로 접속하고 오르막을 걷는 다
• 화개사
고려 때 창건되었으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341년(고려 충혜왕 2
년) 목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이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화개사 경내에서 석모도의 상주산(264m)과 앞 바다가 시원스럽게 잘 보인다. 절을 빠져나오면 방향지시표가 있는데 교동면사무소 (←)방향으로 1.5Km 정상도(↑) 방향으로 1.5Km
文武井 안내판이 나온다. 공터인데 낙엽만이 수북하고 문무정에 대한 전설이 있다
• 文武井
문무정은 본래 동쪽에 문정(文井),서쪽에 무정(武井)이 있어 두 개의 샘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정의 물이 많으면 문관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의 물이
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
너 송가도(지금의 삼산면)까지 비추어 그 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하게 되
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메운 후 진정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에서 이
노승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었다고 하는데, 현재 사당은 남아 있지 않
다. 그리고 문무정이 메워진 후 교동에서는 문관과 무관의 배출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전해온다. [안내문]
등산로를 조금 벗어난 양지바른 묘지에서 쉬려니 이 대감이 간식으로 빵을
배급한 다 월선포구에서는 사나운 바람이 불었는데 화개산 숲속 양지 바른
곳에는 햇볕이 따사롭다 다시 진행하면 된 비알을 직진으로 오르다가 빗겨
서 능선에 오르면 연산군유배지 500m요 화개사부터는 0.75Km를 걸었고 정
상은 0.65Km 남았다는데 경사가 심하고 밧줄이 설치된 곳도 있고 암릉을
넘어야 하고 화개산 봉수대와 암각화 바위가 나온 다
• 華蓋山 烽燧臺
강화군 향토유적 제29호
화개산 봉수대는 화개산과 잇대어 있는 연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
재는 석단만이 남아 있는데, 가로 4.6m, 세로 7.2m이고 잔존 높이는 1.2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쪽으로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어있다.(안내판)
• 청동기 암각화(안내문)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변성화강암의 일종으로 11개의 지그재그형 선각
과 12개의 바위구멍으로 구성되는 비구상형이며, 기원행위의 결과로 남겨진
청동기시대 후기의 암각화로 추정되며, 한반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
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북단인 이곳 화개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다.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신앙과 생활 사상 등 총체적인 선사문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주로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내용이 많다고 한다
암각화 바위를 지나면 삼거리가 있고 곧 화개산 정상으로 정상은 공터로 삼
각점(교동 21) 산불감시초소 조망도 팔각정 그리고 표고 알림은 보통은 돌(石)로 되어 있는데 여기는 나무로 되어 있고 해발 259m 지만 육지의 산들은 입산 들머리 고도가 있지만 섬 산행은 0에서 시작되는 것 같으니 육지의 259m 산 보다 채력 소모가 많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이 대장이 년말(12월)에 걸은 나들길 석모도 19코스의
상주산과 그 언저리를 소상하게 해설한다
• 화개산
높이 259m의 산으로 행정구역상 교동면 고구리와 읍내리로 나뉘어져 있
다 고려시대 목은 이색이 화개산을 전국 8대 명산중 하나로 꼽았으며 산 정
상에서 북쪽으로는 북한 황해도 연백평야 예성강 하구 송악산이 남쪽으로는
서행를 비롯한 석모도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華盖山- 牧隱 李穡
바닷속의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겠네
제사 지낸뒤 한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의 경치는 푸르고 푸르구나.
原文: 海中華盖揷靑天 上有荒祠不記年 奠罷一盃時北望 扶蘇山色轉蒼然
• 牧隱 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韓山 자는 穎叔 호는 牧隱 圃隱 鄭夢周 冶隱 吉再와 함께 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李穀이며 齊賢의 문인이다.
정상에서 잠시 머물면서 교동벌판도 조망하고 양호한 내리막길을 걸으면 성
혈 화개산성 효자묘 연산군유배지 조선시대 한증막등이 있다 길 복판에 성
형(星穴)이 나왔다 넓직한 바위에 구멍(움푹 패인)이 몇 개 있다 안내문을
보자
• 성혈(星穴)바위(안내문)
성혈(알바위)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에 별자
리, 풍요와 다산(多産),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 마을 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행위의 흔적이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이 바위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지점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星穴은 죽서루를 비롯하여 청풍면 물태리와 문막리에도 있는데 함안군 말아
산고분(사적515호) 13호분에는 125개의 성혈이 있다
효자묘 가는 표식이 있으나 들리지 않고 통과하지만 효자묘의 Story는 자료
편으로 넘기면서 화개산성을 지난 다
• 華蓋山城(향토유적 제30호)
내. 외성을 갖춘 산성으로 총길이 2096m에 이르는 포곡식산서이다 적이
침입시 벙어를 위한 병력 집결지로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적으
도조선 세종 이전에 축조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약수터를 지나고 연산군유배지는 갈림길이 나왔는데 나들길 코스에서는 조
금 벗어나(50m) 있지만 지척으로 보인 다 동행들과 의견이 갈렷지만 유배지
를 선택하여 조선시대 한증막은 볼 수 없었다
• 연산군 유배지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1506년9월2일 교동으로 폐위되어 그해 11월6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유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 왔을 때는 페허가 되어가는 초라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화려(?)
