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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 기운에 빨대 꽂는 법>의 줄거리:
'빨대를 꽂다'는 말은 썩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얌체'를 떠 올리게 됩니다. 부끄러움과 주저함이 없이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이지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몰래 무리에 섞여서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접촉합니다. 빨대를 꽂고 예수님의 능력만 흡입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런데 이 얌체 같은 여인을 예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늘 기운에 빨대 꽂는 법
(누가복음 8:40~48)
42.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 기운에 빨대 꽂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 기운에 빨대 꽂는 법’
빨대를 꽂는다는 표현은 대부분 부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함부로 적용하기가 꺼려집니다. 쉽게 말해 얌체 짓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예수님의 접촉 사건을 보면 이러한 표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에 휩싸여 계실 때에 이 여인이 몰래 예수님께로 다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기 때문에 몸이 부딪쳤고 예수님을 접촉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의도적인 접촉에 의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여인에게로 하늘 기운이 빨려 들어갑니다. 마치 빨대를 꽂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에 예수님께서 능력을 베푸시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보통이었다면 예수님께 간청을 드리고 예수님께서 들어주심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하늘 기운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몰래 와서 예수님께 접촉하였고 열두 해를 앓던 혈루증이 치유됩니다.
우리가 빨대로 콜라나 주스를 빨아들이듯이 이 여인은 한 번의 접촉을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빨아들인 셈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늘 기운이 이 여인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공식적인 허락도 없이 여인 안으로 능력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가히 빨대를 꽂는다는 표현을 연상시킵니다.
본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어떻게 빨대를 꽂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비유적인 장면입니다. 이 여인은 우리를 상징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서계십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빨대가 꽂히는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제대로 빨대를 꽂기를 바라시며 그리스도이자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 오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빨대를 꽂으신 원조이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몰입해계셨고 충성하셨음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채 하나님께 빨대만 꽂고 계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동생의 집에 얹혀살면서 동생과 제수씨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형이 있다고 해봅시다. 사람들은 그 형에 대해서 동생 등에 빨대 꽂고 산다며 욕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신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그렇게 빨대를 꽂고 사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으로 모든 일을 하셨고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꾸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제대로 빨대를 꽂고 하나님의 능력을 빨아 먹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빨대를 꽂으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에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 사셨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에 대해서는 진공상태이셨습니다. 진공상태의 마음으로 오직 하늘 기운을 빨아들이며 사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성경 곳곳에서 증언됩니다. 요한복음 17장 16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고 18장 36절에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받은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무리에 휩싸인 상태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두 사람의 접촉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혈루증 여인이었습니다. 이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께 몰래 다가와서 접촉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과의 접촉에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혈루증으로 인해 부정하게 여겨져 자발적으로는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은 선민사회에서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가셨을 때에 부정한 짐승의 대표로 돼지가 언급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궁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혈루증도 이렇게 부정하게 여겨지는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혈루증을 열두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부정하게 여겨졌기에 유대 종교의 모든 의식에서 제외되었고 접촉하는 사람들까지도 부정하게 여겨졌기에 종교의식과 인간관계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구조입니다. 우리처럼 종교가 구분된 사회 영역 내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종교가 일상의 삶 전반에 걸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보이던 때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여인이 부정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자격 자체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혈루증 여인은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도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심지어는 이 여인이 누웠던 침상에 닿고 만졌던 그릇에 접촉하기만 해도 부정하다 여겨졌기에 어떠한 사회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선민들과 함께 살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과 접촉하는 사람마다 부정하게 여겨졌기에 피해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혈루증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사셨지만 마음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인간 세상에 속할 수 없었던 여인이 접촉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접촉에서 여인은 예수님께 빨대를 꽂듯이 하늘 기운을 빨아들입니다. 예수님이 결재하시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이 빨아들이는 것처럼 하늘 기운은 여인에게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들어온 하늘 기운은 여인의 삶과 몸에서 치유를 일으키고 부정함을 없어지게 합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접촉하였지만 설령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이 없었을지라도 병은 나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접촉에 대한 그리움과 세상에 속하지 않음입니다.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어서 세상에 속할 수 없었던 여인이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 와서 접촉을 하는 이 장면은 너무도 아름답고 멋집니다. 그 결과 예수님 안에 충만하던 하나님의 능력이 빨대로 빨려 들어가듯이 여인에게로 들어갑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하늘 기운을 빨아들이기 위한 비결이자 조건이라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결코 종교적인 교훈이나 교리적인 차원에서만 언급되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문제는 본문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언급되어온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접촉할 때에 세상에 물들게 되고 세상 기운에 취하여 세상 기운을 표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부관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배우자와 접촉할 때에 마음은 배우자의 기운에 물들게 됩니다. 그것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로부터 물든 기운을 표현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부관계 이외에도 세상에서는 마음이 접촉할 수 있는 가치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마음이 접촉할 때에 세상 기운은 스며들어오고 세상 기운에 취하여 세상 기운을 표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과 접촉하는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깨어있을 때에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지정의(知情意)의 의식을 드러냅니다. 