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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상고하는 목적
본문<요5:39~40>
지난주에 ‘예수님의 자기 증거’란 내용으로 설교했는데, 방송 장비 고장으로 녹화가 오류가 났습니다. 해서 잠깐 지난주 말씀 요약하고 오늘 말씀으로 이어 가겠습니다.
주님이 ‘내가 아버지의 뜻대로 심판하는 심판주’라고 하시면서 그 증거로는 첫째가 내가 하는 일이 그 증거이며, 둘째는 ‘아버지가 증인이시다’라고 말씀 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얼토당토 않는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증인은 2명 내지 3명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누가 보더라고 공정한 자들이어야 하는데, 주님은 대뜸 자신이 하는 일이 증거이고, ㅎ님이 증인이라고 하니 누가 이 말에 대해 수긍이나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애시당초 사람들에게 추인 받아서 당신이 ㅎ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ㅎ님은 그냥 홀로 ㅎ님이시지, 인간들이 알아준다고 해서 ㅎ님이 되고 안 되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의 말씀은 내가 하는 역사를 보고 내가 ㅎ님이고, ㅎ님 아들임을 알아먹으라는 일종의 통보인 것이지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함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사역을 보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하시는가 하면,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썩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들은 자고이래로 처음 있는 일들입니다. 게다가 풍랑이 이는 바다가 말씀 한마디로 잠잠해지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니까 뿌리 채 말라 죽어 버리는 일들은 예수님이야말로 만물의 주인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신가에는 관심이 없고, 이런 일들이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율법을 어겼다고 꼬뚜리를 잡아 이단으로 몰고 가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아주 중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방금 읽은 본문 39절이지요.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 하는데,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란다. 그런데 너희들은 정작 내게로 오지 아니하니 어찌 영생을 얻게느냐?’라는 질책의 말씀인 거지요. 여기서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모세오경, 사사기, 릇기,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 시가서(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선지서 전체가 구약인데, 놀랍게도 이 모든 성경이 누굴 증거하는 거라구요? (IX를 증거 하는 책!)
아니 여러분은 구약을 읽으면서 정작 그 모든 성경이 IX를 증거한다고 여기며 읽으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면 그때부터는 성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IX를 상징하는 자들임이 보이는 거지요.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모든 사사들, 다윗 왕, 그리고 성막의 모든 제사제도, 기물들 역시 IX와 그 사역을 상징한다는 것이 깨달아 집니다.
그래서 이 방대한 성경을 어떻게 IX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쓰셨고, 또한 예수님을 중심으로 역사를 안배하시며 운행하실까? 생각해 본다면, ㅎ님의 전능성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ㅎ님이 아니시면 이런 성경을 절대로 쓰여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심오한 성경의 깊은 내막을 모르고 문자로 보는 자들은 기껏해야 성경을 윤리도덕으로 보니, 성경을 그저 ‘착한 사람 되자, 좋은 사람 되자’는 교훈서로 귀결시켜서 종교인으로 살아갈 뿐인 것이지요. 그 대표주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ㅎ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를 모르고, 액면대로 이것을 잘 지켜서 ㅎ님께 인정받아 구원도 받고 복도 받자라고 덤빈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ㅎ님도 모르고 ㅎ님의 일하심도 모르는 어리석은 소경노릇만 하다가 망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실 때에 성막도 함께 주신 이유를 알아야 했습니다. 성막의 제사에서 흘려지는 우양의 피를 보면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흠없는 짐승들이 대신 죽는 것을 보고, 대속의 죄사함에 대한 계시를 발견했어야 했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대는 경륜적으로 ㅎ님이 일부러 이걸 숨겨 놓으셨다는 것을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안다면, 사실 이런 것을 몰랐던 이스라엘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29:2~4> 읽고~
모세라는 영화 있음. 역사며 팩트임.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독립 운동은 꿈도 못 꾸는 노예 신세들이.. 당시 두 국고성(라암셋성, 비돔성) 짓는데 중대한 노동력 제공, 그들을 어린양 피로 해방시킴, 그리고 죽음의 강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넘(고전 10장 해석. 모세에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요.. IX의 십자가 속에서 같이 죽고 같이 부활함과 연계됨)
- 이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종노릇 하던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피로 구원하실 계시였음. 그러나 ㅎ님이 눈과 귀를 가리셔서 아무도 몰랐다는 말임. 단지 선지자들만 어렴풋이 앎..
