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일반 신념과 달리 단순히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은혜가 선행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결실을 맺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신앙의 토대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앙의 기둥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토대에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기둥으로 이루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의 한 구성요소로서 기둥은 집의 토대를 만드는 데 필연적이지 않지만 기둥을 세우려면 토대는 반드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기초가 없거나 부실한 집은 아무리 기둥이 든든하게 많이 세워지더라도 견고히 설 수 없다. 반대로 기초가 아무리 튼튼해도 그 위에 세운 기둥이 부실하면 그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1차 요소로, 인간의 신앙을 2차 요소로 삼고 서로 하나가 될 때 온전한 구원의 조건으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신앙의 적극적 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신앙의 소극적 요소는 인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by grace through faith),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by grace through freedom). 그러므로 신앙은 은혜와 자유의 절정이요,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은혜와 자유는 신앙의 중요한 두 요소가 된다. 은혜는 신앙의 기초요 자유는 신앙의 기둥이다. 어느 하나가 빠진다면, 신앙은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 이 두 요소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며, 혼합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되(不相離), 서로 섞이지도 않는(不相雜) 관계다.
신앙은 은혜와 자유의 만남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도 안 되고, 인간의 자유만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신앙이다. 그 점에서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이 “하나님의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없다는 칼뱅주의 견해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부여받은 인격성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며, 결정론적 입장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자신의 예정된 목적에 사로잡힌 포로”로 만든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긴장관계에 있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사상은 폐쇄적 예정론 안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고정불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격적 관계 안에서 역동적이다. 칼뱅주의 예정론이 조심해야 할 덫은 그것이 가진 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삶과 행동을 근거로 하나님의 택자 여부를 가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언제나 가진 자의 편에 서서 빼앗긴 자들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로 치부하는 논리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런 관점은 성공주의와 손을 잡게 된다는 점에서 복음적이지 않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04-05.