하게 복원되어 연산군문학관도 있고 밀랍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하였는데 연
산군이 식사하는 모습의 초라한 밥상도 있고 함거로 호송하는 모습도 있다
연산군 유배지 뜰에서 서성거리려니 문득 전미경 가수가 부른 “장녹수” 가
요가 떠 오른 다
장녹수-전미경
가는세월 바람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담아 가는곳이 어디메냐
구중궁궐 처마끝에 한맺힌 매듭엮어
눈물강 건너서 높은뜻 걸었더니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곳 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한조각 구름따라 떠도는 저 달님아
한많은 사연담아 네 숨은곳 어디메냐
곤룡포 한자락에 구곡간장 애태우며
안개강 건너서 높은뜻 키웠더니
부귀도 영화도 꿈인양 간곳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연산군 밀랍을 보면서 “부귀도 영화도 꿈인양 간곳없이” 함거에 실려 위리
안치 되는 죄인이 되었지만 한 때는 금수저로 살았으니 어쩔 것이여라~
나는 이번으로 교동도 나들이는 4번째로 첫 번째는 꽃순이랑 동행이었는데
그 때는 창후리에서 배를 타고 월선포구에 내려서 나는 화개산을 넘고 꽃순이는 교동면사무소에서 영감을 기다려야 했고 다시 만나서 월선포구로 걸어
가면서 딸기가 눈에 들면 딸기도 따 주었었다
연산군문학관을 한 바퀴 휑하니 둘러 봤는데 연산군이 남긴 詩는-
바람 이는 강에 물결 타고 건너기 좋아마오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
인생은 풀잎의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다폐위되기 2달 전에 쓴 시라고 한다. 신봉승 편저(詩人 燕山君』(선, 2002)
雨中風色政和寬: 비속의 바람결이 고루고 훈훈하여
爛香桃李媚春山: 향긋한 복숭아와 오얏 꽃은 봄 산에서 아양 떠네
銀臺必有慈親老: 은대에는 반드시 늙은 부모 모신이 있으리니
進取花時可奉歡: 꽃 핀 때 이 시절에 즐거움 드리게 하라
※ 이 시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12년 되던 해에 지은 詩로 6살 때 사별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다. 연산군은 수많은 시를 남겼으나, 폐위 때 거의 다 태워 없애고 125편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 108편이 집권말기 3년 동안에 쓴 것이고 묘지는 서울둘레길을 걷다보면 방학동에 있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번뇌와 고독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교동면사무소로 걸으면서 환담하는데 윤 대감이 무릅 통증에는 들깨기름이 좋다고 하면서 간증할 사람도 있고 자기도 좋아졌다고 들깨기름을 권유하는데 나도 솔깃하게 들렸는데 윤 대감은 8학년2반으로 아직도 북한산 백운대 오르기를 “북한산 백운대 쯤이야” 라고 웃는데 면사무소 앞에 이 대장의 愛馬(승용차)가 기다리고 있다
대룡시장 앞으로 가서 수진네 집을 찾아가니 페점이 되었고 다른 음식점을
찾아들어 깨칼국수를 주문했고 식사 후 대룡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 대룡시장
시장은 6.25 때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주민들이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
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 따 만든 골목시장이다. 대룡시장은 50여 년간 교
동도 경제 발전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실향민 어르신들이 대부분 돌아가시
고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시장의 규모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2014년 7월 교동대교의 개통과 함께 1980년대 영화 세트장 같은 대룡시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안내문)
牧隱 李穡 先生은 교동에 머무르면서 시를 남겼는데 알아보면-
바닷길 나가는 예성강 나루터에서 멀리 바다를 보니 끝이 없고 푸른 하늘도 내려와 푸른 바다와 맞닿았네.
돛단배를 타고 빨리 왔건만 벌써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는구나.
교동 화개산 아래 마을에서는 주막집마다 맑은 술(소주)을 거르네.
팔를 썰고 회(아마도 생선회)를 떠서 잘 먹고나니 졸리워 닭들도 회를 치고 잠드는 저녁이 되길 기다리네.