<사6:8~10>읽고,
이사야가 성전에서 ㅎ님의 이상을 보게 되지요. 그러자 자신이 죄악으로 죽어야할 저주 받은 존재인 것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 때 스랍이 제단 숯불로 입술에 대니 죄악이 사해짐,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계시하심..그 복음을 전하라. 그러나 백성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았기에 아무도 깨닫지를 못할 것이라는 말씀임..(13절, 온 백성들이 망해도 그루터기만 남겨짐. ㅎ님의 언약이신 그루터기의 거룩한 씨란 바로 IX를 지칭함. 이것은 구약 율법시대가 완전히 망해져야 예수 시대가 올 것을 예고하는 내용임)
그래서 언제부터 이 숨겨진 계시가 열려진다고요? 주님이 오셔서 전하는 말씀으로부터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요약해서, 주님은 마13장에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이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으나, 저희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했다고 하셨지요. (계시가 열리는 때가 있고 대상이 정해져 있음을 시사)
이것을 바울은 좀 더 세분해서 말합니다. 엡3:9절에서, 영원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인지를 ㅎ님이 바울 자신에게 계시로 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인데 이것은 영원부터 우리 주 IX안에서 예정하신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창세전 IX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역사 속에서 IX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통해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ㅎ님의 은혜를 세세토록 찬송케 하려 하심이라는 창조 목적과 구원 목적을 바울에게 깨닫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아니까 더불어 ㅎ님의 구원 경륜을 깨닫고 감사할 수가 있는 거지요. 다시 말해서 새언약을 알기에 붙잡고 신앙하는 것이지, 우리도 구약에 태어났으면 유대인이 걸었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게 전혀 없다는 차원에서 하등의 자랑할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감사만 나올 뿐이지요.
알고 보면, 구약 이스라엘은 옛 언약의 맹점을 세상에 공표하는 면에 있어서 ㅎ님이 이용물로 등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자신감에 넘쳐서 ‘우리가 열심히 지켜서 ㅎ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ㅎ님 염려 붙들어 매세요.’ 했단 말이지요.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ㅎ님의 의도인 ‘너희들을 죽었다 깨나도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력한 놈들이야’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시에 그들은 죄로 죽은 자신들의 주제를 몰랐기에, 주야장창 말씀대로 지켜 살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만큼이나 말씀 앞에서 순종하려고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소환해서 본문과 연계하여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언급하신 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라고 말씀하심처럼,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율법을 듣고 성장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의 삶 자체였습니다.
<신6:1-9> 읽고,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언급하고 계시듯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 길이 성경의 계명들을 따라 사는 것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구원관이고 성경관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영생의 길이고, 더 많은 선을 행하면 더 많은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된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허락하신 이유는 성경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한 분을 증언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것 즉 창1:1부터 말4:6절까지 모든 단어, 구절, 문장, 문맥 모두 예수 한 분을 증거하고 있는 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ㅎ님이 옛언약 시대에는 감추어 두셨기에 아무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이유는 다 아시지요? 한마디로 테스트(시험) 기간을 운용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시험일까요? 너희 인간들은 죄 앞에서 아무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ㅎ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시는 시험이었지요.
봐라, ㅎ님인 내가 이렇게 옆에서 너희를 조력하고 도와줘도 인간은 내 뜻대로 살아내지를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샘플로서 증명하시려고 등용된 이스라엘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말씀을 붙잡고 생명처럼 여기며 산다할지라도 결국은 인간 자신의 행복을 위한 탐심의 일환으로 ㅎ님을 섬기지, ㅎ님 자신을 순순하게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새언약을 선포하시는 렘31:32절에서 잘 표현하고 계십니다.
