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들이 공장을 돌릴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는
부탁과
포항제철의 철학 '우향우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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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전의 영일만 부지
연수를 마치고 귀사 한 그 이튿날 박사장(박태준회장, 당시는 사장)님께
직접 연수보고를 드렸다. 사장님은 ‘나도 연수를 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너희가 보고하는 것을 들으면서 배운다’며 늦은 밤까지 모든 연수보고서를 팀별로 직접 받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바쁜 시간에 대단한 집념이었다.
회사도 연수를 떠날 때는 허허 모래 벌판에 기둥이 한두
개 서있었는데 벌써 후판공장은 형체가 들어서고 열연공장은 콘크리트 타설 중이었다. 조직도 바뀌어 정비를
담당하는 공작정비본부가 설립되었다.
귀국 후 블루칼라들은 전부 현장 계장설비 감독으로 파견하고
화이트 칼라들은 도면을 체크하고 현장 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조금 한가한 시간이 이어졌다. 기회랍시고 계장에 관해 사온 책들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다.
갑자기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군대에서나 들어 봄 직한 소리였다. 열연공장 콘크리트 타설(打設)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공기가 지연되었다며 회사는 비상체재로 들어갔다. 주간에는 공사감독이 주관하고 야간에는 간부에 팀장을 합쳐 2명이 꼬박 밤을 세우며
타설량을 측정했다.
야간 콘크리트 타설 감독을 함께 하신 분은 조선항공학과
1년선배였다. 전국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조선공사 출신으로 전직경력을 100% 인정받아
과장보직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기업경력은 무조건 70%밖에
인정하지 않아 한두 해 선배들조차 공기업이나 동종철강제조업 출신들과는 달리 팀장을 받는다며 사기업 출신들이 손해를 많이 본다고 했다. 국영기업이라 사규는 엄격했다. 회사에서 필요해서 스카우트하는 분들께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서울본사에서 직급을 정해 갖고 와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세상을 모르고 가서 최선을 다하면 인정받겠지 하는 나만의 사고는 통하지 않았다. 무조건 오라고만 했지 직급은 인사부서의 고유권한으로 사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밤새 둘이서 이런 저런 인생사를 이야기하면서 임무를
완수하고 독신료로 돌아와서 아침도 먹지 않은 채 피곤해서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얼마를 잤는지도 모르겠다. 룸메이트인 안전팀장이 두끼를 굶으면 안된다며 식사후 다시 자라고 깨어주었다. 그는 공군 영관급장교 출신으로 회사의 안전 팀장이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드니 룸메이트의 안전을 지키는 것도 자기 의무라며 웃으시었다. 사기업은 야근을 해도 꼬박 밤을 새우는 일은 없었는데 조직이 크다 보니 개인적인 행동은 제한 받아 순응할 수밖에
없지만 어머님 말씀대로 사서 고생하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후 특수조직이라며 연수원 강당에 여러사람들이 모였다. 사장님이 주관하시는 회의였다.
사장님은 ‘고로를
보고 저게 뭐냐고 묻는 사람’과 ‘3상전기는 전선줄이 세
줄인데 단상전기는 왜 한 줄이 아니고 두줄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무얼 어떻게 가르쳐야 되냐’고 일본철강협력부서에서
항의를 받았을 때 하늘이 노랗게 보이더라며 기가 찼다는 것이다. 그날은 아무 말도 못하고 며칠 밤새
생각하신 게 ‘그런 사람들이 돌아와서 포항제철을 돌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다’는 서찰과 함께 연수를 시키는 실무 작업장(作業長, Meister, 현장작업팀 중 최고 숙련공)들에게 경주 법주 한
병씩을 선물로 보내며 부탁했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니혼꼬깐에서 후쿠야마에서 돌아와서는 거의 연수범위의
제한을 받지 않은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그때 지나가는 말로 현장에서 사장에게서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우리 사장님이리라 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장님은 ‘우리의
수준은 아직 일본에 비하면 그런 수준이고 뒤로 들리는 이야기로는 결국은 포항제철도 브라질처럼 가동이 안될 거라며 쑥덕거린다’고들 했다.
‘우리는 여기에 흔들리지 말고 지금부터 포항제철이 공장을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우리 설비에 맞는 작업표준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성공여부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모든 일에 우선해서 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대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사내외를 막론하고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명칭도 없다고 하셨다. 심지어 포항제철이 고용한 일본 퇴임 기술자인 JG(Japan Group)요원들에게도
기밀이었다. 그들도 일본 사람이고 일본의 자료가 빠져나오는 것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역할은 설비공급사가 도면대로 건설되는가를 체크할 뿐이다.
