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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 주기도를 접목하기>의 줄거리:
예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만이 참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실 주기도는 십자가를 먼저 바라봄이 없으면 올바르게 할 수도 없고 내용상의 균형도 맞지를 않게 됩니다. 내용적으로 어떻게 십자가에 주기도가 접목 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십자가에 주기도를 접목하기
(마가복음 11:15~19)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에 주기도를 접목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 주기도를 접목하기’
앞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풀어보자면 “이제부터 영원토록 곡해된 성전이해를 중심으로 시스템화 된 유대교를 통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려는 구원과 관계하여 유대교를 저주하시고 폐지시키십니다. 물론 유대교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대교가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출애굽으로부터 예수님의 때까지 이미 1500년이나 지속되어온 유대교가 예수님에 의해서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적나라하게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기도에 있었습니다. 성전의 의미에 담긴 기도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선민들은 구원을 받았으되 구원을 이루지는 못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를 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어서 받은 구원을 끝내 이룰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씨와 같기 때문입니다. 좋은 씨를 받았으면 땅에 심어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지 않는다면 씨로써 받은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유대교가 그랬듯이 구원은 폐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폐지된 이유는 본문이 뜻하는바 성전의 의미에 담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땅과 하늘에서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마음은 가장 높은 곳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하고 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한편 몸과 그리고 몸과 연관된 삶 전체를 주께서 쓰시는 일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마음 채움이 일어나고 몸으로 살아가는 땅에서는 주께서 쓰시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구원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포기하였고 이 땅을 주께서 쓰시는 구원도 포기했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것은 나의 소원을 따라 이루어지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들이 믿던 유대교로부터 구원을 폐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다면 유대교와 유대교를 따르던 선민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에 대해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만이 구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기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10절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부분을 하늘에 대한 기도로 생각했고, 11절 이하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로부터 시작되는 부분을 땅에 대한 기도라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을 나누어 이해했던 것이 오해입니다. 굳이 나누자면 주기도문의 첫 단락인 9절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부분이 바로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10절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부분이 땅에서 일어날 구원에 대한 기도입니다. 11절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로부터 이어지는 기도는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부분의 부언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 몸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이득과 손해를 판단하는 자리에 선다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는 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12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기도의 나머지 부분들은 9~10절에서 나타난 하늘과 땅을 위한 기도의 부언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에 막힘이 없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절 한 구절만을 하늘에서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기도로 생각한다면 주기도 전체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주기도는 주님께서 앞으로 지실 십자가를 전제로 하여 주어진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주기도는 이렇게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기뻐할 수 있으며, 쉬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기도할 수 있으며, 범사에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감사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요청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이루셨고 내가 주님과 하나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고백 없이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항상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십자가는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속에서 일어나야 될 기도의 내용들은 주기도에 담겨져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에 들어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다 이루어 질 때까지 몸이 살 수 있도록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선하신 판단에 따라 삶이 진행되어야 하오니 나 스스로 주인 되어 손해와 이득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또 세상에서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시험에 들지 말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 다른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으신 이유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중에 이러한 내용들이 모두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기도로 기도할 때에 모든 내용들이 마음에서 되새김질되고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한편 이 주기도의 내용은 본래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루어질 기도와 마찬가지로 성전에서는 번제단을 통해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의미는 곡해되었고 기도의 의미 또한 퇴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와 유대교를 믿는 선민들은 구원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통해 기도하지 않는 자는 구원에서 제외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선민들은 구원으로 초청받은 자들이었으나 초청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버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올바른 성전방식의 기도를 하지 못해서 구원으로부터 버림받았듯이,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할 수 없다면 구원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일은 바로 십자가에 접목된 주의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부분을 채우는 것입니다.
다시 17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직역하자면 ‘성전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번역한다면 성전에 와서만 기도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전에서는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은 바깥으로부터 이방인의 뜰이 있고 유대인 여자의 뜰이 있고 유대인 남자의 뜰이 있고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모여서 기도를 하고 제사를 드리고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성전 건물이 있어서 휘장으로 나누어진 성소와 지성소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기도는 성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서든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전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다’는 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니엘을 연상하면 좋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서 성전에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역만리 머나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기도를 해야 할 곳이 아니라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향할 수 없는 기도는 모두 무효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민들이 성전을 향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물에 대단한 힘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전의 구조가 마음의 구조를 본 따 지어졌음에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모세의 율법에서 성전의 구조와 식양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물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맨 안쪽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놓인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 지성소는 휘장을 통해 성소와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소에는 기도를 뜻하는 분향단과 만족을 뜻하는 떡상과 어둠을 밝히는 금으로 된 등잔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성전을 향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마음의 구조를 되새기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마치 마음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핵심은 마음입니다. 인격도 나라는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이 인격의 바탕이 되는 마음의 설계도가 바로 성전 건물의 구조를 통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성전의 구조를 떠올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없으면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결국 성전의 구조를 통해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마음 공백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채움이라는 과제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채움에 대한 욕구는 흡입력을 발휘합니다.
