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공주로 나들이를 갔다
역시 공산성으로 갔다 원래는 산성시장이 많이 바뀌었다 해서 제민천길을 걸으며 시장구경을 할까 했는데 날씨가 생각보다 더워 산으로 가게 되었다
남도에서 한양가는 길목에 위치한 공주, 비단 같은 금강을 끼고 있어 상당히 인기있던 고장이다
우리는 진남루로 올랐다
어릴 적 진남루는 시내버스 정류장과 가까워 버스를 타고 소풍을 오면 가장 가까운 이 진남루로 항상 공산성에 올랐다
공주가 역사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백제의 웅진천도가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백제의 한성(漢城)이 점령당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되자 왕제 상좌평(上佐平) 여도(餘都)가 즉위해 문주왕(文周王)이 되었는데, 문주왕은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의 도움으로 도읍을 웅천(熊川) 즉 공주(公州)로 옮기고 고구려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주변에 많은 산성을 쌓았다.
이어 삼근왕,동성왕,무령왕, 성왕까지 5대 64년간 백제도읍지로 이어온다
국력을 회복한 성왕(聖王)은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고립되고 협소한 공주를 떠나 평야지대인 사비(泗沘)로 천도하면서 공주는 옛 도읍으로 북쪽을 지키는 북방이 된다
그후 한때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를 공격하자 의자왕(義慈王)은 왕자 부여융(夫餘隆)과 웅진으로 피난했다가 항복하였다(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점령한 당은 공주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군병을 주둔시켰으나 당장 소정방이 의자왕과 백제의 왕족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감으로써 폐지되었다.
우리는 먼저 영은사를 찾았다 현장체험학습을 하는지 한 무리 초등학생들이 엄마들과 함께 올라오며 힘든지 혀를 내민다
우리 오정위 선조와 관련되어서이다 오정위 선조 묘지명 내용이다
신축년(辛丑年, 1661년 현종 2년)에 충청 방백(忠淸方伯)을 배수(拜受)하니, 공은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물을 대는 데에 나아가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물이 흐르지 않고 흥건하게 괴어 있는 것을 소통(疏通)하게 하여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기에 넉넉하게 하였다.
이에 도내의 폐지된 방죽을 모두 백여 구(區)를 수치(修治)하여 밭에 물을 대니 모두 수백만 이랑이 되어, 호서의 백성이 크게 믿고 의지하였다.
공산(公山)에는 옛적에 성(城)이 금강(錦江)을 임하여 있어 충청 우도(忠淸右道)의 관방(關防)이 되었거늘, 공이 이를 위하여 다시 고쳐 건축하고 두 절을 세워 무기를 저장하고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관리하고 수호하게 하니, 무릇 구획(區劃)하는 것이 모두 질서와 조리가 정연하여 본받을 만하였다.
요약하면 외할아버지 유근에 이어 60년 만에 부임하니 유근이 대대적으로 개축한 성이 헐어있어 역시 부분 개축하고 공북루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영은사에서는 할아버지인 만취 오억령의 문집 만취집을 발간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 서인들에게 정치적 출척을 받아 후기 그들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니 이러한 사실들은 별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
쌍수정이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쉬었다 하여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지금은 앞뜰에서 백제의 궁궐터를 발굴하느라 과거의 한적함이 없이 번잡하다
금서루로 이동했다
이 공산성에 올라 공주 시내에 고함을 치면 시내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겠다 할 정도로 공주읍내는 작아보인다
서문은 본래 유지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문루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문루의 복원이 이루어져 있다.