<렘31:31~32> 읽고~
남편이 되어 옆에서 거들어 주었지만 안되더라. 그래서 새언약으로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옛언약은 인간 내가 행함으로 구원을 쟁취하는 구도이라면, 새언약은 ‘인간은 앉아서 쉬고 있어라, 대신 예수님이 모든 의를 다 행하시고 그 의를 너희에게 전가시켜 줄께’ 이 구도인 것이지요. 새언약은 영생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아예 사람 안에 오심으로 구원을 성취시킴..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노라’ 말씀하시고 운명하시잖아요. 아니, 주님이 다 하셨다는데 인간이 할 게 무엇이 있다고 떠듭니까? 그러나 오늘날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없어요. 예수님과 따로 놀지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탐심 때문에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경은 천국 가는 비법을 알려주는 길잡이에 불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의 매뉴얼이고 복 받는 비결을 알려주는 안내서입니다. 구약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러한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주제가 행복한 가정생활, 행복한 교회생활, 지혜로운 삶의 비결, 복 받는 비결, 대인관계의 비결, 리더십,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등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설교에 “예수님”이 양념처럼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첨가물이 들어가고, “성령충만”이란 조미료가 들어갑니다.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면 무엇이 우상숭배일까요?
성경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이러한 설교는 나올 수 없습니다. 설교는 성경을 해석해주는 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한 분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설교를 했다면 그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남아 있어야 할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교회를 부흥시켜야 겠다는 욕망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교인들이 듣기 원하는 멋있는 설교를 해서 그들이 죽을 때까지 자기 교회를 떠나지 않고 열심히 헌금하는 교인들로 만드는 일뿐입니다. 이런 목사들은 교회 부흥을 팔아서 자기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영업에 쓰이는 텍스트가 성경일 뿐이지요.
거기에 나와 있는 문자대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구원을 얻고 복도 받는 다고 약장사처럼 선전을 합니다. 마19장을 보면, 여기에 동화된 어느 부자 청년이 주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방법 좀 알려주세요.
주님의 답변이 무엇인가요? 네가 율법을 잘 지켰다고? O.K,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게 있구나. 네 재산을 전부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부하던 자에게 철퇴를 내린 것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이놈아, 율법에 명시된 이웃사랑은 무엇이냐?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지? 그렇다면 네 재산이 남아 있으면 안되는 거야. 그러니 그걸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곧 율법을 지키는 거지. 그러자 부자 청년의 고민하면서 뒤돌아 갑니다. 그러자 주님이 뒤통수에 대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 이게 율법의 요구 기준입니다(불가). ㅎ님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숨을 다해 ㅎ님 사랑?(불가)
그 어느 누구도 ㅎ님 말씀을 지켜서 ㅎ님께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율법의 빛비춤 앞에서- ‘나라는 인간은 나만 아는 에고이즘 덩어리로구나, 나는 망해야 싸구나. 스프도소이다. 이 죄인이 살 길은 없나이까?’ .. 하며 상한 심령으로 십자가를 붙잡으란 말이, 바로 모든 성경이 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의 진의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볼 때 그리스도를 보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즉 설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목사의 입에서는 그리스도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들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듣고 난 후 신자의 뇌리에는 그리스도 한 분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이 기억되어 있다면 그 목사는 설교에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입니다. 설교를 듣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마음에 두고 모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된 교회의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그토록 연구하고 지켜 행했던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초림 당시에도 막상 영생의 유일한 길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구하던 영생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과 다른 영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영생은 메시아 왕국의 실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아래에서 신음하며 고통 가운데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그토록 열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메시아로 등장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따랐던 예수는 허상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제2의 모세, 제2의 다윗 왕이었습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전 세계를 군림하며 풍요를 누리는 영광된 나라를 메시아로 인해 재현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현실의 복을 기대하며 예수를 믿고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천국 역시 이 세상의 나쁜 것들은 없고 좋은 것들로 가득한 현세적 천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등장한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조건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할 자가 아닌 율법 파괴자였고, 성전을 세울 자가 아닌 성전을 파괴하는 자였고, 다윗의 계보로 왕으로 등장할 자가 아닌 근본도 알 수 없는 사생아였고, 이스라엘의 평화를 이룰 자가 아닌, 검을 갖고 모든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등장했습니다. 이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사람이 있을까요? 세례 요한 조차 이런 예수 때문에 실족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이러한 실상을 알게 된다면 세계의 모든 교회는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40절/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한마디로 IX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죄의 저주를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인 것을 아는 자가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알게 되나요? 율법이지요. 그래서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께 나아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갈3:24절 이하에서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시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주여 우리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했습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겠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리처럼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갈 데가 없습니다! 라고 하란 말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놈입니다!’ 라고 나오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믿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대신 죽어 주신 분 앞에서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것은 모욕하는 것입니다.