原文
海門無際碧天低 帆影飛來日在西 山下家家蒭白酒 斷蔥斫膾欲鷄棲
牧隱集 제7권 詩
또
喬桐에서의 놀이를 기록하다. 漁父가 잘 먹여주었다는 詩는-
정오에 조수가 들어올 즈음 흐렸던 날씨가 개니,
개성 벽란정 나루터에서 배가 출발하네.
경원전 아래에서는 바람이 순조럽더니,
교동 화개산에 이르니 해가 지네.
화개산 시승(詩僧)이 늘 짝이 되어주니 기뻤는데,
어부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니 더욱 즐거웠다.
지금은 눈이 흐려졌지만 지난 추억을 떠올리니,
옛날 화개산에서 낮에 못 읽은 책을 밤에 보는데
어느덧 달빛은 소나무 숲을 환히 비추었더라.
原文
正午潮廻散薄陰 扁舟一放碧江潯 慶源殿下風初順 華蓋山前日欲沈
已喜詩僧長作伴 況逢漁父似知音 祇今眼病頻追悔 夜讀殘書月滿林
대룡시장을 한 바퀴 돌고 이 대장이 애마를 끌고 다니면서 안내하느라고 피곤하다하여 잠간 쉬어야하겠다기에 나는 다음번에 걸어야 할 10코스 자료를 살펴봤는데 나들길로 선정되기 전에 修井山 산행으로 평생 산행 동지 김 총무와 원 사장과 스치면서 가을에 다시 와서 교동평야의 황금벌판을 보자고 언약 했지만 아직도 그 꿈은 못 이루고 있지만 언제인가는 황금벌판을 보게 될 것이다
강화나들길 9코스는 월산포구에서 시작하여 월산포구로 원점회귀하야야 하지만 토산회에서는 남산포구에서 대룡시장 까지는 이미 걸어 봤기에 오늘은 대룡시장 앞에서 트레깅을 접었다
대룡시장
교동도 전통시장
주말이면
길손들이
바글바글하고
호떡은 꿀 맛
정경부인이
동행들에게
맛보 란 다
옛날
모습 살피면서
한 바퀴 도는 우리들은
월선포구에서
사나운 바닷바람에
몸 추스르고
교동향교
화개사 둘러보고
화개산을 넘어왔고
연산군 유배지에서
“부귀도
영화도
꿈인양 간 곳 없고”
草路人生
서글프다
2019년1월26일 토요일
• 2010년7월8일 목요일에 할멈과 교동도 나들이 기록중에서
월선포구 앞
바다에는
연산군이
죽어서도
심술을 부린다는
燕山作風에
뱃머리 흔들 흔들
고희에
섬중에 섬
외로운 섬
교동도를
할멈과 손잡고
갯벌의
갈매기들과 벗하고
한 잔 술 나누는
나들이 길
평온함을
바닷바람이 실어 간 다
면사무소에서
월선선착장 까지
할멈과 동행으로
걷고 걸었더니
할멈은
다리가 “아프다-아프다”
아~
우리도 늙었구려 2010년7월8일 목요일
자료 1
※ 평화의 섬 교동도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면적 47.14㎢, 동서길이 10㎞, 남북길이 6㎞로 동
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
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
다.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이며 고려 ․ 조선 왕족들의 유배지 그
리고 조선 중기엔 경기 ․ 황해 ․ 충청 삼도 수군을 담당하는 삼도수군통어영
이 설치됐던 중요 섬이다.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
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
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
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
렸다.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
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華蓋山, 260m)으
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
(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
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
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자료 2
교동도 명승지는 <교동군읍지>(1899년)에 남겨져 있는 작자미상의 시문인 喬桐八景에 잘 담겨져 있고 신 팔경도 있다
喬桐八景
東津送客: 동진에서 손님을 전송
北門觀稼: 북문에서 농사 살핌
鷹巖賞月: 응암에서 달구경
龍井探花: 용정에서 꽃을 찾음
遠浦稅帆: 먼 포구의 세곡선
孤菴禪鍾: 외로운 암자의 종소리
黍島漁燈: 서도의 고기잡이 등불
鎭山夕烽: 진산의 저녁 봉화
• 신 교동팔경
제1경: 華菴曉鐘
읍내리에서 가까운 화개암에서 새벽에 은은히 들리는 종소리. (새벽에 울려퍼지는 화개사의 은은한 종소리)
먼 하늘의 새벽 빛은 아지랑이 궤뚫고
흩어진 별들은 하나 둘 사라지네
바람이 들려오는 종소리는 어디서 풀리는고
화개산 남쪽의 적은 가람(절)이겠지
제2경: 濱장暮帆
빈장산 남쪽의 석양에 돌아오는 범선들.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고기잡이 배들이 포구로 돌아오는 광경)
빈장산 밖은 하늘에 닿고
해저문 배는 개미같이 나부끼네
가득실은 고깃배는 서주로 갔건만
올 때 얻은 것은 돈 주머니 반밖에 안되네
제3경: 蠶頭牧笛
잠두산의 목동들이 봄, 여름 석양에 부는 피리소리. (율두산 누에머리 목장에서 목동들의 피리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백마는 타지 않고 황소를 타고서
붉은 수탉은 노래 않고 백구만 노래하네
