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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51
마태복음 6장 9-13절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우리의 바램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8).
이러한 기도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6문은 두 가지로 답변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마음으로 탄식하며 쉬지 않고 구하며, 또한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들으시는 기도는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요리문답 117문은 세 가지로 답변합니다. 첫째, 그의 말씀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께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마음을 다하여 오직 그분에게만 간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필요와 비참함을 올바로 철저히 알아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전혀 자격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 주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든든히 확신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구하라고 하시는가? 요리문답 118문은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라고 답하면서 주기도에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119문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무엇인지 마태복음 6장에 있는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기도의 서문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부분을 살필 것입니다.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0문입니다.
120문.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고 명하셨습니까?
답.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 같은 공경심과 신뢰가 우리 기도의 근거이어야 마땅한데, 기도의 처음 시작부터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각성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므로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부모가 땅의 것들을 우리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더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각성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마7:9-11, 눅11:11-13).
일단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도록 가르치느냐?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칩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시는가? 요리문답에서도 설명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몇몇 구절을 언급하자면,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누구를 영접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은 좀 더 근원적으로 말씀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창조와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피조물의 근원으로써 아버지가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알든 모르든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피조물에 대하여 어떤 시인은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즉 그가 낳은 아들, 딸과 다를 바 없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자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와 관련해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지만 창조 이후 죄가 곧바로 들어오게 되면서, 특별히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이시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역시 저들에 대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증거 합니다(엡2:3). 이런 이유에서 누구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부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많고 많은 관계 속에서 왜 하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는가?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4-15)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양자의 영’과 대조되는 것이 무엇이냐? ‘무서워하는 종의 영’입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양자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무서워하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란 의미에서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때 두려워하면서, 덜덜 떨면서 기도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리문답은 육신의 부모와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므로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부모가 땅의 것들을 우리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더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각성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부모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의 부모와 비교할 수 있는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들조차 아끼지 않는 그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가 구할 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좋은 것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눅11:13).
이런 비교는 구약 이사야서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누구라도 인정하겠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이 훨씬 더 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어머니는 잊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의 마음이 변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인생과 같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민수기 23장 19절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즉 육신의 부모는 자식을 잊을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저들을 구속하신 이상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앞서 에베소서 1장을 언급했지만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이상 그들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정하신 때가 되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것은 육신의 부모조차 우리가 필요하고 말하면 들어주고자 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결코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리문답은 하나님을 향한 어린 아이 같은 공경심과 신뢰가 우리 기도의 근거이어야 마땅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그에 대한 믿음으로 기도하되,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성부만을 의미하는가? 실제로 이것으로 반론을 제시하기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성부께 아뢴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께 아뢰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르시누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결론을 인정할 수 없다. 특정한 속성들이 삼위 중 어느 한 분(위격)에게 돌려질 때에 그 나머지 분들(위격)에게는 그 속성들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추정하는 것은 올바른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피조물과 대비하여 사용될 때에는, 그 이름을 본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삼위 중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될 때에는 위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는 이름은 여기서 본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1. 아버지라는 이름이 여기서 삼위 중 다른 위격과 대비하여 사용되지 않고, 그를 부르는 피조물들과 대비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사9:6). 2.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이 지칭될 때에라도 외형적인 활동과 역사하심을 언급할 경우는 다른 위격들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 세 가지를 더 말하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할 때 아버지라는 대상은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부르는 하나님입니다.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 아들 하나님과 구별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은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도 해당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대상은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 성령에게 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리문답 자체는 ‘우리’에 대한 부분은 설명하지 않지만, 우르시누스는 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는가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각자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우리와 더불어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온 교회의 기도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물론 개인적으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들어주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부분에 있어서는 아닐지라도 함께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사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공적인 기도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상호 간의 사랑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을 고백한다면 마땅히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도의 서두에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상호 간의 사랑을 기릴 의무를 우리에게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은 한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마5:44). 원수조차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한 몸인 각 지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특히 우리는 두 번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다른 형제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구하는 것처럼 다른 형제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구해야 하고, 또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자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형제의 어려움을 안다면 저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도 같이 기도해야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우리가 도구가 되어 응답을 받도록 하는 일에 동참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1문입니다.
121문.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하나님의 천상의 위엄을 땅의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렘23:23-24, 행17:24-25), 또한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 기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마6:25-34, 롬8:31-32).
일단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하늘의 의미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할 때 그곳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다음의 말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비록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하는 곳이 있다 할지라도 그곳 역시 피조세계일 뿐입니다. 그런 피조세계가 하나님을 용납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사야서를 통해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을 통해서는 어떤 피조세계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한 것이라면, 이사야서를 통해서는 비교적으로 설명하는데 성전보다 더 큰 세계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지금 주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염두 해 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요리문답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천상의 위엄을 땅의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통해 땅의 것과 대조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늘 아버지와 땅의 부모의 대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마태복음 7장 9절에서 11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이런 비교의 극치는 시편 115편 3절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하늘에 계시다고 할 때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이요, 그런 전능하심을 그분의 의지대로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땅에 있는 자들은 대조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이유가 무엇인가? 둘째,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 기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방금 시편 115편을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고, 또한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당연히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르시누스는 여덟 가지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첫째, 땅의 부모들과 하나님이 서로 얼마나 대조적이며 다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며 하늘에 영광 중에 거하시는 천상의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디서나 하늘의 영광과 위험으로 통치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고, 그가 친히 창조하신 온 세상을 그의 섭리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온갖 부패와 변화에서 자유로우신 분이시요, 하늘에서도 자기 자신을 천사들에게 영광스럽게 드러내시고 그가 어떤 아버지이시며 얼마나 선하시며 얼마나 위대하시고 풍성하신지를 생각해 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우리 아버지시요 또한 무한한 선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특별히 하늘에서 발휘하신다면, 그는 또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며, 이 우리 아버지께서 또한 하늘의 주시요 또한 무한한 권능을 소유하고 계셔서 우리의 필요를 도우실 수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바를 쉽게 베풀어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존경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천상의 주로서 어디서나 통치하시고 또한 영혼과 육체를 모두 지옥에 던질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우리는 마땅히 그를 존경하고, 영혼과 육체를 지극히 겸손으로 그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간절한 심령으로 그에게 아뢰게 하기 위함이요, 다섯째, 그를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높여서 하늘의 것들에 고정시키게 하기 위함이요, 여섯째, 하늘의 것을 사모하게 하기 위함이요, 일곱째,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앙모하고 예배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이교도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여덟째, 구약 시대처럼 우리의 기도를 어느 특정한 장소와 결부시키지 않도록 권고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존경을 불러일으키고 간절한 심령으로 그에게 기도해야 합니다(셋째, 넷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둘째).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땅의 부모와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첫째). 다시 말해 땅의 부모조차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좋은 것이란 성령을 통해 나눠주시는 모든 내용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높여 하늘의 것에 고정시켜야 합니다(다섯째). 하늘의 것을 사모하기까지 해야 합니다(여섯째).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앙모하고 예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일곱째). 구약의 경우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만나셨지만,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여덟째).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기도조차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낮고 천한 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과 창조주만 하더라도 그 간격은 너무나도 멉니다. 거기에 죄를 더했다면 그 간격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본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입니다.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회복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양자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그 은혜를 나만 받은 것이 아니라 택하신 주의 백성들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하시면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우게 될 이 기도의 내용으로 구하길 기뻐하시며, 이 기도의 내용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