이 의식이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동안 마음으로 붙잡게 되고 밀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이윽고 그것에 대해 물들고 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뉴스를 통해 어떤 사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고 듣는 동안 마음이 그 사건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좋다, 나쁘다, 걱정스럽다 등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세상에 속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광풍노도를 만났을 때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광풍노도 속에 계셨으나 마음은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셨기에 염려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몸이 머물던 광풍노도의 현장을 마음으로도 접촉하고 있었고 그 결과 죽을까 염려하며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바닷물에 젖었을지라도 마음은 하늘에 머물며 뽀송뽀송한 상태에 계셨던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몸이 바닷물에 젖어있었듯이 마음까지도 젖어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속하지 않음과 세상에 속함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의식으로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식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시던 세상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젖지 않고 취하지 않은 뽀송뽀송한 상태로 하늘 기운에 물들고 취해 계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가정의 일이나 제자들의 문제로 세상 기운에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계셨다면 하늘 기운이 스며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셨지만 마음은 세상에 젖지 않은 채 뽀송뽀송한 상태이셨기에 하늘 기운이 스며들어오고 빨려들어 올 수 있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빨대를 꽂는 비결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이 하늘 기운을 빨대로 빨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 때문에 누구와도 접촉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 26절을 보면 이 여인에 대해 묘사하기를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들 또한 유대사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월절 행사와 같은 일을 앞두고 있었다면 여인과 결코 접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과 접촉하면 성전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진단이나 처방도 접촉하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자리에 앉기라도 했었다면 정결법에 따라 그 자리를 씻어냈을 것입니다.
의사에게도 접촉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이 여인은 열두 해나 되는 기간을 세상과 단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과도 함께 할 수 없었고 결혼을 할 수도 없었으며 아이를 키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기에 여인은 몰래 예수님과 접촉했을 때에 하늘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과 접촉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 앞뒤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밖에도 무리들은 모두 예수님께 병을 고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다가와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혈루증 여인이 몰래 접촉하는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을 가지고 나왔고 예수님으로부터 하늘 기운의 결재를 받음을 통해 낫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젖어있고 세상에 속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접촉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능력을 베푸시기는 하셨으나 이들을 마음에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세상에 젖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원하시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아직 세상에 속한 상태였습니다.
이 숱한 접촉 속에서 예수님은 요청을 받고 당신의 능력을 베푸신 사람들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빨대를 꽂고 능력을 빨아먹은 한 사람을 기억하고 찾으십니다. 예수님께 빨대를 꽂고 하늘 기운을 빨아들이는 사람을 기억하시고 찾고자 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장면은 참 드라마틱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접촉함으로써 병이 나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예수님을 접촉하는 순간 하늘 기운이 들어오며 혈루증이 즉시 나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많은 무리들 속에서 자신을 찾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딸이라 부르신 것에서 얼마나 반갑게 여기셨는지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많은 무리 속에서 딸을 찾듯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여인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렇게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이 혈루증과의 연관성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시되 죽을 때까지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피가 흐른 십자가를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말대로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시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십자가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십자가가 망각되고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는 세상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하게 되면 하나님께 빨대 꽂기도 중단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녀로 기억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을 때만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여인이 예수님과 접촉할 때에 부정함이 사라졌던 것처럼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게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으로 빨려 들어오게 됩니다. 내가 보고 듣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고 들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모든 대상을 향해 표현하는 삶이 진행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녀로 기억하십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접촉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기억하시고 찾으신 사람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안히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각인되고 기억되고 싶으시다면 하나님께 빨대를 꽂고 하늘 기운을 빨아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빨대를 꽂고 하늘 기운을 빨아들이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빨아들일 수 없다면 마음이 세상에 축축하게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에 물들고 취했기에 하늘 기운을 빨아들일 여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 속했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십자가를 의식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될 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고 여인에게 하늘 기운이 나타났던 것처럼 하늘 기운을 쭉쭉 빨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늘 기운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은 내 힘을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기억하는 일에 내 마음과 뜻과 힘은 온전히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빨려 들어온 하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는 일을 놓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뽀송뽀송한 마음이 되어서 하늘 기운을 빨아들이고 흡수하여 하늘 기운을 발산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절대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늘에 빨대를 꽂고 하늘 기운이 빨려 들어오게 하셔서 그 기운을 세상에 표현하는 창조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