죄 값도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고, ㅎ님 말씀도 자기가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악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행함을 방점으로 삼았지 흠 없는 짐승의 피로 예표하던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잘못된 성경관이 천국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예수를 믿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난리들입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대신 책임져 준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자신들이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을 믿음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말은 같지만 실상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인 것입니다. 행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ㅎ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 행함으로 죄다! 아니다! 라고 가늠하는 것이 죄인 줄 모릅니다. 결국 유대인들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는 셈입니다. 저주 받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이 자신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교회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릅니다. 아니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ㅎ님께서 예수를 왜? 이 세상에 보내셔야만 했으며,
ㅎ님은 예수를 왜? 십자가에 죽이셔야만 했으며,
ㅎ님은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도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믿는다는 말을 한다고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할 때는 자신을 믿지 않고 믿는다고 하는 그 대상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말 속에는 내 행함을 보지 않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자기 자신은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니 꼬라지는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자기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행위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들이 인간의 행함이 신앙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기들 생각의 믿음관으로 보기 때문에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옛 언약의 눈과 귀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자신이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마감한 것입니다.
(마 7: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기서 집 짓는 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을 비유 합니다.
집을 짓는데 두 가지 터가 있다고 합니다. 반석과, 모래입니다.
반석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고, 모래는 인간의 행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을 것인가, 자기를 믿을 것인가 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믿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가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행함이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슨 명령을 하고 있지? 라고 보게 됩니다.
결국 모든 말씀을 지켜야 할 것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항상 율법을 지켜려고 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ㅎ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라고 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눈만 뜨면 뭘 할까? 고민합니다. 이러면 일평생 말씀을 지켜야 하는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자신을 수양합니다. 일명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아니 죄인이 거룩하게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거룩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 들어가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뜻입니다.
예수 안은 거룩이고, 예수 밖은 죄입니다.
예수 안은 영생이고, 예수 밖은 저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예수 밖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맨 날 어떻게 살지? 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지 자기가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아들이지 종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쉼을 누리지만, 종은 뼈 빠지게 일해야만 합니다.
저녁때가 되면 주인이 아들과 종을 심판합니다.
종은 얼마나 일했느냐? 로 따지고, 아들에겐 무슨 일하고 놀았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누구를 붙잡고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심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밖은 무조건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옆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두 강도가 얼마나 흉악한 짓을 했으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겠습니까? 이 때, 좌편 강도는 주님을 향해 조롱합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꼽니다. 사람들은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없기에 누구든지 이런 처지에 있는 예수를 조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이 상황에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리가 행한 악한 일로 마땅한 보응을 받는 거지만, 이 분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하소서.’
아니,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것도 아무 힘없이 죽어가는 연약하고 분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을 의탁한다는 게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인가요? 성령의 감동으로 알아보는 것이지요. 이 강도는 택한 자이기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니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가 무슨 율법을 지켰으며 무슨 선한 일을 했나요? 또한 성품이 좋고 인격이 훌륭해서 구원을 받았나요? 반대지요. 강도짓만 했는데 예수를 알아보고 구원 받았어요. 유대인의 구원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사건 아닙니까? 예수 안은 구원, 예수 밖은 지옥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지식이 우리를 어떤 현실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알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높이고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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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