매화 관색곡만 부르지 마소
태평속에서도 전쟁의 수심이 있다네제
4경: 末灘漁火
서쪽 해안의 말탄포에 모여든 어선들의 불빛. (새우잡이 배들이 모여 밤이되면 불밝힌 광경이 장관임)
섬의 밤바람은 차기도 해라
별 같은 물들이 빨갛게 바다를 물 들였네
조수에 노저어 사람의 말소리 일어나니
제5경: 水晶落照
수정산 서쪽의 망망대해로 떨어지는 해 (수정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천하일품임)
금빛 물결은 수정산 봉우리에 넘실거리고
바다는 온통 지는 햇빛으로 붉게 물들었네
덧 없는 인생은 늙은 빛이 감도네
두 눈덩이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지노라
제6경: 虎浦齊月
강화도의 인화 곶과 마주하는 호두포의 청명한 달 밤에 떼 지어 나 는 기러기와 해면을 비치는 달 빛. (달밝은 밤에 밤기러기 떼지어 날아가고 해변에 비치는 달빛은 수면 에 유리를 갈아 놓은듯)구름 없
는 푸른 하늘엔 기러기떼 흘러가고
동녘에 밝은 달은 가을에 어울려
언덕에 계집아이들은 강남노래 부르고
나루터 손님들은 주막에서 떠드네
제7경: 仁山觀漲
인사리 뒷산인 인산에서 보는 인사리 일대가 물에 잠기는 만조의 장관 (조수가 끓어올라 제방을 넘을 듯 넘실거리는 모습이 장관임)
갈대꽃 핀 들판에 가는철 조수가 묻어나고
그 일대의 섬들은 계표를 알 수 없네
전시의 어시장은 앉아서 열리고
어선은 어느새 제삼교로 가버렸네
보뚝 북쪽과 방주 북쪽은 물에 넘실거리니
봄철의 조수는 야외를 잠그도다
멀리 십리 밖에 나무는 물에 잠기고
경원천 밝은 해가 저물어 안개만이 자욱하구나
제8경: 鎭望納凉
읍내리의 남산의 옛 이름은 진망산이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여름 날 시원한 바람과 함게 산림욕이 좋았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 좋음 (읍내리 남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소나무 그늘에서 바다를 내다보 며 즐기는 피서는 천하일품이리)
성남의 산색은 울창하고
온산의 소나무 덥힌 그늘은 서늘한 피서에 좋구나
동산에 맑은 바람 시원히 불어오니
공지에 오른 유객은 선향을 바라보네
● 화개암화개산 화개암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람고 에도 안양사는 빠져있는데 1799년에 나온 범우고에는 화엄사와 안양사 모두 화개산의 절이지만 안양사는 폐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8세기 중반 경에 안양사는 폐허되고 화엄사가 화개산의 유일한 사찰로 유지되었고 한때 화엄사는 화개산 북쪽으로 옮겨져 재운암 載雲庵 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1842년 나온 교동부읍지에는 화엄사가 화개산 남쪽에 있다고 기록이 다시보여 화엄사는 오래지 않아 화개산 남쪽으로 되돌아온것으로 생각되지만 1871년 나온 교동부읍지에는 화엄사를 스님 한사람이 홀로 지키고 있다 했으니 겨우 명맥만 유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 3
• 孝子墓 Story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그 시절 병환중인 홀아버지를 모시고 청주골에서 살았던 효성이 지극한 신씨라는 젊은이가 아버지의 공양식 제공을 댓가로 교동현의 군사로 징발된 부유한 집의 자제 대신 화개산성에 모병되어 종사하게 되자 그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에 노심초사하여 고목근현(현재의 고읍마을)으로 이사하여 아들과의 약속을 삶의 목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 약속은 아들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있다면 산성의 북루(北樓)에 해가 지기 전 하얀 적삼을 누대에 달아 아들의 생존을 어버이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었다 한다.
그 시절에는 봉화나 수기 신호로 아군이나 내륙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던 때라 어느 날 이를 수상히 여긴 수장이 적삼 수기를 못 달게 하였으므로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상심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아들을 취조 하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수장이 그 어버이의 시신을 산성 내에 안장하고 삼년시묘를 허락하여 종사하게 함은 물론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수장과 병졸의 아침묘소 참배를 생활화하여 참배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효(孝)의 근본(根本)으로 그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안내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