실제 우리가 연수를 하고 수집한 기술자료나 도면들은
모두 20세기 초반에 건설한 폐기운명에 처해있는 일본제철소의 것이고 연수 보고서 또한 그런 설비를 배워서 작성한 것이다. 그러니 새로 건설하는 우리 설비와는 달라서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방법은 영어로 공급되는 우리 설비의 매뉴얼에 맞추어 연수자료와 비교하며 우리 작업자가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새로 포항제철만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조상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바탕으로 건설하는 단군이래 최대공사를 하고 있다. 만에 하나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직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일만에서 우향우 해서 직진하면 동해바다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포항제철을 지배한 정신적인 모토(Motto)로
‘우향우 정신’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포항제철의 철학이었다.
그날부터 크게 세팀으로 나누어서 일했다. 조업팀은 공정별로 연수자료를 펴 놓고 작업단위를 분임토의 형식으로 들어갔다.
철광석과 석탄이 수입항에 도착해서부터 마지막 열연제품이 나올 때까지의 공정에 따라 연수일지를 기준으로 단위 작업을 설정해 나갔다. 그 사이 지원팀은 두그룹으로 나뉘어 설비공급사가 공급한 영문매뉴얼을 번역하고 또 한 그룹은 연수 중 수집된
자료를 분석해서 전담부서가 설정한 단위작업과 비교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기초작업을 시작했다.
인해전술을 쓰다시피 거의 천명이 넘게 연수를 다녀왔고
당시도 진행되고 있었지만 각팀에서 이래저래 수집한 자료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 중에서 얼마나 우리에게
요긴하게 쓰이는지는 지금부터 정리하는 결과에 따라 판정 날것이다. 연수를 떠날 때 언어소통도 잘 안되니
자료가 보이면 무조건 복사를 하라고 했던 탓으로 갖가지 자료들이 섞여 있었다. 어떤 팀은 자료와 도면을
갖고 나와 시내 문구점에서 복사를 했는데 얼마 안되어 주인이 한국사람들이 자료를 복사한다고 일본회사에 신고해서 회사의 단속이 더 심해지고 복사도
할 수 없어 결국 프린트기를 하나 사서 호텔에서 야간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쓰고 복사를 했다고도 했다.
거의 무조건 복사를 하다 보니 솔직히 그들이 보던 자료 중에 끼여 있던 전자제품 선전지도 복사되어 웃을 수밖에 없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구한 도면과 자료들을 우리 설비에 응용해서 사용할 만한 자료를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신설하는 포항설비는 그들 제철소와 모양도 크기도 달랐다. 조로(操爐) 운전조작반의
조작스위치의 위치도 다르고 모양새도 달랐다. 그들은 주로 레버식을 썼지만 새로운 설비는 버턴식이 많았다. 버턴식은 편하지만 자칫 하다가는 옆에 있는 다른 스위치 버턴을 건드릴 수가 있어 걱정스러운 점도 있었다.
설비공급사에서 기계장치별로 개략적인 도면은 공급되지만
상세도면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도면과 자료에 의해 설비를 알아볼 수있어서 아주 중요했다.
3-4개월이 지났을 무렵 분류작업이 끝나고 매뉴얼에 의한
우리 설비의 모형을 합판으로 만들어 조로(操爐) 연수자들의 모의 훈련을 겸해가며 한글로 된 작업표준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분야별로 조업연수자들의 연수보고서가 주가 되어 영어로 제시된 각종설비의 매뉴얼에 몰래 갖고온 기술자료들은
종합해서 그들의 의견을 다시 듣고 초안을 만들고 모의 운전을 하고 또 수정하고 했다.
연수는 유사설비로
작업하는 방법만 가르쳤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몰래 복사한 기술자료는
이런 게 숨어있었다. 다만 그게 부분적이어서 그 공백도 함께 메꾸어 나가야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설비는 돈 받고 팔았고 작업하는 연습만 견학시켜주었지 그 논리는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공병우 타자기 밖에 없어 여직원들을
불러서 매일 타자를 치고 또 그것을 수시로 모의 훈련을 하며 검토해서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우리들
만의 작업표준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모형으로 만든 조작반에 조작 보턴과 램프표시를
하고 각 현장마다 단위작업별로 실습하도록 했다. 조업팀이 한 사람씩 모의 조작판의 스위치를 작동하게 하는 속칭 모의
훈련이었다. 그러면서 참관자들은 연수할 때의 광경을 되새기며 훈련을 했고 가끔 사장님께서도 현지에 나와
독려를 하셨다. 아마 일본사람들도 연수훈련을 되새기는 걸로 알고 있었을 거다.
이 자료는 준공 후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말 그들은 당시 한국도 브라질처럼 제철소를 못 돌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브라질은 당시 한국보다 기술이 월등했는데도 제철소를 준공하고도 죽을 쓰고 있을 때였는데 그 보다 후진국인 한국이
제철소를 돌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