처음엔 이 금서루 고개만 넘으면 성안 마을이 보였다
언젠가 이 성안 마을에서 어떤 치매걸린 노파가 자신의 손자를 닭으로 오인해 삶아 먹었다는 소문이 퍼져 경악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 심심한 백성들 중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는 어떤 인간 말종이 만들어 퍼뜨린 이야기인 것 같다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면서 성의 입구를 개구식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상태인데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공산성 입구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
금서루 앞에는 그동안 공주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전시한 비석군이 있다
제민천과 관련된 비석이다
1817년 홍수로 제민천교가 범람하자 모두 힘을 합쳐 재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 외에 조선말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이씨, 풍양 조씨, 심씨 등 관련 비석이 대부분이다 사진은 그나마 알아볼만한 인물 정태화의 선정비이다
이 비석군과 다르게 반대편에 또 다른 비석 3개가 있는데 내가 오늘 찾은 이유 중 하나가 이 비석을 조우하고 싶어서였다
바로 독립운동가 오동진의 비석이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 후 만주 관뎬 현으로 망명해 광제청년단을 조직했다. 1919년 단둥 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해 교육부원으로 중국 동삼성과 국내를 왕래하며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2월 대한청년단연합회·한족회·대한독립단 등의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산하단체인 광복군사령부가 조직되자 제2영장으로 활동했다.
1929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경성형무소와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죽었다.
라고 일반 역사에선 말한다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3대 맹장은 일송 김동삼, 백야 김좌진, 송암 오동진이다
그런데 백야는 모두 다 아는 인물인데 송암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바로 김일성을 길러낸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이다
반공이라는 왜곡된 이념 갈등이 빚은 비극의 역사교육으로 한 방향을 우선시하는 국가가 독점한 역사교육에서 어느 사실은 숨겨야만 하는 치졸함 때문에 이런 아픔을 존재하게 한다
1944년 공주형무소에서 죽은 위인을 1929년 죽었다고 조작해 전하는 역사, 누구를 위한 사실이고 누구를 위한 숨김이던가?
옆엔 무이재 오강표 기적비가 있고
또 그 옆엔 노숙 의적비가 있다
이 과거 친일파 정부에서는 이 노숙 의적비만이 의미가 있는 비석인 것 같다
다시 금서루로 올라 나머지 산성을 돌았다
한창 백제문화재 준비를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다
언제 올라 보아도 시원하게 펼쳐진 금강과 철교이다
이 철교를 만들어주고 일제는 철도를 대전으로 틀어 공주의 조그만 부속 현에 불과했던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이 모여 현재의 130만 인구 대전광역시가 된 것이다
공주시는 이제 채 10만도 되지 않는 도시로 5만도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있단다
이 전망대를 뒤로하고 공북루는 들르지 않은채 진남루로 내려왔다
선조 저암공 오상유의 한시를 잠깐 첨부한다
登拱北樓(공주 공산성 拱北樓에 오르다)
대 낮에 볕이 강하여 늦게나마 樓閣에 올랐어라
높은 欄干 百尺이나 되는 듯 맑은 가을에 우뚝 서 있네
산에 기대선 짧은 빗돌에는 지나간 자취들이 묻어나 있고
재넘어 흰 구름은 길손의 愁心을 자아내는도다
절은 어느 곳 바위 아래에 있는지 이따금 인경소리만 들리고
성문은 勝地에 서 있으니 大江이 흐르는 구비가 다 보인다
세상에서 나처럼 이런 취미를 얻는다는 것이 어렵다하지만
백사장 모래 갈매기의 한가로움을 본받아 물 자맥질하며 노니는게 어떠랴
欲避午陽登晩樓 危欄百尺獨淸秋 依山短碣留前蹟 鬲嶺白雲生客愁
寺在何岩踈磬到 城臨勝地大江流 世間難得同吾趣 沙有閑鴗載泳游
내려오는 길 이제는 공주하면 떠오르는 인물 박찬호길이 있다
또 김구 선생과 관련된 광복루도 홍보되어 있고 베버와의 인연도 공산성에 오르면 느껴진다
공산성을 나와 산성시장에서 쇠고기무국으로 점심을 먹고 떡과 꽈배기 등 군것질을 한 뒤 오랜만에 모교에 해당하는 두 학교 사대부고 정문에 복원시킨 공주 옛동헌 문루와 교대 분위기도 느껴본 후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