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제목: 신의 길, 인간의 길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https://youtu.be/oWd98qBfS-k
최근에 저는 날줄과 씨줄의 이미지를 설교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를 짤 때 바탕이 되는 기다란 줄이 날줄이라면, 그 날줄에 한올 한올 엮여서 천을 만들게 되는 씨줄이 있습니다. 제가 설교에서 비유하는 것은 날줄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씨줄은 그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날줄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면 씨줄은 그 경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그곳에 바치는 사람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날줄과 그 경륜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어떤 점에서 성경의 인물들은 자신의 삶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그림이 될 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독자로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이 경륜에 어떻게 동참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죽을 때 아들 이삭과 손자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잇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 약속을 동참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다윗의 왕위는 끊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강대국에게 점령당하고 그 왕과 지도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다윗의 왕위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왕이 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곧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말은 곧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신다는 의미이며 앞으로 영원한 왕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마스터플랜에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어떤 의미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지는 생전에 알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먼 훗날에 비로소 우리가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톰 라이트는 석공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서양에는 돌로 만든 거대하고 멋진 예배당들이 많습니다. 그 예배당의 건물에는 수많은 조각품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성당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건축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필요한 자재를 모아 일꾼들에게 각각 업무를 분배할 것입니다. 특히 건물의 외관에 사용할 돌로 된 조각품들은 그 크기가 커서 더 작은 크기로 나뉘어 제작됩니다. 그때 석공들은 자신이 만들 물건의 그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 석공은 아직 전체 그림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들 모형의 그림과 크기를 알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가 작업을 마치고 건물이 완공되면 자신이 만든 조각품이 어디에서 어떤 장면을 이루는지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전체적인 의미를 깨닫고 감탄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톰 라이트는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날 우리가 애쓰며 돌보고 수고한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받을 상급 중에 일부는 우리가 수고한 일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그 빛나는 세상의 일부가 되었음을 발견할 때 느끼게 될 만족과 보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날줄과 씨줄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신자로서 우리의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하여 날줄과 씨줄이 만들어내는 한폭의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설계자는 하나님이시며 그 설계도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 경륜에 동참하라고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며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면 날줄에 동참하는 씨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한한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에 맞물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은 영원성을 갖게 되며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더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제가 날줄과 씨줄의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려는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씨줄은 날줄이 얼마나 긴지를 모르며 또한 그 날줄과 씨줄의 결합으로 생기게 되는 천이 어떤 무늬를 만들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서 정해진 순서에 맞게 씨줄로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답답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 답답함은 자기가 왜 지금 여기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 다른 일이 벌어질 경우에 생깁니다.
그런 경우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탄식이 시편에 나오는 다음의 고백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사실 하나님 앞에서 살아는 모든 인간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탄식하셨습니다. 그 탄식은 고통의 순간에 나오는 것이며 그 고통 중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다 알 수 없기에 때로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생깁니다. 나의 수고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합니다. ‘오실 그 분이 당신 맞습니까?’ 그는 지금 옥에 갇혀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런 상황 가운데 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표준새번역성경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신자로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는 그저 잘 모르는 길을 앞 못 보는 사람처럼 걸어갈 뿐일까요?
최근에 저는 스무살 때 드린 기도를 마음 속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무살 때 대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는 강습회에 갔다가 열정적인 목사님들의 강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87학번인 제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생활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열정을 쏟아주신 목사님들 덕분입니다. 그렇게 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1987년에 저는 어린이전도에 열심을 냈습니다.
저는 당시에 성수동에 살았는데 교회 옆에 경일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저는 교문 앞에서 어린이들을 만나서 전도를 했는데 그때 학교에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학교 앞에서 그렇게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앞에서 전도하는 것이 금지되지만 그때는 그렇게 했습니다. 어린이 전도에 열심을 내던 저는 어느 날 헌금 시간에 봉투에 저의 소원을 적어서 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봉투에 적힌 감사제목이나 기도를 읽어 주셨는데 웬일인지 그 날 예배 시간에 제가 드린 헌금봉투에 적힌 기도문은 읽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적은 기도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경일초등학교를 저에게 주십시요.’ 영국의 부흥사 요한 웨슬레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표어를 내걸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스무살 교회학교 교사는 그런 거창한 꿈이 아니라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문은 담임목사님에게는 황당한 것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에는 간절하고 진실된 기도의 소원이었습니다.
그 일은 다른 섭섭한 일들과 함께 제 마음 속 한 구석으로 밀려나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5년이 지났습니다. 저의 셋째 딸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서울 중랑구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의 상담교사입니다. 정식으로 교원임용고사에 합격하고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담해 주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를 보내면서 문득 35년 전에 제가 헌금봉투에 적어서 올린 기도문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사님은 외면하셨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감사했습니다.
그 딸은 저에게 아픈 손가락입니다. 어린시절부터 제가 예배드릴 때마다 건반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을 개명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딸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딸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기도합니다. 고맙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의 길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매우 조금 희미하게 알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만 알아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생각과 소원,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길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안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지금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선택한 일은 장차 더 크고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게 될 것을 기대합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