핵잠수함은 핵연료를 싣고 있기에 핵융합이나 핵분열을 통해서 연료의 보충 없이 영구적으로 운행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의 공백은 일평생 삶의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그 에너지가 바로 채워지고자 하는 흡입력입니다.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겠다는 욕구를 통해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채워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인성의 과부는 외아들이 마음을 채우는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마음을 채우는 대상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마음이 지성소로 비유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들의 이름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재벌 회장들의 마음의 지성소에는 돈이라는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의 지성소에는 자녀의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의 지성소에는 부흥이라는 이름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잡게 되면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추구하게 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붙잡은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떡상은 마음을 채워서 배부름을 의미합니다. 추구하는 대상을 가져서 배불러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으로 된 등잔대는 밝히 봄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은 그 대상만을 환하게 보는 것입니다. 등잔대의 불이 어두운 성소를 밝게 하듯이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은 대상이 태양처럼 빛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는 방식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돈을 붙잡은 사람의 마음에는 돈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창 열애 중인 젊은이들에게는 애인이 마음에서 환히 보이는 유일한 태양입니다. 이것이 등잔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떡상의 의미대로 그렇게 밝히 보이는 대상이 마음을 채워서 배부르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을 실제로 얻고자 추구합니다.
이러한 성전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우리의 마음상태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은 사람은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고자 합니다. 자나 깨나 마음에는 하나님만 보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루어지게 되고 삶의 현장은 하나님께서 떠맡으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한 후에 헌당기도를 드렸습니다. 열왕기상 8장 35절을 보면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주의 이름을 찬양할 때에 죄에서 떠나게 된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성전을 향한다는 것은 곧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36절을 보면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이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죄가 용서받자 삶의 현장에 구원의 은혜가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도 이러한 기도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37~39절을 보면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지 않고 다른 대상들의 이름을 담는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돈이나 건강을 담을 수도 있고 자녀의 형통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대상들을 통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이러한 대상들을 통해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등잔대가 의미하는 대로 자나 깨나 그 대상을 밝히 보게 됩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만 보이고, 부모에게는 자녀의 형통만 보이고, 돈 문제가 있는 사람은 돈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돈만 보이는 사람에게는 돈과 관계된 인간관계만이 귀중한 관계이고 돈과 무관한 사람은 모두 마음에서 버립니다. 돈이 마음에서 태양처럼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전의 구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떡상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등잔대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만을 밝히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전과 비교하여 나의 마음상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면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번제단이 존재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365일 아침저녁으로 일 년 된 어린양의 각을 떠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번제가 드려짐을 알기에 마음은 성전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생각하며 성전과 똑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보면서 비교해봅니다.
갈릴리에 사는 어부가 마음에 고기를 많이 잡아서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을 담은 법궤가 있는 성전을 떠올립니다. 성전의 구조대로 생각을 해보니 분향단의 의미대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대신에 돈을 추구하였음을 깨닫습니다. 떡상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으로 만족하려는 대신에 돈을 많이 벌어 만족하려고 하였음을 깨닫습니다. 등잔대를 생각해보니 하나님만이 마음의 태양이 되셔야 하는데 돈이 태양이 되어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타락이고 죄악 된 상태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담음으로써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에 물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번제단에서 죽는 어린양을 떠올립니다. 어린양이 각이 떠져서 번제로 드려지듯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담은 나의 마음이 각이 떠져 번제로 드려져야 함을 인정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함과 배부르기를 바람과 태양처럼 보았던 것이 죄악임을 알고 그러한 마음이 각이 떠져서 번제로 드려져야함을 고백할 때에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 성전방식의 기도였으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성전과 비교해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마음의 구조는 성전의 구조와 똑같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담음으로써 타락하게 됩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는 모든 일이 더러운 죄악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어떤 이름을 담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달라집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았다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평강은 깨지지 않습니다. 돈을 담았다면 100만 원 떼어먹혔다고 분기탱천하여 괴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철저하게 감정과 생각과 의지가 타락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름을 담았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어린양의 각을 떠서 번제를 드리는 대신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의 사람들은 번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어린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이 들어와 있습니다. 배우자가 들어와 있습니다. 자녀의 형통이 들어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는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 할 장소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타락하고 더럽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는 기도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주기도를 염두에 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성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의 구조를 떠올리며 마음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비교의 핵심은 마음의 지성소에 담긴 이름입니다. 내 마음을 채우기 위해 어떤 이름을 붙잡았는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지, 왜 기뻐하거나 슬퍼하는지가 마음의 지성소에 담은 이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되 성전의 구조를 떠올리면서 기도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성취할 때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 또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곧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내용이며,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내용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십자가에 접목된 주기도를 통해 날마다 성취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성전의 설계도대로 마음을 비교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온전히 하늘과 땅에서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십자가에 접목된 주기도에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